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34. 동학의 땅 '정읍 태인'] 시리고 아픈 역사로 쓸쓸하게 퇴락해가다.

도심안 2019. 1. 8. 05:06
[34. 동학의 땅 '정읍 태인'] 시리고 아픈 역사로 쓸쓸하게 퇴락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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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2.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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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향정.

●태산군, 정읍시 태인면으로 남아 있다

오래 전에 지역의 몇 분과 담소를 나누 던 중에 모르고 있던 몇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가 통감부시절에 전북 지역에 4개의 경찰서를 세웠는데, 전주. 남원, 고부 그리고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였다. 전주와 남원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고부와 피노리는 어째서 그랬을까? 생각했는데,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이고, 피노리는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이 붙잡힌 곳이라 그랬다.

일제는 1914년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했는데, 그 대상 군현이 대부분 기질이 강한 지역이었다.

고산자(古山子)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군현(郡縣)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1914년 이후 사라진 군과 현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39년 11월에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면서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쓰게 했는데, 그 창씨개명보다도 훨씬 앞선 1914년에 단행한 군현 통폐합 때문이었다.

유주현의 대하소설 〈조선총독부〉에는 1914년의 군·면 통폐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게 언급하고 있다. “1914년 3월 새로운 관제를 포고하여 조선의 부·군·면을 통폐합하고 97개의 군을 폐지해 버렸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조선 8도의 지방관제를 개편하면서 군(郡)은 317개소에서 220개로 조정하고 4338개의 면을 2521개로 정리하였다. 1895년에 조선왕조가 지방관제 개편을 위해 군현제를 군으로 변경했던 고을을 대폭 줄였는데, 그때 그들이 폐지의 기준으로 삼은 고을이 역사적으로 기질이 강한 고을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인 전라도의 고부는 정읍에,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열을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질이 강한 경상도의 안의는 함양에, 그리고 이필제의 난과 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으로 도호부였던 영해는 영덕에 귀속시켰다. 그 외에도 오래된 전통과 역사 속의 고을들(진위. 목천(유관순). 결성. 음죽, 청풍, 자인(한장군 놀이), 영산. 예안. 용담. 금구(정여립 사건). 정산(이몽학의 난)이 영문도 모른 채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나라 곳곳에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혈(穴)자리에 박았다는 쇠말뚝이나 지명(산. 마을이름)을 바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로서 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송두리째 앗아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때부터 유서 깊었던 그 고을들(폐군현)의 동헌이나 객사를 학교로 만들면서 그 고을들의 몰락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은 나고 죽는다. 무수한 탄생과 소멸을 통해 역사가 진전되어 온 것이라고 볼 때 굳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버린 것, 또는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연민이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사이리라.

“만물은 가고 오며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아간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글과 같이 가고 오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번창했던 지역이 흥망성쇠를 겪으며 쇠퇴해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면 비애보다도 우선하는 것은 늦은 가을날 11월과 같은 쓸쓸함이다. 1914년 까지만 해도 정읍보다 더 큰 군이었다가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정읍시의 하나의 면(面)이 된 태인(泰仁)을 찾아가는 내 마음을 무엇이라고 설명할까?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옆 솔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는 40대 중반의 뚱뚱한 여자가 차를 나르고 있었고 항혼 길에 들어선 나이 드신 어르신 몇이 다방을 지키고 있었다. 차를 한잔 마시고 말을 건넸다. “태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쇠퇴했지요?” 내 말에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태인이 이 지역의 중심지였어, 그런데 호남선열차가 신태인으로 지나가게 되면서 이렇게 되고 말았어, 60년대 만해도 태인 인구가 2만여 명 쯤 되었는데, 지금은 불과 몇천 명이나 될랑가.” 그래도 아직도 다방이 여섯 개나 된다는 태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내 눈에 비친 태인의 모습은 한가하다 못해 심심하다.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으로 되어 있는 태인은 백제 때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신라 때에 이르러 태산군(太山郡)으로 고쳤으며 바로 근처에 있던 인의현(仁義縣)을 무성(武城)으로 고쳐 태산군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9년에 지금의 이름 태인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정읍에 흡수되었다.

길은 복잡하지 않다. 옛 시절 해남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삼남대로가 지나던 길이 국도 1번이 되고 그 길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는 태인의 태인초등학교 아래쪽에 태인 동헌이 남아 있을 뿐인데 보수 중이었다.

정곤의 기문에는 태인관아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 인의의 고을인데, 아조(我朝)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아울러서 태인이라고 하였다. 읍내는 옛날 태산의 동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으므로 인의의 백성들이 왕래하는데 병통으로 여겼다. 병신년 가을 8월, 현감 황경돈 군이 나와서 두 고을의 중간 지점인 거산역 고관(古館)을 현의 객사로 삼았으나, 너무 좁고 누추하였다. 무술년 겨울에 오치선 군이 계속해 와서 고관의 지세를 살피고 후청, 동서침, 낭청 동서행랑을 세우니 모두 몇 칸이다.”

태인의 서쪽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이 성황산이다. 성황산은 성황신을 모신 산이었는데 성황당은 동학농민혁명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 산외면 김개남 묘.

이곳 태성리는 본래 태인군 군내면 지역으로 향교의 대성전을 본 따서 태성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태인향교 남쪽에 있는 정자인 만화루(萬化樓·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75호)는 조선 영조의 어머니인 최씨나 단종비 정순황후 송씨가 이곳에서 출생하여서 건립하였다는 얘기가 남아 있다. 향교 뒤편으로 보이는 성황산 중턱에는 현대의 산물인 산장모텔이 들어서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 태인을 진호(鎭護)하였던 진산(鎭山)은 어느 산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산천’조에는 “죽사산(竹寺山) 현의 북쪽 2리에 있는데 진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무리 태인 사람들에게 물어도 죽사산을 아는 사람이 없다. 동헌 뒤편에 있는 산은 성황산이고 증산교의 한 파인 미륵불교총본부 뒤편에 있는 항가산(恒伽山·120m)이 진산일 듯싶지만 어느 때부터 죽사산이 항가산으로 변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무성서원 등 곳곳에 최치원의 자취

이곳 태인의 여러 곳에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 있다.

“최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이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루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

‘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은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로 와 있던 최치원이 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 온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현종 때 현감 박승고가 중건 한 뒤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지난해에 다시 보수 되었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4면이 모두 트여 있고 기둥이 33개이고 빙 둘러 난간이 처져 있는 연등천장이며 합각 밑에 우물반자를 두었으며 보물 제 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지는 객관 남쪽에 있다’ 고 하였는데 연지는 지금도 정자 아래쪽에 남아 있다. 원래는 상하연지가 있었는데 상연지는 민가가 들어서면서 도로로 편입되고 하연지만 남았다.

일제 이후 한때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기둥마다 상처를 입은 피향정에 수십 개의 공적비들이 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를 세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조병갑은 고부군 수로 부임하자마자 그의 아버지 조규순이 이곳 태인현감을 지냈던 것을 핑계로 주민들의 혈세를 모아 선정을 베푼 그 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노라고 태인현감조규순영세불망비부터 세웠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비석들이 많이 서 있고, 이름난 산의 반반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누군가도 모르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단기간 내에 치부를 할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었던 조병갑이야 오죽했겠는가,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아주 선명하고 그 뒤편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다만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하단은 부러져 그 아랫부분이 없는 것을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비를 세우며 재미를 본 조병갑이 백성들의 물 걱정을 덜어주겠다고 원래 정읍천변에 구보가 있었음에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동진강에다 만석보를 만든 뒤 물세를 더 걷게 되면서 근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이 유발된 것이다. 한편 피향정 북쪽에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해인 1885년에 헐리우고 앞의 연못은 메워져 시장이 되고 말았으니 세월의 탓인가? 사람의 탓인가?

태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칠보면 무성리에는 최치원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광해군 7년인 1615년에 창건하여 최치원을 모셨던 태산사를 중종 때 현감을 지낸 신영천(申靈川)을 모셨던 생사당을 합해서 숙종 22년에 무성서원의 무성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무성서원은 신잠과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과 김관을 배향하였는데 이 서원은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 또는 소수서원처럼 잘 짜여진 위세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노란 단풍으로 갈아입을 때는 켜켜히 쌓인 역사의 숨결을 접할 수가 있어서 다시 가고 싶은 서원이다. 이 서원은 고종 5년(1868) 전국의 서원이 철폐될 때도 살아남은 47개 중 한곳이며 사적 제 16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태인 근처 칠보면에는 원백암 남근석이 있고 산외면에는 중요민속자료 제 26호로 지정된 김동수씨 고가가 있다. 한편 태인의 성황산에서 우금치 싸움에서 패한 동학군이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 진 전봉준은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입암산 너머 순창의 피노리로 갔고 김개남은 회문산의 종성리로 피신을 했다.

전봉준은 그곳에서 부하접주였던 김경천의 고발로 관군에게 다리가 부러진 채 붙잡혔으며 김개남은 회문산 아래 산내면 종성리 매부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 마을에 옛 친구 임병찬이 있었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고 그 근방의 부호였다. 임병찬이 아랫마을에 있는 김개남에게 자기가 있는 마을로 올라 오라고 한 뒤 전주 감영에 신고했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강화 수비병의 종군이었던 황헌주와 포교들을 보냈다.

김개남이 숨어 있던 집을 포위한 관군이 “어서 나와 포승줄을 받으라”라고 말하자 김개남은 측간에서 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다. 똥이나 누고 나가겠다.”하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를 잡아 갈 적에 그가 혹시 도술을 부릴지 모른다고, 열 손가락발가락 손끝 발끝에 대꼬장이를 박았다고 한다. 김개남은 전주로 끌려가 전라관찰사 이도재의 즉결심판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효수당하여 고난에 찬 생애를 마감했다.

그 처형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적 김개남이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았다. 심영(沁營)의 중군 황헌주가 개남을 포박하여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 이도재가 개남을 신문하였다. 개남은 큰소리로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 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는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모두 잡히지 않았다면 종성리에서 김개남을 만나 재기의 칼날을 갈았을 것이다. 김개남을 밀고한 임병찬은 훗날 면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대마도까지 동행한다. 면암 최익현의 순절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다시 체포되었고, 1916년 5월 유배지 거제도에서 단식사하고 만다. 나라를 위한 마음은 똑 같았지만 나라를 위한 방법은 그렇게 달랐다.

이렇듯 시리고 아픈 사연을 간직한 태인에서 하루를 보내고 시외버스에 올라 전주로 향했다. 그 때 유장하게 흐르는 동진강변에 자리 잡은 태인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고, 어디선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