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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18>|

도심안 2019. 4. 13. 04:21

[스크랩] 배달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에 조선과 삼국이 그곳에서 건국했다<18>| [좋은나라 바로찾기]

스말 | 조회 8 |추천 0 | 2006.10.28. 09:08


▲ 티벳고원(중토)의 지도




① 신산(神山) : 6714 m Mt.Kailash 수미산(須彌山)
② 안나푸르나(Annapurna) : 8091 m
③ 마나슬루(Manaslu) : 8163 m
④ 시샤팡마(Shisha Pangma) : 8012 m
⑤ 초 오유(Cho Oyu) : 8201 m
⑥ 에베레스트 (초모랑마 : Qomolangma) : 8848 m
⑦ 로체(Lhotse) : 8516 m
⑧ 마칼루(Makalu) : 8463 m
⑨ 칸첸중가(Kanchengzungar) : 8586 m

호수① 청해호(靑海湖) : 염호, 중국에서 제일 큰 호수다.
② 남쵸(納木錯)호수
③ 얌드록 쵸(羊卓雍錯)호수
④ 귀호(鬼湖) : 락샤스 탈(Rakshas Tal)호수
⑤ 성호(聖湖) : 마나사로바(Manasarova)호수


도시명
1. 게르체(改則)
2. 초첸(措勤)
3. 동파(仲巴)
4. 사가(薩?)
5. 갼체(江孜)
6. 라오그(然烏)
7. 자율(察隅)



금사강(金沙江 : 진사강) - 양자강(長江)의 상류
란창강(瀾滄江 :란창강) - 메콩강의 상류
노강(怒江 : 누장강) - 살윈(Salween)강의 상류
브라마푸트라강(雅魯藏布江 : 야루장뿌강) - 하류(방글라데시)에서 갠지즈 (Ganges) 강과 만나 벵골(Bengal)만으로 빠진다


과거 티벳고원에 있던 지명은 중국 대륙 전체로 확대 되었다. 역사날조를 위한 지명 밀어내기는 거리와 방위 등을 참고해서 한다. 티벳고원에는 큰 강이 5 개, 중국 대륙도 큰 강이 5 개 이상이다.



▲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남후(藍侯 : 藍國은 蚩尤의 후손의 세운 나라이다)가 殷나라 淮水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揆園史話)." 淮水 남쪽 땅은 慈烏支 天皇의 中土 정벌 이래로 내내 우리나라 영토였다. 殷나라는 金沙江 상류에서 건국한 나라로 기원전 11, 12 세기에 망했다. 기원전 1284 년, 索弗婁 天皇이 殷나라의 淮垈를 정벌했을 때 부터 中土는 淮垈를 상실했다. 鮮牟國을 세운 땅은 殷나라 남부로 淮水의 북쪽에 있었다. 淮水의 남쪽이라는 저 揆園史話의 기사는 날조다.

 


 


▲ 태산정상(泰山頂上)에서,,건물이 산정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 泰山에는 도교(道敎)의 여신(女神)으로 추앙받는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당이 있다.



▲ 중토의 해대(海垈)와 날조된 해대(海岱)



해대(海垈) 일대는 일찍부터 그(蚩尤氏)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淮垈에서 보았듯이 해대 역시 海岱가 아니다. 원래는 海垈다. 黃海와 泰山 사이가 海岱가 된 것도 淸 때 이르러서다. 黃海와 泰山. 海泰밖에 안되니까, 泰山을 岱山이라고 우기면서 해대(海岱)로 고쳤다. 그러나 한 점 산에서 바다까지를 지명으로 붙일 수 있는가.

 


 


▲ 중토의 회대(淮垈)와 날조된 회대(淮岱)



보라색이 진짜 회대다. 주황색은 朱元璋이 날조한 淮垈, 분홍색은 淸이 날조한 淮岱다. 淸의 淮岱는 明의 淮垈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淮垈는 군사전략적 지역이었다. 그래서 “蚩尤天王은 서쪽으로 예탁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淮垈를 평정하셨다”(번한세가)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날조 淮岱는 군사전략상 아무 쓸모도 없는 지역이다.

中土를 확대시키자, 淮垈와 海垈 즉 揚子江에서 遼水(桑乾河)까지는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燕은 揚子江 이남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明의 날조 역사 속에서도 揚子江에서 桑乾河, 그리고 桑乾河에서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강역이었다.

淸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면서 遼水를 현 遼水까지 밀어내자, 淮垈, 海垈는 일시에 揚子江에서 현 遼水까지로 확장된 셈이다. 海垈가 淮水에서 현 遼水까지라는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더구나 탐욕스러운 濊貊族(淸)에게는 淮垈조차 너무 커 보였다. 그래서 淮垈를 淮岱로 날조해 淮水에서 泰(岱)山까지, 海垈를 海岱로 날조해 泰山(岱山)에서 黃海까지로 축소하고 나자, 燕은 발해만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 라사 시내의 포탈라 궁



“한때 天下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涿)의 북쪽에 대요(大撓)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엔 軒轅이 있었다?(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三聖紀全 下篇)." 여기서의 天下란 티벳고원 북부도 아니고, 涿鹿 일대만을 가리킨다. 李氏朝鮮 이전에는 中土 일부를 천하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三聖紀의 저 기사는 잘못된 기사이다).

 


 


▲ 한민족의 이동경로



우리민족은 神市氏가 남하하기 전에 살던 한국(桓國) 땅(시베리아)으로 도로 진출했다. 녹색은 세부 진출경로


楡罔의 도읍 空桑은 西土, 즉 티벳고원 안에 있었던 것이다. “少昊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空桑으로 들어가더니 楡罔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涿鹿으로 들어갔다. 蚩尤氏는 이에 空桑에서 제위에 올랐다(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涿鹿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는 揆園史話 太始紀는 사실이 아니다. 慈烏支 한웅은 배달 14 世 天皇으로 즉위한 후 정복활동에 나섰다. 涿鹿으로 되돌아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이다. 楡罔이 涿鹿으로 도망친 것은 涿鹿이 慈烏支 한웅의 군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회대(淮垈)와 기연(冀兗)의 땅을 모두 점거 하였으며, 탁록(涿鹿)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淮岱冀兗之地 盡爲所據乃城於涿鹿宅於淮岱遷徙往來號令天下 揆園史話 太始紀)

中土가 중국 대륙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동아시아의 통치자가 도읍할 곳이 없어서 고작 미개 땅 티벳고원 안에 皇城을 짓고 살았단 말인가.



▲ 배달나라 청구 강역도


 


慈烏支 한웅 때 동북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白山은 우리나라 영산이 아니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僳黰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한다(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河嶽鹿鈵崷莊 風氣勁雄 曰嫘黰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揆園史話 檀君紀).” 동북아의 풍경이다. 다음 설명에서 神誌氏가 받은 봉토에 대한 더욱 자세한 위치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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