[정자기행1] 닭실마을 석천정사에서 청암정까지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쳤다 내렸다 변덕스럽다. 꾸물꾸물 길 떠나고 싶다. 소나기를 만나더라도…
봉화는 빳빳이 풀 먹인 모시적삼 같다. 정자에 앉아 글 읽는 선비의 마른 옷소매처럼 사각인다. 느낌이 그렇다. 그래서 좋다.
산은 높고 깊다. 태백과 소백이 뒷그림이다. 낙동강이 되는 크고 작은 물줄기 따라 길이 났고 사람들이 산다. 가파른 산중턱 마을에서는 기차가 선다. 승부역에 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끈덕지게 사는지를 안다. 그들은 풀씨다.
벼랑같은 그 곳, 사람들의 깊이나 마을의 역사는 하늘을 찌른다. 긴 시간 뿌리를 내린 번창한 가문과 마을이 수두룩하다. ‘닭실마을’도 그 중 하나다.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인 ‘금계포란형’ 명당이라 붙은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로 꼽힌다.
이곳은 조선 중기 예조참판을 지낸 충재 권벌의 은거지다. 그는 사화로 귀양 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후 선조 때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닭실마을은 500년 된 집성촌이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16인, 소과 59인, 참판 2인, 방백수령 12인, 의병장 2인을 배출했다. 광복이후에는 국회의원 둘, 차관 둘이 났다. 문집과 유고를 남긴 선비가 90인이나 된다.
마을은 봉화읍에서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다. 길이 없었던 예전에는 마을 앞 석천계곡을 끼고 한참 들어가야했다.
석천계곡은 태백산서 출발한 물길이다. 주변이 모두 크고 작은 바위들이다. 예전 마을사람들이 그랬듯 계곡을 따라 닭실마을로 가는 길을 걷는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 했는데 소나무숲길은 비에 젖어 이미 먼 과거가 됐다. 아득하다.
계곡입구 바위에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붉은 색 글자는 한껏 멋을 부려 날아갈 것 같다. ‘하늘 위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도깨비들이 자주 몰려와 놀며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는 서생들을 괴롭혔다. 충재 선생의 5대손이었던 권두응이 글씨를 바위에 새겨 주사칠을 해 놓자 도깨비들은 필력에 놀라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도깨비를 쫓을 주문은 아닌데 어찌됐든 글씨에 얽힌 이야기다.
석천계곡 안쪽에 ‘석천정사’가 있다. 충재의 큰 아들 청암 권동보가 지었다는데 정자치고는 규모가 크다. 닭실마을 선비들의 서당이었다.
석천정사를 끼고 소나무숲을 돌면 닭실마을이 나온다. 편안한 산길을 따라 망초꽃이 곱다. 예전 충재선생이 석천계곡을 거쳐 마을로 오다 거북바위를 발견하고 그 위에 '구암정사'란 정자를 지었다.
구들방에 불을 때니 바위가 '윙윙' 울고 꿈자리가 어지러웠다. 스님에게 물었더니 “거북이가 물도 없고 등에 불을 피우니 뜨거워 그런다”고 해, 아궁이를 없애고 정자 주변으로 연못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었다.
충재 권벌의 큰아들인 권보가 본인의 호를 따 '청암정'으로 고쳤다는데 아버지 정자에 자기 이름을 붙였으니 '정자불효'다.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다. 버드나무가 고목이 된 연못 거북바위 위에 앉은 모습은 위엄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건물이 개인 서재인 ‘충재’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자형으로 소박하고 아담하다. 장식을 하지 않아 독서를 좋아하는 선비의 담백함을 닮았다.
정자에서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충재 권벌이 살던 살림집이다. 그 앞으로 펼쳐져 있는 맞춤한 들판이 싱그럽다. 작지만 풍요롭다. 자족이란 말을 떠올린다. 이만하면 넉넉하다. 닭실마을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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