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학습정보] 풍류방 영모재(다유락, 茶遊樂) 소개 ◎ 자유게시판 ◎
제가 교수님께 말씀 드렸던 저희 집 민화에 대한 사진과 풍류방 영모재에 대한 탐문조사 자료입니다. 그동안 제가 지역의 한옥문화자산들을 문화재로 등록시키며 느꼈던 것은 어떤 것은 해당 유산과 관계된 이해관계 때문에, 어떤 것은 그런 유산들에 대한 기득권 때문에, 어떤 것은 우리에게 전해진 소중한 유산들에 대한 이해나 관심 부족으로 수 없이 많은 문화유산들이 사라져 가거나 스러져 가고 있음에도 그걸 다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소개하는 이 집도 그런 여러채의 문화자원들 중 하나였고 급기야 집이 땅 값으로만 경매에 넘어가던 것을 제가 경매에까지 참여하여 낙찰을 받고 원형을 살려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줬던 이중 삼중의 고통이 따랐던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문화재로 등록하여 현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집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들 역시 지켜지게 되었는데, 아래 내용은 왜 그렇듯 제가 이 집을 지키려 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이제는 영모재가 제각이 아닌 본래의 풍류방으로 다시금 거듭날 수 있도록 뜻있는 분들의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이제부터라도 영모재는 문화 공간 다유락으로 만들어 가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보시고 댓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용찬 올림
근대문화유산 정읍 진산동 영모재 이야기
1970년대 입구에서 바라본 영모재 솟을대문
영모재 입구쪽에서 바라본 영모재 솟을대문의 현재 모습.
풍류방 영모재 본채 건물.
정읍 진산동 311-1 번지에는 2005년 11월 11일, 새내기문화재인 근대문화유산 제213호(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한말의 풍류방(風流房)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이제는 원형의 모습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영모재 솟을대문 좌우 벽면과 홍살문으로 만들어진 목재 건축물에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진귀한 민화(民畵)들이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솟을대문뿐만 아니라 영모재(永慕齋) 본채에도 조선시대(朝鮮時代) 사대부가(士大夫家)들이 즐겼다는 산수화(山水畵)가 벽면 전체를 벽화(壁畵)로 장식하고 있는데 이는 행랑채의 민화벽화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런 행랑채와 본채가 간직한 벽화는 우리나라 회화사(繪畵史)를 모두 한곳에서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회화(繪畵)는 크게 순수회화(純粹繪畵)와 실용회화(實用繪畵)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도 이제 국내에서는 정읍 진산동 영모재 한 곳 뿐이다.
민화(民畵)는 구한말까지도 서민들 사이에서 면면히 전해져 오던 우리겨레의 그림이다. 그러나 시대사적 격동기인 구한말을 거치며 점차 사라져 이제는 그 자취들마저 미술 박물관이나 소수의 개인 소장자들의 작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실이다.
영모재 솟을대문에 그려져 있는 민화벽화(民畵壁畵)들 속에서는 우리나라 민화에 담겨있는 다양한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기복(祈福) 신앙들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솟을대문 좌우 벽면과 홍살문 목조 기둥에 그려진 그림들은 일반적으로 화조도(花鳥圖)에 등장하는 학과 봉황, 백로, 기러기, 원앙, 참새, 현무, 잉어, 오리, 풍속화(風俗畵), 신선도(神仙圖), 문자도(文字圖), 민화 산수화(山水畵),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어해도(魚蟹圖) 등의 다양한 민화(民畵)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아쉬운 것은 행랑채의 그림과 동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본채 벽화들이 현재까지도 일부는 남아는 있지만 본채 외부의 본래 그림 대신 필력이 떨어지는 그림이 덧씌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본채 내부 방 벽에 그려진 그림들 역시 그림을 도려낸 흔적만 남아있을 뿐 그 원형은 남아 있지 않아 그 가치를 반감시키고 있다.
현재 본채 방 내부에는 수묵화(水墨畫)가 그려졌던 흔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그림은 없다. 현재까지도 본채 내부 벽면에는 일부 초서체(草書體)의 한시(漢詩)들과 인쇄 본 그림들의 일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원본 그림은 오려져 빈자리로 남아 본래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반면 행랑채 솟을 대문에 남아 있는 그림들은 대다수가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매우 이채롭다. 어떻게 이런 진귀한 벽화들이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채 보존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우리나라 민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벽장문과 다락문, 대문 등지에 실용회화(實用繪畵)인 민화(民畵)를 그려 주술적인 의미로 기복(祈福)을 기원해 왔었다. 이는 우리나라 회화(繪畵)가 크게 순수회화(純粹繪畵)와 실용회화(實用繪畵)로 구분되던 것을 감안할 때 본채의 수묵화와 행랑채의 민화벽화(民畵壁畵)는 빈부(貧富)의 격차뿐만 아니라 신분의 격차, 사대부가와 일반 서민들 삶의 격차를 한 곳에서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진귀한 그림들이 아닐 수 없다. 순수회화가 인간의 자연회귀에 대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 속으로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내던 것이다. 때문에 순수회화는 주로 격이 높던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즐겼다. 반면, 일반 서민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그림으로 그려내거나 주술적인 의미의 기복(祈福)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실용회화(實用繪畵)를 더욱 즐기고 아꼈다.
일반적으로 민화(民畵)로 불리던 서민들의 실용회화는 주술적인 의미의 부귀다남(富貴多男)과 부귀공명(富貴功名), 무병장수(無病長壽) 등의 소박한 동경과 소망을 그림으로 담아내던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의사소통의 창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풍류방 영모재에 그려진 이런 민화와 산수화는 우리나라 민속음악이나 민간풍류와도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전래 민화들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축적된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경주대 정병모 교수는 지난 2011년 4월 풍류방 영모재를 방문해 영모재에 그려진 민화 벽화들에 대한 평을 다음과 같이 음성(녹취록)자료로 남겼다.
→ 정병모 교수(녹취록)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민화가 전래되어 오기는 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 민화들이 급격하게 유행했던 시기는 대체로 19말부터 20세기 초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부터 민화는 붐을 타며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19세기 이전에도 민화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춘향가에 등장하는 이도령이 춘향이의 집을 방문하며 그녀의 집 형상을 노래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이도령은 춘향의 집 벽에 그려진 호랑이나, 꽃, 새, 동물 등등의 그림들을 소개하는 데 그 모든 그림들이 다 민화에 속한다.”
정병모 교수가 밝힌『춘향가』의 이도령 춘향이 집 찾아가는 대목의 가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집을 둘러보며 벽상(壁上)을 살펴보니 여간 기물이 놓였는데 용장(龍樟), 봉장(鳳欌), 객개수리 이렁저렁 벌였는데 무슨 그림장도 붙여 있고 그림을 그려 붙였으되 서방 없는 춘향이요 학(學)하는 계집아이가 세간 기물과 그림이 왜 있을 꼬마는 춘향 어미가 유명한 명기(名妓)라 그 딸을 주려고 장만한 것이었다.
조선의 유명한 글씨 붙여 있고 그 사이에 붙인 명화(名畵) 다 후려쳐 던져두고 월선도(月仙圖)란 그림 붙였으되, 월선도 제목이 이렇던 것이었다. 상제고거강절조(上帝高居絳節朝)에 군신조회(君臣朝會) 받던 그림 청련 거사(淸漣居士) 이태백(李太白)이 황학전(黃鶴殿) 읽던 그림, 백옥루(白玉樓) 지은 후에 자기 불러 올려 상량문(上梁文) 짓던 그림, 7월 7석 오작교에서 견우(牽牛) 직녀(織女) 만나는 그림, 광한전 월명야(月明夜)에 도약(搗藥)하던 항아(姮娥) 그림, 층층이 붙였으되 광채가 찬란하여 정신이 산란한지라, 또 한곳을 바라보니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은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하고 백구(白鷗)로 벗을 삼고 원학(猿鶴)으로 이웃 삼아 양구(羊裘)를 떨쳐입고 추동강(秋桐江) 칠치탄(七里灘)에 낚싯줄 던진 경(景)을 역력히 그려…….”
정병모 교수는 춘향이 방에만 9점이 그려져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같은 그림은 현시대의 갤러리 같은 형태의 그림들이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런 민화는 단순히 민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찰에도 많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통도사 명부전의 그림이다. 이곳에 있는 지장보살 민화는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 불가 쪽 그림이 많아야 하지만 벽면전체에는 불가의 그림보다 오히려 민화가 가득 채워져 있어 민화가 단순히 민간에서만 유행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정읍의 풍류방 영모재의 그림은 아마도 민화가 유행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이는 데 이곳의 그림들 역시 집 벽면자체가 말 그대로 현 시대의 갤러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높은 솟을대문과 본채 벽면 모두가 민화와 산수화로 채워져 있어 그 가치 또한 매우 높아 보인다. 무엇보다 영모재의 민화 벽화들은 우리나라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다는 민화벽화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당시의 민화가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기록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19세기에 유행했다는 민화벽화의 실체를 모두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19세기에 유행하던 벽화를 한자리에서 다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민화 벽화는 그 실체가 대부분 전통사찰에서만 그 일부가 남아 당시의 기록을 입증해 왔지만 영모재는 민간 풍류방 이고 그동안 민가에서는 민화벽화들이 발견된바 없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민간에서 유행되던 벽화의 전형을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모재의 솟을대문 민화벽화는 여러 행복을 기원하는 형태의 용가우당(용소오복)과 호측상제의 전형을 볼 수 있고 영모재 본채의 그림은 당시 사대부가에서 유행하던 사군자나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우리나라 회화사의 전형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 민화에만 등장하는 까치 호랑이의 경우는 빨간색이 아니라 약간 갈색풍의 그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풍의 그림들이 어느 시대부터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현재까지도 학계에는 알려진바 없었다. 때문에 1915년에 솟을대문이 증축되며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모재 솟을대문의 벽화는 우리나라 민화에 등장하는 까치 호랑이의 등장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
목단과 나무 민화
한쪽 벽면엔 봉황이 한쪽 벽면엔 학이 그려져 있는 보
해태 암
해태 수
쌍희자로 장식된 외벽
매화 나무가지에 앉은 새 꾀꼬리로 추정됨
학을 타고 대금을 불고 있는 신선도
목단 단청 안쪽에서 바라본 솟을대문 좌측
안쪽에서 바라본 우측 벽면
우측벽면의 현무 암 우측 벽면의 현무 수
처음 풍류방 영모재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면서 만난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영모재가 위치해 있는 진산마을은 언제부터 인가 죽산 안씨(竹山安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 어른들은 영모재(永慕齋)라는 이름 자체부터가 광산김씨(鑛山金氏)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모재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사당으로 사용될 당시에도 쓰였던 이름이고, 이후로는 농산제(農山齋), 다우제(茶友提), 다유락(茶遊樂)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마을 구전에 따르면 을유년(乙酉年)에 김평창이 어눌했던 죽산 안씨(竹山安氏) 장손에게 으뜸가는 기생을 보내 값을 흥정해 헐값에 기존의 죽산안씨 사당이던 영모재(永慕齋)를 사들여 현재의 풍류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렇다면 평창은 기존의 사당(祠堂)을 구입해 개보수 한 후 현재의 풍류방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인데 광산김씨(鑛山金氏) 가승(家升)에 소개된 영모재의 매입 경위 소개 내용은 『평창의 아버지 덕홍(德洪)이 어머니 현풍곽씨가 돌아가자 장지를 찾아 여러 곳을 헤매던 중 현재의 영모재 위쪽에 위치한 산 중턱의 묘 자리를 발견했다』내용으로 매입 배경을 소개하고 있다.
그와 같은 구전을 토대로 영모재의 역사를 나열해 보면 영모재는 ‘을유년(乙酉年)에 김평창이 어눌했던 죽산 안씨(竹山安氏) 장손을 설득해 헐값에 사당(祠堂)을 사들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 역시 구전되는 내용을 종합하면 1885년(乙酉年)이 된다.
이것을 다시 현재의 건축물로 개보수한 시기는 광산김씨 가승대로라면 1915년(乙卯年)이다. 집이 개보수 될 당시 현재의 솟을대문이 홍살문으로 증개축 되었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광산김씨 가승에도『효자이자 평소 후덕한 성품으로 알려진 덕홍은 어머니 현풍곽씨(玄風郭氏)가 10여 년 이상 병석에 앓아눕자 백방으로 어머니의 약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때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앞길을 인도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덧붙여 덕홍(德洪)이 그곳을 장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호랑이와 개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여러 가지 꽃들과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어 이곳을 장지로 선택했다.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고 적고 있다. 이후의 구전은 “시묘(侍墓) 살이 3년 동안 병을 얻었던 덕홍이 훗날 그 후유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를 정부에서 기특히 여겨 효자정문(孝子旌門)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가승에 나타난 덕홍의 기록은 『덕홍은 임인년(壬寅年, 1902년)에 돌아갔고 뒤 이어 경술년(庚戌年) 5월(1905년) 효자정문이 내려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쨌든 덕홍에 대한 효자 정문이 1905년 내려지자 평창은 이때부터 기존 죽산안씨 사당의 대문을 현재의 홍살문 솟을대문으로 개보수하는 개획을 세우는 작업에 돌입했고 솟을대문과 본채 상량문에 표기된 개국(開國) 524년 을묘년(乙卯, 1915년) 이다.
그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정읍 진산동 영모재는 일반적으로 광산김씨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증개축 설화에도 불구하고 영모재는 일반적인 사당의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풍류방 역할을 했던 본채에는 아직도 기존의 건축물을 인위적으로 더 밖으로 달아내 방을 드린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의 구전들 속에는 “질곡의 시대사 속에서도 비교적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았던 평창이 애써 영모재를 밖으로 풍류방이라고 알리지는 않았지만 알만 한 사람들은 모두가 영모재가 풍류방 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평창이 솟을대문과 본채의 내·외벽을 장식한 그림은 일반적으로 옛 풍류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림이지 사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림들이 아니다. 영모재가 풍류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885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후손들의 증언들 역시 “영모재에서는 한번도 제사가 모셔진바 없다”는 게 일반적인 증언이다. 평창은 기존 죽산안씨의 제각(祭閣)으로 쓰이던 곳에 방을 더 달아내며 풍류방으로 사용했지만 이름은 증개축 당시까지도 영모재(永慕齋)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거기에는 본래의 제각을 누정(樓亭) 형태의 풍류방(風流房)으로 꾸며 사용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여러 분란을 막고 어려웠던 당시 상황들 속에서도 비교적 화려한 삶을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위한 숨은 의지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영모재(永慕齋)는 구한말 당시 정읍의 대 부호(富豪)이자 풍류가객이던 김평창(본명 김상태)이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숨은 풍류방으로 이곳을 다녀갔던 사람들 역시 질곡의 역사 속에서 시대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게 사람들에 관한 주요 구전이다.
평창은 영모재를 당시의 풍류 가객들과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그가 이끌던 정읍예기조합 소속의 기녀(妓女)들의 기예능(伎藝能)을 심사하는 곳으로 풍류방(風流房) 영모재를 이용했다. 그런 영모재에 여러 저명인사들이 다녀갔다는 구전들은 많지만 실제로 그와 관련된 기록이 담긴 기록은 증산도 도전이 유일하다.
증산 도전에 소개된 영모재의 이야기다. 『하루는 증산께서 정읍 김평창의 집에 가시니 평창은 한평생 거문고 소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사람이 살려면 김평창 같이 살아야 하리라.” 하더라.』 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를 소개하는 글을 덧붙여 『79:4 김평창, 본관 광산(光山), 본명 김상태(金相泰 조선 철종 계축년 9월(癸丑年 九月, 1853년~1928년) 20일 출생), 강원도 평창에서 군수를 했고, 전주화약(全州和約, 동학농민혁명) 때 관군의 운량관(運糧官)이었다. 지금도 그 후손이 옛집에 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증산(甑山)은 증산도를 비롯한 여러 종파의 시조로 일컫는 강일순(姜一淳)의 호다.
영모재와 함께 구전되는 평창의 이야기는 여러 구전들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영모재가 위치해 있는 정읍 진산마을 에서는 “배고팠던 시절, 영모재에서 가끔씩 열리던 풍류 모임은 진귀한 것들을 한번쯤 맛볼 수 있었던 있었던 기회이나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등 다양하다.
그와 함께 평창을 혹평하는 구전들도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평창은 풍류방에서 잔치를? 벌이고 나면 꼭 이곳 동네 사람들을 마당에 모이게 했는데 이 또한 마을의 연례행사였다”는 구전이다.
동네 어르신들은 아직도 이구동성으로 “평창은 마루에 서서 엽전을 사람들이 모인 마당에 뿌리곤 했는데 마당에 떨어지는 엽전을 열심히 줍지 않으면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꼭 누가 가장 많이 주웠는가를 확인하고는 가장 작은 엽전을 주운 사람의 것을 가장 많이 주운 사람에게 주게 하고 부지런해야 잘산다고 호기를 부리곤 했는데 돈을 많이 차지하게 된 사람은 좋아 했지만 돈을 빼앗긴 사람들은 평창을 못마땅해 했다”는 내용이다.
이밖에 “평창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주로 예기조합이 위치해 있던 현재의 정읍시 장명동 자택에서 생활했지만 매월 며칠씩은 영모재에 머물곤 했는데 그때마다 풍류객들인지 아니면 일반 유생들인지,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영모재에 왔고 그때마다 다수의 기녀들이 따라오기도 했고 영모재에 상주하며 살던 기녀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분분하다.
어쩌면 한말의 격동기 상황에서 나름의 권력과 부를 손에 쥐고 있던 평창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평창이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렸을까? 하는 부분의 구전들을 압축해 보면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강증산(姜一淳, 1871~1909)과 전봉준(全琫準, 1855~1895), 그리고 일제 강점기 동안 은거하며 전국 각지에 수많은 글을 남겼던 윤용구(尹用求,1853∼1939), 옹택규(邕宅奎,1852-1928) 등으로 압축된다. 시기는 정확치 않지만 전봉준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에는 “평창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전봉준을 모처로 불러 분란을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들인데 그 모처의 장소가 바로 현재의 영모재라는 것이다. 실제로 평창이 영모재를 매입한 시기가 1885년이고 동학농민혁명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894년에 일어났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의 영모재가 당시의 모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이 촉발되던 1894년 1월 이전인 1893년 11월 경, 친구인 차치구(車致九)를 통해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1)에 대한 폭정을 응징해야 한다.”고 종용했었다는 구전들은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구전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훗날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던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의 아버지 차치구(車致九)를 만나기 위해 전봉준은 영모재 인근의 대흥리(현재의 입암 접지리)일대를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들은 분분하다. 이 당시 전봉준에 대한 여러 일화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가 고부군수 조병갑을 응징하면 훗날 사람들이 나를 단순히 아비에 대한 복수를 한 것으로 볼 것 아니냐, 그러니 네가 치고 내가 지원하는 것이 훗날의 분란을 막는 방법일 것이다.”고 전봉준은 차치구를 설득했다는 내용이다.
여하튼 그건 차치구와 전봉준의 이야기이고 어떻게 전봉준이 관료이자 풍류객이던 평창과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한사람은 관료였고 한사람은 혁명가였기 때문에 이들의 화합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의문들 역시 옹택규(邕宅奎,1852-1928)라는 인물사가 정리되며 해소될 수 있었다. 평창이 1915년 현재의 영모재를 증개축한 이후 붙였다는 본채 상량문에는 옹택규와 평창의 막역한 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평창은 당시 시대의 문장가 이던 윤용구를 제쳐놓고 정읍의 문장가로 알려져 있던 옹택규로 하여금 본채 상량문을 쓰게 할 정도로 옹택규와 매우 절친했다. 그런 옹택규는 또 전봉준과도 매우 막역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옹택규와 전봉준, 그리고 김평창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에 대한 탐문과정에서 얼마 전까지 정읍에서 ‘옹산부인과’를 개원, 운영했던 옹상길 원장을 통해 족보 확인과 함께 그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옹 원장은 당시 “우리 할아버지와 전봉준 장군의 사이도 막역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김평창과 친근한 관계였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가 서로간의 입장은 달랐지만 동시대 사람들로 급변하는 시국 변화에 대한 의견교류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라고 증언한바 있다.
어쨌거나 전봉준과 평창의 화합과 상생을 위한 만남이 혁명에 앞서 현재의 영모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새삼 영모재의 가치와 상징성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봉준과 평창에 대한 구전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데 “평창이 관군의 운량관으로 활동은 했지만 혁명 초기에 많은 재산을 전봉준을 통해 혁명군들에게 보냈다”는 내용들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 당시의 조정에서는 동학 난으로 발생한 피해사례들을 접수 받았는데 그 때 가장 많은 피해금액을 접수한 이가 바로 평창이었다.”는 내용도 함께 구전되고 있다. 어쩌면 그 같은 구전은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는 옛 속담을 적절히 자신의 처신으로 이용했던 평창의 슬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관료의 입장에서 질곡의 시대사를 거치며 예전의 벗들과 대치되는 상황에 직면했던 그가 한편으로는 그들의 어려움을 도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책무인 관군의 운량관으로써 정부의 따가운 시선을 절묘하게 피해갔던 그의 처신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영모재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무엇보다 빼놓을 수 이야기가 바로 이곳이 호남 향제줄풍류의 씨앗이 되었던 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풍류방’이라는 문화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지 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래 전부터 양반가에서 즐기던 문화가 현재의 ‘풍류방’이라는 형태로 전해졌고 이것이 근대기를 거치며 악공들이 성악을 제외하고 관현악만을 연주하게 되면서 이것을 연주하던 곳을 가리켜 ‘풍류방’이라 했다는 구전만 전해져 올 뿐이다.
현재까지도 정읍에는 영모재 이외에도 내장동 월영마을 풍류방 ‘샘소리 터’가 현존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직까지도 근대기 풍류방의 형태로 실제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어 정읍 풍류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사대부가에서 민간 풍류가 활성화 되던 시기는 영·정조 시대부터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데 이는 머리를 들기 시작한 세도정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왕권이 무력해지고 세도 정치가들의 세력이 커지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 도처에 풍류방이 생겨났다. 구한말 초기의 풍류방은 따로 정해진 곳이 아니었다. 대개는 대가 집 사랑방이나 한옥별장, 선인들의 제사를 모시던 제각, 또는 그들이 공동으로 기금을 모아 지은 누정(樓亭) 등을 풍류방으로 활용했다.
그들이 즐기던 풍류 역시 시조와 가사, 가곡, 정악합주 등이 주된 놀이였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모이는 곳이 그냥 풍류방이 되곤 했었지만 점차 그들의 회동이 잦아지며 점차 한곳을 정해 풍류객들이 만나 풍류를 즐기게 되며 그들이 즐기던 장소를 풍류방이라 했다는 게 풍류방에 대한 구전들이다. 앞서 영모재는 본래 죽산 안씨들의 사당을 평창이 매입해 풍류방을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한바 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조선 후기의 부유한 중인지식인들 사이에서 풍류방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고 정읍의 대부호였던 평창은 별도로 자기 자신만의 별도의 개인 풍류방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호남 향제줄풍류의 역사에 풍류방 영모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들이 있지만 평창의 사후로 풍류의 맥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는 게 지역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다. 오늘날 현존하는 향제줄풍류의 시작은 정읍에서 시작되어 전도성(1864~1940), 전계문(全桂文, 1872~1940), 전추산(全秋山)대에 와서 완성을 이룬다. 여기의 추산(秋山)은 전용선(全用先, 1888~1965)의 호다.
‘추산’은 본래 정읍의 옛 지명의 이름인 초산(楚山)에서 따온 것을 후에 추산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서 출생하여 1921년 현재의 정읍시 시기동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초기 정읍의 풍류방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 가객 등 시·서·화·악·예(詩書畵樂藝)의 뛰어난 기량을 갖은 예인들이 영모재를 찾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호남 향제줄풍류가 있게 한 천안전씨(天安全氏) 가문은 대대로 당골인 무계(巫系) 쪽 사람들로 소리와 춤을 비롯한 모든 기예능에 뛰어났다 한다.
우선 전계문의 스승이 되는 전도성은 전계문의 당숙으로 구한말 근대 판소리 5명창 가운데 한사람이기도하며 대금과 가야금, 거문고, 양금, 피리, 단소 등 모든 악기와 시·서·화에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다 한다.
그 때문인지 예능적 기량이 뛰어났던 전씨 가문의 예능 적 기량은 전계문, 전추산으로 이어지며 정읍풍류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왔고 호남 향제줄풍류의 계보 속에서 무계집안의 천안전씨들은 언제나 호남향제줄풍류의 스승이 되어왔다.
하지만 초기 풍류방 영모재에서 이루어졌던 풍류문화와 관련하여 무계 집안의 전씨들과 관련된 뚜렷하게 전해져 오는 구전이 없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구한말 초기 전국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풍류방과 관련해 호남 향제줄풍류의 대가들이 등장하지 않는 건 아마도 평창의 차남 김기남(金箕南,1889~1950)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구한말 초기 풍류방 영모재에서 열렸던 풍류가 쉽게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었던 상류문화였기에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즐기던 풍류를 오랫동안 보고 자라왔던 김기남이 아버지가 즐기던 풍류방을 모방해 당시 정읍의 아양동에 지었던 풍류방 아양정(峨洋亭)의 그늘에 가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풍류방 ‘샘소리터’의 김문선 선생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상태 (相泰, 김평창이라 함)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평창의 동생 상철(相喆)에게 양자를 갔다. 생부인 상태는 사헌부감찰을 거쳐 평창군수를 역임했으며 통정대부비서원승지에 이르렀다. 김기남은 학문에 열중하여 출사(出仕)에 뜻을 두었으나 경술국치를 당하여 왜정에서 벼슬하는 것은 치욕이라 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한다. 이 때가 21세 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김기남이 언제부터 풍류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학문을 논할 벗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1927년 아양별장을 짓고부터 본격적인 풍류를 시작한 것 같다. 현재 이화가든 자리에 본가가 있었는데, 본가에는 거의 가지 않고 별장에서 생활을 하였다 한다.」고 구전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풍류방 ‘샘소리터’의 자료에는 평창의 차남 김기남이 아양정에서 아양계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풍류를 익히고 보존하여 정읍풍류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정읍 풍류방의 역사가 영모재가 아닌 아양정이 시원이며 풍류객 모임도 그곳이 처음이라고 못 박고 있다.
풍류방 ‘샘소리터’의 김문선 선생이 구전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의 주안점은 풍류객 김기남이 결국 풍류객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결성, 오늘날의 호남향제줄풍류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구한말 정읍 최초의 풍류방이 아양정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것은 평창의 사후 가업이던 예기조합을 김기남이 물려받았지만 풍류방 영모재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장남인 김기동과 팽팽한 신경전이 있었고 이후 영모재를 둘러싼 법정 소송에서 영모재 소유권이 장남 김기동의 소유로 확정되자 차남 기남이 아양동에 아양정을 지어 나가며 아양계를 조직했기 때문에 아양정이 최초의 풍류방 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모재에서 이루어지던 풍류 모임들 역시 매번 평창이 좌장이었기는 하나 풍류를 즐기던 주류들 대부분은 그의 아들 또래나 중산층 이상의 풍류가객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즐기던 방식들 또한 아양계에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닌 풍류방 영모재에서 즐기던 방식을 쫓았던 것을 감안하면 아양정 풍류방이 2대, 김기남의 사후 김용근을 비롯한 풍류객이 새롭게 지은 이심정(怡心亭)이 3대 풍류방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평창과 그의 차남 김기남과 즐기던 주요 풍류객들이 중산층 이상의 양반 계층과 가객 구성원들 역시 대부분 그가 가업으로 잇던 정읍예기조합의 기 예능 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풍류방 영모재가 호남 향제줄풍류와 무관하다는 일각의 주장은 앞서 기술했듯 구한말 초기의 풍류방 정착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영모재의 풍류 역사는 구한말의 풍류방 정착 과정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마땅할 것으로 사료된다.
풍류방 영모재와 김평창이 오늘날 현존하는 호남 향제줄풍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모재의 자양이 결국 김기남과 아양정이라는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진산마을에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역시 종합해 보면 김기남 역시 평창의 사후 10~15년 여 동안 풍류방 영모재를 자신의 처소로 삼아 기거했던 적이 있었고 그가 영모재에 기거하는 동안 여류 판소리 명인 김소희 명창도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김소희 명창에 대한 구전은 영모재를 떠나 아양정을 이끌던 율객들 가운데에는 김상호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그중하나가 바로 김소희의 아버지 김상호였다. 이 당시 김상호는 딸인 김소희와 함께 영모재와 아양정을 오가며 기예능을 익혔는데 일반적으로 풍류방에서는 판소리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어린 김소희에게만 판소리를 가르쳐 훗날 판소리 명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남은 현재의 영모재를 자신의 완전한 처소로 삼기 위해 장자인 기동과 다툼을 벌였고 싸움은 법정으로 번져 호적상 숙부(叔父)에게 입양되어 있던 기남은 끝내 송사를 통해 집을 비워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각고의 노력으로도 풍류방 영모재를 차지할 수 없었던 김기남은 자신이 만들고 결성한 아양정과 아양계에 더욱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그런 애정이 풍류객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풍류방 영모재는 다시 제각 영모재로 전락하며 방치되기에 이르렀고 풍류방 영모재를 사랑했던 김기남 역시 1950년 6·25 전쟁과 함께 행불되며 정읍풍류의 맥도 한동안 끊긴바 있다.
그러다 6·25 직후인 1954년경부터 율객 나용주의 주도로 다시 초산율계가 만들어졌지만 다시 율계의 운영이 느슨해져 1971년~1978년경까지 정읍의 가객들 모임인 정읍정악회와 살림을 함께하며 혁신을 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초반부터는 다시 풍류모임이 느슨해지기 시작해지자 당시까지 왕성한 활동이 이루어지던 인근 익산과 전남 구례 지역 향제줄풍류가 지역 무형문화재에 등록되고 정읍은 지방 무형문화재에서 누락되기도 했다.
현재 정읍에서 현존하는 풍류모임은 1992년 기존 ‘초산율계’에 혁신을 기한다는 의미로 명칭을 개칭한 ‘초산음률회’와 기존의 초산음률회에서 1991년 분파되어 또 다른 풍류모임으로 결성된 ‘샘깊은소리’가 풍류방 샘소리터에 모여 정읍이 낳은 옛 향제줄풍류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읍은 향제줄풍류의 시원이 되는 곳으로 전도성을 비롯한 전계문, 전추산, 김용근,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기능보유자인 입암 출신의 김윤덕, 대금의 대가인 북면의 신달룡, 대구로 이사를 하여 시조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내장 단소의 명인인 유종구, 대금 정악 문화재인 김환철, 양금 문화재 준 보유자 이기열 등의 풍류 명인들이 있었다.
옛 풍류명인들의 제자로 정읍에서 풍류를 배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명성을 날렸던 인물들은 후포의 편재준과 향제시조의 창시자인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기능 보유자인 부안의 석암 정경태, 중요무형문화재 제83-나호 향제줄풍류 기능보유자인 이리의 강낙승, 구례 중요무형문화재 김무규 등이다. 평창의 차남 김기남이 세웠다는 풍류방 아양정은 1950년 김기남의 행방불명 이후 10여 년 만에 허물어져, 그곳이 아양정이 위치해 있던 자리라는 의미의 고비석이 남아 비문으로 풍류방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민간풍류의 씨앗이 되었던 정읍 영모재는 그동안 파란의 격동의 시대사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난 2005년 새내기 근대문화유산 제213호로 지정되어 앞으로도 정읍과 호남향제줄풍류의 변천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그렇듯 구한말 풍류방 영모재에서 싹틔워진 호남향제줄풍류의 역사는 한국국악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그 시원이 되게 했던 영모재와 정읍 향제줄풍류는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당시에 평창이 남긴 벽화들만이 이곳이 구한말 정읍 예기조합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
출처 :정읍문화 나들목 원문보기▶ 글쓴이 : 나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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