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이 되어 전도의 길에 나섰다. 트럼펫을 들고 가방을 들고 거기에 보면대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것 이지만 제법 무거웠다. 노방에서도 트럼펫을 부르며 사람들이 몰려와 복음을 전하고 각 교회에서도 특별연주로 부르며 전국 순회 전도를 했다. 충청도에서는 감리교회가 많은데 온 마을이 스레트 지붕으로 개량되어 군데군데 파랗게 혹은 빨갛게 페인트칠이 되어있었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우리나라 새마을 시범 마을로 이장님이 이 인화 목사님 이셨는데, 너무 인자하시고 훌륭하신 목사님 이셨다. 그 마을사람들 전채가 다 믿음을 가졌고 안 믿는 가정은 새로 이사 온 가정이 한 두 가정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목사님 말 한마디에 온 집들이 다 지붕개량을 하고 마을길도 넓혀 모두 손수레나 우마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래서 대통령상을 받게 되셨는데, 하루는 꿈을 꾸는데 자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고 그 감격을 말씀해 주시면서 박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 주셨다. 아들이 셋인가 있었는데, 고등학생인 둘째가 아버지의 250cc 오토바이를 타고서 나에게 뒤에 타라고 하여 탔더니만, 좁은 논둑길을 잘 다녔다. 아슬아슬한 묘기대행진처럼 금방 논으로 들어갈 것 같았지만, 오히려 작은 오토바이보다 덜 위험하다고 하면서 이곳저곳 속회예배를 드리는 집으로 데려가서 예배인도를 하게 해 주었다. 목사님께서 속장님에게 특별히 부탁 하신 것이다. 감리교회의 속장님은 우리 장로교회의 구역장님이시지만, 작은 교회의 전도사에 못지않게 더 열정적으로 사명에 불타 있었고, 열 대 여섯 명 정도가 모여 속회가 아주 뜨거웠었다. 나는 우리 고향 불목리 옆 동네인 교인동을 생각해 보았다. 마을 명칭이 교인동이다. 교인들만 사는 동네이다. 황장로님 아들이 내게 말해 주는데, 교회 다니는 가정이 거의 100%라고 한다. 만약에 안 믿는 가정이 있다면 농사를 짓기가 힘들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두 품앗이를 해야 하는데, 소며 일꾼이며 모내기나 탈곡이나 자기 혼자서 농사짓기가 힘들어서 아무리 믿기 싫어도 믿는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바로 이 마을에서도 다들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이장을 목사님이 하신 것은 그때 당시에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지식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목사님을 나두고 자기가 선뜩 이장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목사님이 어떻게 세상적인 일도 할 수 있느냐 생각해 보았지만, 이웃 여러 마을에서도 성도들이 많이 나오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한 마을이 다 복음화 되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멋진 목회를 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신앙으로만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인들끼리만 모여서 살 수는 없는 것이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다 같이 모여 사는 것이 사회요 이 세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때 천국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지옥도 만들었다. 천사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마귀 사단도 만들었다. 선과 악을 만드셨고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앞에 두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권을 주셨다. 선의 열매는 생명나무요 먹으면 살고, 악의 열매는 먹으면 죽음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참 빛과 생명이시고(요1: 14:) 마귀 사단은 멸망의 자식 곧 사망이요 어둠의 주관자요 죄의 근원이다. 성경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곧 믿는 사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 열 사람이 없어서 불로 멸망을 당했는데, 그 부락 사람들은 믿음으로 온 마을이 99%나 된다니 얼마나 복 받은 부락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에 환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1979년 새해가 되어 어머니께서는 산에서 사는 것이 너무 외롭다며 서울로 가자고 하셨다. 서울에는 남동생도 있고 동생의 댁 올케도 있고 조카들도 있고 하니 용문산 집을 팔고 서울로 올라가자고 밤이고 낮이고 노래를 부르신다. 아무리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조용한 곳이라지만 산골짜기에 사는 것은 싫증이 나기 마련인가 보다. 나는 이곳에 온지가 3년이고, 어머니께서는 일 년 반이 된 셈이다. 3월 4일 주일날 아침 10시, 결혼 한지 일 년 만에 아기가 출산한 것이다. 아들이다. 첫 출산이라 집에서 어머니와 신집사님과 내가 곁에서 산파도 없이 받아 낸 것이다. 바늘실인 무명실로 탯줄을 묶는데 약 3cm 만큼 길게 남기고 여러 번 돌려가며 묶었다. 그리고 가위로 탯줄을 자를 때에도 묶는 부분에서 약 3cm 남기고 자른 다음 소독을 해야 하지만 소독약이 없으니 깨끗한 탈지면 즉 약솜을 조금 떼어서 자른 부위에 부치고 둥그렇게 말아서 배에 반찬고로 붙인다. 어머니께서는 자녀를 낳지 않았지만 손자 손녀들을 많이 받아 보아서 오랜 경험으로 척척 잘 해 나가셨다. 나도 물을 데워다 주며 그러한 것들을 눈으로 보고 배웠다. 만약에 아기가 울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을 수 있으니 거꾸로 두 발을 잡고 엉덩이를 딱 쳐주면 숨을 쉬며 울음을 터뜨린다고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먼저 부드러운 무명귀저기로 얼굴을 눈과 입 코를 잘 씻어 낸 다음 따뜻한 물을 커다란 대야에 받아 온 몸을 잘 씻어 준다. 그리고 아기의 배속에 있는 이물질을 빨리 나오게 하기 위해서와 입에 살균을 위해서 참기름 한 스푼 넣어 주신다. 임신 중에 잘 먹지 못해서 그런지 아기도 빼빼 말랐고 엄마나 아빠도 제법 미남 미녀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그렇게 못생겼는지 실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리가 길쭉한걸 보니 키는 좀 크게 생겼는데, 결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가짜 수도사 아들이라고 저수지 뚝 위에서 내려오던 그 스물일곱 정도의 늘씬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그려져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금처럼 임신이 언제 되었는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고 출산일도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가려고 준비해 놓았는데, 갑자기 아기를 낳으니 한 5일쯤 있다가 이사를 하기로 했다. 남들 같았으면 보름이나 한 달 가량 몸조리하고 이사를 해도 했겠지만, 출산한지 5일 만에 서울을 향해 이사를 감행해야 했다. 그것은 신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2월에 평안교회 이진 목사님과 함께 서울에 지방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아시는 목사님이 학교장으로 석원태 목사님이시라고 하셨다. 1학년에 입학원서를 접수하여 시험을 치르려고 날자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당동 총회신학교가 문제가 생겨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진다고 하면서 총회신학교에 입학하러 가자고 하시면서 잘 하면 이진 목사님께서도 교수로 가신다고 하셨다. 이유인즉 김희보 학장이 문서 설을 주장하여 모세가 애급나라 바로의 궁전에서 많은 학문을 익혀 하무라비의 법전을 공부하였고 그 영향으로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배워서 기록했다는 설이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는데, 지식이나 학문으로 기록했다고 하니 모든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당시의 교수요 신학박사였던 박윤선 신복윤 교수들과 박형룡 박사님의 자제분이신 박아론 박사님도 정기오 목사님도 모두들 신학지남에 수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에 기록된 모세오경의 문서설을 비판하며 결국에는 사당동 총회신학을 떠나고 말았다. 박윤선 신복윤 박사님은 반포에 있는 모 교회로 나가서 합동신학원을 세웠고, 박아론 정기오박사님은 방배동 영광교회에 총회신학을 세웠다. 영광교회는 최광재 목사님께서 건축하였고, 그때에는 방배동에서는 제일 큰 교회였다. 그 교회는 동아제약 회사의 사모님이셨던 권사님께서 대지 500평을 기증하여 세운 교회였다. 최광재 이사장으로 박아론 박사님께서 학장으로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약 600여명이 입학 또는 편입학했다고 한다. 거기에 야간신학교가 문을 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야간신학교 2학년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바로 비주류 총회신학교로서 그렇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만이 최고의 정통주의 장로교단이라 자처했던 아니 장로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교단 중에 제일 최고라고 자처하는 바리세적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교만한 바벨탑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 했다. 총회신학교도 셋으로 갈라졌고 총회도 셋으로 갈라졌다. 나와 같은 부족한 사람은 감히 쳐다 볼 수 없었던 총회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고, 나를 위한 분열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어떤 교수님은 총회신학교가 분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총신 강단 맨 앞에 예수님 사진도 걸어서는 안 되겠지만, 칼빈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예수님보다도 칼빈을 더 우상화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기도 했다. 장로교단은 교회 강단 앞에 십자가도 달지 않는데 십자가도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칼빈주의를 공부하면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더 깊이 연구할 수가 있었다. 우리 집은 서문여고에서 가까운 냇가 바로 옆에 있었다. 홍수가 지면 냇물이 넘쳤고 집안 연탄을 저장하고 아궁이가 있는 지하실에 물이 들어 퍼내기도 하였다. 총신대에서 방배동으로 연결하는 다리공사가 완공되었고 다리 건너 방배동에는 거의 80%가 산이었고 밭이었다. 밭에서는 집에서 퍼 내온 재래식화장실 똥들이 여기저기에 쏟아 부어져 있었고, 냇가에는 제법 높은 흙더미가 쌓여 약 200평정도 밭으로 되어있어서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그 빈 터전을 일구어 밭을 만들었고, 호박도 심고 무 배추도 상치도 심었다. 장독대에서는 지난해 가을에 사 놓았던 양봉 세통이 놓여 있었고 벌들은 열심히 윙윙거리며 산이며 밭에서 화분을 뒷발에 붙여서 노랗고 빨갛고 하얗게 달고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양봉 한통에서는 왼 일인지 허리에 하얀 띠를 띠고 모든 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이야기 듣기로는 토종벌들은 사람이 죽거나 주인이 죽거나 하면 애도의 표시로 흰 띠를 두른다고 말은 들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양봉이 흰 띠를 두른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신이 나서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고 언제 꿀을 뜨느냐고 꿀을 달라고 아우성 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산으로 약수를 뜨러 다니는데 방배동 산골짜기로 간다. 사람들이 많아 물통을 줄 세워놓고 우면산 꼭대기까지 마라톤을 한다. 가을이 되어 산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조금 길쭉한 것은 도토리지만, 둥근 것은 상수리라고 한다. 도토리도 몇 종류의 도토리가 있다. 나무가 커다랗고 약 5m~10m 되는 보통 도토리와 나무가 그렇게 크지 않고 땅으로만 퍼져 나가는 높이 1~2m 밖에 되지 않는 도토리도 조그맣고 더 길쭉한 도토리가 있는데, 또 한 종류는 아열대 식물이고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남쪽 해안에나 있는 붉가시나무 열매가 도토리와 똑 같이 생겼다. 어릴 때 우리 옆 부락인 충무리에 충무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순신장군이 거처하며 살았었고 해전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름도 없는 충무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 곧 초상화가 있었고 완도군이나 강진군 해남군 이쪽으로는 이순신장군 이 충무공의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러 각 고을 군수들이 다 모여 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고금면에서는 유일하게 충무사 절에만 아열대 식물로 동산을 이루고 있었고 가을철만 되면 도토리 주우려 그곳으로 간다. 초등학교 가을 소풍을 그곳으로 가는데 도시락을 다 먹고 물로 잘 씻어 그 도시락에 도토리를 가득 주워 담아 온다. 학교에도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노트나 연필하고 바꾸기도 하고 도토리 팽이 누가 오래 돌리나 꿀밤 때리기 내기도 한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사택 뒤 언덕에는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있었고 그 열매도 껍질을 벗기고 먹기도 하는데 먹을 때는 좀 쓰지만 물을 마시면 그렇게 달수가 없다. 그러나 팽이로는 부적합하여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도토리를 많이 주워와 어머니께서는 잘 손질하여 껍질을 벗기고 믹서기에 갈아 도토리묵을 쑤었다. 대접 놋그릇에 수 십 개를 퍼서 이웃집마다 나누어 주었고 남아서 서문여고 앞에 방배동을 잇는 다리에 자리를 잡고 어머니께서 팔았다. 맛이 있어 도토리묵은 금방 팔렸고, 냇가에 심어놓은 열무를 뽑아다가 금방 다 팔았다. 나중에는 콩나물도 가져다가 팔고 하다 보니 처음에 한 두 사람이었던 것이 제법 시장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내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스물여섯의 새댁으로 길거리 콩나물 파는 장사꾼이 되었다. 어머니의 돈을 빌려간 친정 조카며느리는 돈을 줄 생각을 않고 뒷방은 조그마한 가게였었는데 그냥 방으로 세를 주어 세준이 엄마가 혼자서 세준이랑 살았고 작은방도 둘째 조카가 살다가 60만원을 주어 다른 집으로 방을 얻어 내 보냈다. 나도 그 이웃집 연탄아궁이를 고쳐 달라기에 네루식에서 아궁이식으로 고쳐주었는데 보통 한 집에 방이 셋 모두 고쳐주면 일당으로 몇 천원 주었다. 방이 고루 따뜻하다는 소문이 돌아 그 일대 여러 집을 다 해 주었다. 평안교회에서는 교육전도사로 주일학교 곧 교회학교를 맡았고 처음에는 5만원 나중에는 10만원을 주었다. 박창수전도사는 학생회를 맡았다. 1980년이 되어 나도 나이가 30세가 되었다. 집사람은 방배동으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길거리 장사꾼이 다 되었다. 어머니는 나이가 일흔셋이 되었고, 두 살 된 손자인 손권을 돌보느라 재미에 푹 빠졌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나니 학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남측 정목사가 청담동에 새로이 총회신학교를 세우고 분열을 한 것이다. 그렇게 북적거렸던 학생들도 반으로 줄어든 듯 했지만, 곧 회복이 되었고 그해에는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몸부림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광주에서도 대학생들이 부르짖던 민주항쟁은 모든 국민들까지 자유를 부르짖었다. 오월이 되어 결국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남 도청에 발포명령을 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신문으로는 볼 수 없었으나 외국 신문 헤럴드에서나 밤에만 뿌려지는 전단지를 보고 그 현장을 약간은 바라볼 수 있었지 일반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보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피가 끓었고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내 동창인 재평이도 죽었는데, 신혼에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기 집 방에서 창문으로 총탄이 날아와 죽었다 한다. 우면산에서 관악산으로 가려고 걷다보니 군부대가 가로막혀 있어 남태령이란 곳으로 내려오려는데, 작은 굴이 하나 있어서 들어가 봤더니 금을 캤던 굴이었다. 굴속에 들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하고서 그곳을 나의 기도처로 정해 놓고 매일 그곳에서 기도를 하는데, 어느 날 3일간 금식기도를 하였다. 산을 내려오는데 청년들 세 사람이 올라가더니만 금방 산에 불이나 헬기가 뜨고 야단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남태령 저 산 밑에 소를 기르던 우사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등대교회가 있었다. 등대교회 아래에는 빈 집이 하나 있었고, 건너편에는 관악산인데 군부대로 인하여 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큰 길을 따라 사당 사거리로 해서 관악 경찰서를 거쳐 조금 더 걸어야 서문여고 앞에 우리 집이 있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큰 방을 내어주고 가운데 방인 작은 방에 거하게 되었는데, 사소한 일로 화를 내셨다. 그리고 우리를 나가서 살라고 하시면서 큰 소리는 집안을 떠나갈 듯 했고, 사흘이 멀다 하고 소리를 치시니 나도 좀 나가서 살아보고 싶었다. 우리에게 잘 해 주면서도 입으로 그 공을 다 갚고 내 학비도 감당하기 힘들었었고 작은방과 뒷방의 사흘세를 받아 살아가기에 좀 너무 부족해서 조카며느리에게 빌려준 돈을 아무리 주라고 해도 주지 않아 더욱 속이 상하셨고 우리마져 너무 부담이 되니 그러셨는지 몰라도 예전처럼 보통 나가라는 것이 아니고 완고하게 하셔서 하는 수 없이 남태령 산 밑에 있는 소를 기르는 우사로 나가서 살게 되었다. 그 우사는 과천으로 이사 간 소를 기르던 사람이 강남 청담동에 사는 장 여인에게 팔고서 간 우사였다. 우선 빈 집이라 방이 한 칸 있어서 살고 있으니 장 여인이 나타나서 50만원은 받아야 되는데, 30만원 전세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돈을 건넸다. 1980년 가을쯤 되었고 큰아이 권이가 제법 잘 걸어 다닐 때 이었다. 집사람은 둘째를 가져서 배가 많이 불러왔고 6~7개월 되었을 때였다. 집사람은 남성시장으로 옮겨서 콩나물을 팔았었고, 나는 신학교 3학년에 다녔는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지방을 내려가시면서 나에게 수요일 설교를 맡기고 떠나셨다. 그날 밤 설교에서 칼빈의 예정론에는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을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더 열심히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설교를 끝냈는데, 신학을 공부하신 사모님의 귀에는 예정론을 부인했다고, 목사님께서 돌아오시니 “손전도사가 칼빈의 예정론을 부인 했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한 달이 되었는데도 10만원 사례비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문이 나에게 들려왔다.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그만 두라고 하시지 않고 아무 말씀도 없었는데, 나는 생각했다. 이제는 이 교회도 떠나야 되겠구나! 하고서 이교회 저 교회로 다니며 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서머나 교회라고 하는 지하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J목사님께서는 순교복음이라는 멧세지로 생명을 주님께 받쳐야 한다고 하면서 돈암동에 박목사님의 영권과 귀신 쫓는 김 아무게 목사의 권능을 배웠다면서 예배 후에 특별 기도회를 가지고 성도들을 세워놓고 “쉿” 하면서 손을 펴서 장풍을 사용하는 것처럼 밀어내는 흉내를 내면 서 있는 성도들이 뒤로 벌렁 넘어지게 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넘어져 있는 성도 옆에 가서 “입신으로 들어간다. 입신으로 들어간다.” 하면서 “지옥으로 행” 하면 온갖 얼굴을 찌 뿌리며 “아이 뜨거워” 하며 지옥을 가는 것처럼 하고, 또 “천국으로 행” 하면 금방 얼굴이 웃음으로 바뀌면서 아름다운 꽃밭에서 향기를 맡는다고 하는 “아이 향기로워 아이 좋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여자 전도사님이 한분 계셨는데, 충남 당진에서 올라온 집사님이셨는데 예언을 잘 하여 신학을 하지 않고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남편은 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하였다가 퇴직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그 교회에 다녔다. 늘 간첩 잡은 이야기로 긴 시간 재미있는 이야기 시간이 되기도 했다. 교회에서는 전도사들도 몇 명 더 있었고, 대구의 계명대 출신의 성악을 전공했던 전도사도 있었는데, 성도들이 모여서 여전도사님이 예전처럼 예언이 잘 안 맞아서 왜 그렇게 신통력이 없어 졌는지 수근 거리기를 시작했고, 전도사님과 목사님은 반포에 있는 어느 권사님 댁으로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려는데, 나도 예언기도가 받고 싶어서 따라가려고 했으나 예언기도를 받기 위해서는 시날산 외투 한 벌 곧 파카 한 벌 값이 1만5천원 인데 철원 기도원에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파카 한 벌씩 사 주기위해서 돈을 내어야만 예언을 해 준다고 하여 난 돈이 없어 못 갔다. 모두들 갔다 와서는 하는 말 별로 신통치 않고 맞추지 못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괜히 갔다가 거금 1만5천원만 헌금하고 왔네유” 하고 후회를 하는 것을 보고서 언제는 남들에게 예언을 그렇게 잘 한다고 하더니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자기의 앞날을 모르고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고 생각했다. 조 목사님은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금식기도를 하시려고 세곡동인가 네곡동 인가 청계산기도원으로 기도를 가셨는데, 하루인가 이틀 만에 교회로 일본에서 온 기도 라고 하는 목사님을 모시고 왔다. 제일교포 라고도 하고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왕년에 경찰이었던 집사님은 그 일본에서 온 목사님을 보고 며칠 만에 본색을 드러내어 “이 빨갱이 새끼 너 조총련계지?” 하고 쏘아 붙였다. “기도목사 아니 개 똥 목사라고 해라 엉 기도하러 산에 갔으면 좋게 기도나 할 것이지 왜 남의 목사님 기도도 못 하게 하고 이리 왔어 엉” 하고서 다시 목사님을 기도원으로 보내셨다. 목사님은 이번에는 5일 만에 이 용운 이라는 40정도 먹은 중년 남자를 한사람 데리고 왔다. 자기가 영락교회 유명한 장로님 아들인데, 건축 사업을 하다가 일이 잘 안 풀려서 기도하러 왔는데 면목동에 무슨 빌딩이 자기가 지은 자기건물이라면서 약도까지 가르쳐 주니까 그대로 믿었다. 그러면서 2층 한 층을 그냥 무료로 빌려준다고 하니 목사님뿐만 아니라 전직경찰이었던 김 집사님도 가서 보니 건물을 거의 90% 짓고 있어서 그대로 믿고 와서는 해달라고 하는 모든 것, 즉 술 고래였는데 술도 사다가 주고 고기도 사다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한 열흘 동안 없는 돈을 꾸어서 대접하느라 이것이 먹고 싶다 하면 이것 사주고 저것이 먹고 싶다 하면 저것 사 주고 교회에서 술까지 사다 줬으니 얼마나 웃기는 사기꾼인가! 말이다. 하루는 건물에 갔다 온다면서 택시비 좀 주라고 하니 넉넉하게 5만원을 줬는데, 그 길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었다. 건물에 가서 자세히 물었더니 우리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면서 모두가 다 거짓말 이었다. 나도 정말 그 사람은 사기꾼 같지가 않았는데 사기를 처음 당해 봐서 그런지 정말로 신기하고 이상하기만 했다. 김 선배집사님은 나와 친구처럼 지낸다. 라디오에 들어가는 아덥터를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늘 재료를 사다가 아답터를 만든다. 총신대 입구에 고물상이 하나 있었는데 만물상회라고 하여 없는 것이 없었다. 더러는 그 곳에서 이것저것을 사다가 전기 모터를 사다가 아덥터 만드는 기계도 손수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형님의 사업을 도와주러 다니다가 신경을 너무 많이 써 그만 신장이 갑자기 나빠져 며칠에 한 번씩 투석을 하러 다녀야만 했다. 어느 날 나는 그 고물상 만물상회에서 강아지를 일곱 마리나 낳았는데, 우리 집은 외딴 집이고 해서 1천5백 원을 주고강아지를 한 마리 사왔다. 집사람이 시장에서 이면수 생선대가리를 주어다가 우리도 삶아먹고 강아지도 먹이고 해서 강아지가 무럭무럭 자라나 커다란 강아지가 되어 아주 영리하여 두 살 된 권이랑 잘 놀아주었다. 1980년 11월 15일 둘째가 태어났다. 11월 중순이 되면 대학 순응시험을 치르는데, 대부분 그 때쯤에 가장 추운 날씨가 되어 시험 치르는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 우사 한족에 만들어진 작은 방은 나무를 땔 수 있도록 되어있어 바로 옆에서나 위에서 소나무 잎이나 낙엽을 갈퀴로 긁어와 불을 넣고 밥도 하고 국도 끓인다. 방은 따듯한데 웃풍이 심하여 벽에서는 찬 공기와 방안의 따듯한 공기가 만나니 벽에 얼음이 하얗게 얼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먹을 것 제대로 잘 먹지 못하여서 인지 몰라도 아침밥을 먹고 “아이고 배야” 한마디 하고서는 조그마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첫째 아이를 낳는 것을 잘 보았기 때문에 또한 양어머니께서 나중에라도 아이를 낳거든 잘 배워 두라는 말씀에 잘 배워 두었었다. 배꼽의 탯줄은 잘 훑어 3cm 길이에서 묶되 자르기는 5~6cm 길이로 잘라 잘 훑어내고 소독을 하고 탈지면으로 자른 부위를 싸서 둥그렇게 배꼽에 붙여 반창고를 붙이라고 하여서 그대로 따라 했다. 따듯한 물을 퍼다 아이를 씻기고 입에는 가재 수건으로 잘 씻어 낸 다음 참기름을 한 수저 먹여 주었다. 그리고 어디서 들은 풍월인데 자기 아들도 인삼을 한 뿌리 사다 다려서 아이에게 먹였더니 그렇게 잔병도 없고 잘 큰다고 해서 엄지 손가락만한 인삼을 사다가 다려서 아이에게 먹여 주었다. 미역국은 약 20L 가 더 들어가는 가마솥에 가득 끓여 놓았는데, 고기 살 돈이 없어서 그냥 끓여서인지 맛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니 부뚜막 국솥 옆에 웬 고기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그 고기는 다름 아닌 꿩고기였다. 우리 집 개 쫑이 산에서 꿩을 잡아와 머리와 내장과 털이 있는 껍질까지는 다 먹고 살코기는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다 둔 것이다. 개도 진돗개도 아니고 다른 이름 있는 개도 아닌데 덩치만 좀 커다란 보통 누르스름한 똥개인데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개의 마음도 다스리시기에 맛있는 살코기만 먹지 않고 남겨서 솥단지 옆에 가져다 놓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 묻어있는 흙을 털어내고 잘 씻어 미역국에 넣고 잘 끓인 후 산모에게 떠서 주니 후루룩 후루룩 양푼으로 하나를 다 먹고 나도 양푼으로 한 그릇 퍼서 먹는데 내 생애에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미역국은 처음이요 마지막 인 것 같았다. 아기의 이름은 평안교회 목사님께서 현명한 사람이 되라고 하여 賢(어질현) 이라고 지어 주셨다. 물은 저 산 골짜기에서 호수로 연결하여 우사까지 소에게 물을 먹였던 것이 중간에 파손된 것은 다시 연결하여 넘쳐흘렀다. 아기의 귀저기에 똥은 “쫑” 하고 부르면 개가 와서 싹싹 핥아먹었고 조금만 씻어도 깨끗하게 되어 빨래하기에 너무 쉬웠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 나셨지만 우리 현이는 외양간에서 예수님보다 한 달 열흘 먼저 태어나 완전 겨울에 하얀 얼음벽 이글루에서 살았다. 1981년 1월 15일 나는 야간신학교를 졸업하고 주간으로 편입학하여 다녔다. 그 해는 어느 해보다 더욱 추웠던 겨울도 지나가고 따듯한 춘 삼월이 되었다. 나는 이침 일찍 학교로 가고, 오후가 되면 아내는 아기를 들쳐 업고 시장으로 나가 콩나물 장사를 했고, 큰아이는 몇 번 데리고 다니더니 이리저리 도로에도 걸어 다니니까 차도 위험하고 해서 집에 두고 가면 산 밑의 외딴집에서 우리 집 개와 산으로 놀러간다. 언덕이 있는 곳에서는 개가 언덕 쪽으로 가면서 아기가 언덕으로 떨어지지 않게 했고, 산에는 조그마한 흙을 파 낸 구덩이가 있는데 그곳은 아기와 쫑이 날마다 놀고 있는 놀이터이다. 내가 오후 늦게 집으로 와서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쫑” 하고 개를 부르면 저쪽 산속에서 헐레벌떡 달려와서 반가이 맞이한다. 그 산에 가 보면 아기는 울지도 않고 혼자서 흙을 파고 중얼거리면 놀다가 “아빠” 하고 달려온다. 어떤 때에는 차가 다니는 큰길로 나아가 찻길로 가려하면 사람들이 아기를 들어서 안전한 곳에 놓으려고 손으로 안으면 개는 만지지 못하게 하여 “응” 하며 사람을 물듯이 이빨을 내 보이며 응시한다고 들었고 길 한 가운데로 못 가게 가로막기도 하고 옷을 물고 끌어내기도 한다고,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영리한 개를 기르느냐고 수캐이기 때문에 종자 좀 받게 해 달라고 하여 장가를 보내 주었더니 몇 개월 후에 암캐에게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다며 암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하루는 집사람이 바로 집 밑에 있는 등대교회에서 기도원도 개원하면서 부흥강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은혜 받으러 간다고 저녁이면 갔다 오더니만, 강사는 모 감리교회의 유 아무게 목사인데, “불 받아라 불” 하고 손으로 던지는 것처럼 하였고, 자기가 그 불을 받았다며 좋아 하더니만, 그만 자기 정신이 아니었고, 귀신이 들어간 것이었다. 한 밤중에 갑자기 일어나더니만 옷을 벗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뛰어 나가 “당신 왜 그래 응” 하면서 잡고 방으로 들어가는데도 얼마나 힘이 센지 나도 힘이 세다고 하지만 감당할 수 없었다. 둘이서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내는 자기의 발목위에 성문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다리에서 피가 그칠 줄을 몰랐고 그래도 자꾸 밖으로 뛰쳐나가려고만 하니 몸부림은 날이 다 새어가도록 계속되었다. 귀신이라면 나도 예수 이름으로 제법 잘 쫓았던 사람인데 아무리 “이놈의 귀신아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나가라” 소리쳐 봤지만 날이 가도 더했다 덜 했다 정신은 온전치 못했고 더러는 칼을 들고 설치기도 하여 내가 도망도 다니기도 하였다. 그 때가 5월경이었는데 나는 금식도 하고 별의 별 방법을 다하여 기도를 해 봤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아 안양 창박골에 있는 우리 신학교 동지인 서태원 전도사님이 있는 안양기도원으로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서 전도사님은 귀신을 쫓는 사명을 주님께서 주신 분이라 여겼기 때문인데, 원래 서 전도사님은 서울 어느 변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고 당시에 연탄을 집집마다 배달 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귀신들려 미치게 되었고 얼굴도 천연두로 빡빡 얼근 데다가 키도 조그맣고 길거리에서 음식물을 주워 먹고 다니던 미치광이 이였었는데, 예수님을 믿고서 귀신이 떠나가고 깨끗이 고침을 받아 능력을 주셨던 것이다. 그가 기도를 하면 수 십 년 동안 정신지체와 온 몸이 뒤틀린 장애를 가진 청년을 기도 하는데, 뼈들이 서로 맞아 들어가면서 우두둑 소리를 내고 바로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하는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 전도사님이셨다. 나는 기도 중에 내가 잘못을 하여서 그런 줄 알고 회개를 하였는데, 그 때 돈이 어디서 들어와 40만원이 있어서 그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살 돈이었다. 소를 기르는 우사요 주변에는 풀이 너무 많아 송아지 한 마리 기르기엔 너무 좋은 환경이어서 소를 기를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여 그 돈을 안양기도원에 계시는 서 전도사님께 헌금을 하고 싶어서 가지고 갔다. 물론 아내가 다 완치될 때까지 그 기도원에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자고 하는 비용으로 헌금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 가지고 가서 헌금을 한 돈은 기도원을 빌려서 집회를 하는 알지도 못하는 강사 목사님이 챙기고 만 것이었다. 강사 목사님께 여차 여차히 말씀드리고 헌금한 돈을 돌려주라고 했지만 하나님께 헌금한 것이니 돌려 줄 수 없다고 하여 어쩔 수가 없었다. 기도원 내 아래쪽에 방이 죽 있었고 방 한 칸을 우리에게 주어서 숙소를 정하고 집회에 참석하였고, 방에 들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고 아기 엄마에게 맡기고 나는 집으로 향하여 큰 아이 권이를 양 어머니께 맡기고 이것저것 챙겨 기도원으로 오니 아내의 방문은 열쇠로 잠겨있고 아기는 다른 방에서 여러 성도들이 봐 주고 있었다. 내가 젖을 먹이기 위해 맡겨 놓았는데, 집 사람이 발작하여 아기를 유리창으로 던져 창문이 깨어지고 그 창문 뒤에는 약 2m 가 넘는 언덕 이었는데 모두가 돌들로 가득했고 유리병 깨어진 것들도 많았는데도 아기는 그렇게 상처를 입지 않고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너무 울어대니 어떻게 달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안양에 어떤 목사님께서 한의학을 전공하셨던 목사님이신데, 갑자기 안양기도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답니다. 그래서 불이 나게 기도원으로 달려와 보니 전도사 사모가 귀신들려 이렇게 아기를 창밖으로 던져버려 아기가 이렇게 울어댄다고 하니까 목사님께서 이리 달라고 하여 아기를 주었고 등을 만져 보시더니 등뼈가 불룩 튀어 나와 있더랍니다. 그래서 아기의 등뼈를 맞춰주어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바로 아기가 울음을 그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급하게 기도원으로 보내셨구나!” 하시며 “큰 일 날 뻔 했네요. 그대로 나 두었다면 꼽추가 되었을 텐데 다행이네요” 하시며 말씀 하셨답니다.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목사님을 만나 뵙지도 못하고 사례도 못하고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 같은 존재로만 기억할 뿐이다. 나를 환란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고 나의 시련과 연단은 연단이고 아기는 사람을 보내어 다시 고쳐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6개월 동안 본 정신이 들었다가 또 발작을 하였다가 그 때부터 나는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경말씀 마태복음 5장 4절을 생각하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겠지 맡겨버리고 살았다.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여 본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 집으로 들어와서 살라고 하셔서 다시금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81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개강식에 갔더니만 학생들이 조용했다.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남은 숫자는 100명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일부는 총신대 앞에 지금의 총신대역 태평백화점 자리인 옛 남성극장 모 권사님의 건물이었는데, 텔레비전으로 인하여 극장이 거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때라 극장을 패쇠하고 신학교로 문을 열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신 최 의원 박사님을 학장으로 나와 몇몇 학생들이 찾아가 진로를 이야기 하고서 일부는 서대문으로 일부는 홍은동으로 사분오열이 되어갔다. 일부 목사님들의 이익과 권리로 말미암아 서로가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갈라서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고, 숫자적으로 좀 큰 집단으로 가고도 싶었지만, 그냥 그 자리에 남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당대에 이름 있는 교수였던 신 사훈박사와 장 국원박사가 거기에 남아 학교를 사수하고 있었다. 당시에 신 사훈 박사님은 서울대 종교학교수로 30년 동안 교수를 하셨고, 정년퇴직하셔서, 히브리어 및 헬라어의 대가로 라틴어 불어 독어는 물론 22개 국어를 하신 한국에서는 미국 뚜루 신학교를 나오신 훌륭한 분이셨다. 장 국원 박사님도 독일에서 문학박사를 받으셨고, 많은 학문을 이수하신 총각 박사님이셨는데, 그 때 나이 45세에 첫 결혼식을 하셨다. 신 사훈 박사님의 훌륭하신 것 또 하나는 통일교의 비판 이라는 논문으로 거대한 종교집단으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늘 재판에 나가셨는데, 때로는 통일교를 비판하다가 남대문교회에서는 전기 불을 다 꺼버리고 집단 몽둥이로 구타하여 실신 거의 죽을 뻔 하셨고, 그의 논리는 학문적이요 사실적인 그리고 담대한 신앙의 믿음이었다. 그때 나이 칠순이셨는데도 오랜 신앙적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강의는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명의 초대교회의 사도바울과 같은 열정이었다. 오랜 후에 팔순에도 오래 서 있기 좀 힘이 들어서 대부분 앉아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의 옆에 작은 흑판에는 쉴 새 없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로 가득했다. 그리고 시력이 안경으로서는 좀 흐릿해서 인지 몰라도 커다란 돋보기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주먹으로도 한 줌 되는 두툼하고 조그마한 메모지 수첩에는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기록해 놓으셨다. 그의 노따뻬니 “NB(nota bene= 노타 베니) 중요한 정보 글 앞에 붙이는 용어” 는 유명하여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귀에 쟁쟁하다. 성균관대 옆에 있는 자기의 집 1층에 새싹교회를 담임하셨는데, 학교를 그 교회로 옮겨 1년 더 공부를 하고 학업을 마치고 집에서 쉬었다. 과천에 새로운 개발 바람이 불어 아파트를 세우고 청사를 짓고 머지않아 대공원도 이전하여 새롭게 만들 계획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어디든지 가오리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부름 받아 나선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가오리다. 노래는 잘 불렀는데, 어디든지 가 아닌 골라서 가오리다. 로 바뀌어서 서울 근교에 개척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안양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어느 전도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려고 사 놓았던 30평되는 커다란 천막을 내가 30만원의 거금을 주고 샀고, 과천 대공원 옆에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주택단지로 빈 터를 고려부동산에서 70평 계약을 하여 비싸게 주고 얻어 놓았다. 고려 부동산이라야 건물이 아니고 콘테이너 박스에서 하는 부동산이었는데 교회 다니는 초 신자라고 하면서 믿음이 있는듯하여 맡겨 놓았는데,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커다란 천막은 철골만 하여도 가시오의 길이가 10m 는 되었다. 사기당한 그 빈 터 자리에 가져다 놓았고, 며칠이 지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주님의 뜻과 섭리가 있어서 사기도 당한 것이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가지 않기 때문에 일이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꿈으로 보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하고 잠을 잤는데, 그날 밤 주님께서 꿈속에서 나타나 응답을 해 주셨다. “옛날 우리 시골집이 있고 집 위에 있는 우리 산에서 불이 났다. 나와 어느 이름 모르는 친구와 함께 불을 끄다가 저 아래의 저수지 밑에 들판에서 많은 사람들이 벼를 베고 있었는데, 저수지가 넘치면서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친구와 불을 끄다 말고 저 들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가서 피신을 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나는 앞에서 달려가고 그 친구는 뒤 따라 오면서 헐래 벌떡 숨 가쁜 소리로 ‘성령전 십장 오절을 보라’ 하면서 사라졌고 잠을 깨었다.” 나는 꿈을 꾸면 일어나서 잊어버리기 전에 노트에 그림까지 그려서 기록하여 보관하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하고 해석을 해 본다. 그런데 성령전이 무엇일가! 생각하다가 성경말씀은 말씀 같은데 성령전이라 그래 사도행전이다. 라고 지혜가 떠올랐다. 빨리 성경책을 펴서 사도행전 10장 5절을 읽어보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주님의 응답으로 고넬료처럼 사흘 만에 베드로를 청한 것처럼, “나도 사흘 안에 청하러 올 사람이 있겠구나!” 해석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집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이 권이 엄마! 사흘 안에 나를 초청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아이들 교육도 그렇고 해서 지방으로는 가지 않으려 애쓰고 서울 근교에서만 목회를 하려고 했는데, 주님의 응답을 받고는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하려는 마음도 다 사라지고 사기를 당한 것도 다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사흘을 기다리다가 오전 10시쯤 되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가기 싫은 타 지방 저 시골로 나를 보내십니까? 이제는 어디든 가오리이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고 기도가 끝나자 서머나 교회의 조 목사님께서 오셔서 “어이 손 전도사 잘 있는겨? 저 강원도 홍천군 서면 어유포리 시골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갈겨?” 충청도 사투리가 정답게 들려왔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네 목사님! 이미 응답 다 받고, 갈 준비를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라면 이번 주일날 당장 그 등대교회에 가서 첫 선을 보이고 허락받아 올껴? 거기서 떨어지면 할 수 없는겨 설교 잘하고 와 잉” 하셨다.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 도착하여 몇몇 집사님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교회 사택은 교회 뒤쪽으로 연결하여 현대식으로 잘 지어졌고 연탄보일러로 목욕탕까지 있었으니 시골에서는 아주 좋은 시설이었다. 더러는 시골 노인들은 그 검은 게 뭐냐고 연탄도 처음 본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는 종탑도 높이 세워졌고 제법 잘 지은 교회 건물 이었다. 그 교회를 지은 목사님은 박 영성목사님 이시고 서울에서도 제법 목회를 잘 하고 계셨다. 주일 오후에 오셔서 예배인도를 하셨고, 서울에서 다니시기가 너무 멀어 후임자를 찾는데 내가 주일 설교를 하였고, 합격하여 교인들이 너무 좋아 하셨다. 서울로 돌아와 짐을 챙겨 네 식구가 강원도를 향하여 목회지로 떠났다. 늙으신 어머님을 두고 떠나게 되어 영 마음에 걸렸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든지 어떠한 환경 속에서라도 아브라함처럼 고향도 친척도 아비집도 다 버리고 훌훌 떠나는 것, 주님의 가르침처럼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금생에서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9) 는 말씀처럼 복음을 위해서 강원도 시골로 떠나야만 했다. 성도들은 십 여 명이었고, 더러는 믿다가 중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유포리라는 동네는 최충선생의 후손으로 사당이 거기에 있었고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바로 조금 더 가면 팔봉산이 눈앞에 있고 마을에는 무당이 셋이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무당도 있어서 늘 푸닥거리 하는 소리가 끝일 날이 없었다. 바로 교회 옆에는 서울에서 이사를 온 나이는 많으나 신분이 낮은 무당이 한사람 살고 있었는데, 옛날에는 교회 집사까지 되었는데, 몸이 아파서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나와는 늘 대화를 나누며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아무리 전도를 하여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들은 대부분 집사님들의 자녀들로 교회로 돌아와 예배당이 그득 했다. 저 멀리 면 소재지에서도 오고 서울에서 홍천강유원지에 장사하러 오신 김 집사님 가정에서도 아들하고 따님이 집을 사서 와 가정이 더 늘어났다. 남편은 서울에서 운전을 하시고 작은 따님과 같이 있었고, 가끔 강가에 집사님께 심방을 가면, 민물 매운탕을 맛있게 끓여 주어서 늘 먹고 하였다. 팔봉산은 제법 유명한 관광지였는데, 팔봉산을 빙 둘러서 구비쳐 흐르는 홍천강은 정말 멋진 풍경이었다. 유일한 통로는 어유포리에서 팔봉리로 향하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예전에는 와야 줄을 걸어놓고 배로 다녔다고 한다. 홍천강을 말 그대로 클 홍(洪) 커다란 강이란 뜻으로 비가 많이 오면 약 넓이가 50m 이상 되는 큰 냇가가 온통 거센 물결을 이루고, 둑을 넘어 교회 앞 들판을 다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앞 논에까지 물고기가 많아 유희를 하는 포구와 같다고 해서 어유포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높은 산이 있어 나는 그 산 꼭대기에 올라가 마을을 향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곳이 복음화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그 산 뒤 북쪽에 있는 통곡리라는 마을을 향해 간절히 이곳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해 달라고 통곡을 하며 기도를 하고 소리를 쳐 본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교회에 시험이 찾아와 집사님들이 왜 아무게 집사님만 좋아하고 우리는 심방도 잘 안하고 관심이 없느냐는 둥 교회를 나오지 않기도 하고, 더러는 아무리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도 빚만 지고 하니 도회지로 떠나는 가정들이 몇 가정 되었다. 어느 날 어유포리에 진로소가 생겼다. 예쁜 아가씨 한분이 홍천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왔는데, 방을 꾸민다고 하여 대부분 구들방에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지만, 교회는 연탄으로 보일러를 놓았기 때문에 마을 이장님과 박 집사님께서 오셔서 도움을 청하여 보일러를 놓아주었다. 대부분 홍천읍 교회를 다니지만, 가끔 일부러 우리교회에 나오셔서 헌금을 해 주시니 한층 더 힘이 나고 용기가 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들이 많았고, 농사를 지어도 다른 특용작물도 못하고 하니 빚더미 속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헌금도 못낸 성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회도 전기세 전화요금 내면 내게 사례금도 없었고, 나는 헌금을 하려 해도 100원도 없어 못했고, 때로는 쌀도 없어 굶기라도 하면 아이들이 울다가 지쳐 잠이 들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다 방앗간을 하는 고 남규집사님 김 솔봉집사님께서 나도 몰래 쌀자루를 가져다 놓고 가곤 한다.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아이들이 감기 몸살로 아플 때 열은 펄펄 끓는데, 약을 사 줄 돈이 없어 기도만 하고 있을 때 “주여! 고쳐 주시옵소서! 주여! 열만 좀 내리게 해 주십시오” 옛날에는 그렇게도 믿음이 있어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만 하면 만사가 다 가능하고 용기 있었는데, 아이들이 병들어 아파하니 내 마음은 다윗왕의 마음처럼 차라리 내가 너 대신 죽었더라면 좋을 것을... 압살롬아, 압살롬아 통곡했던 것처럼 “차라리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좋을 것을...” 하며 가슴만 아파했을 뿐이다. 어느 날 강가에 김 집사님 가게에 가서 맛있게 매운탕을 먹고 있는데, 강에서 주낙으로 고기도 잡고 겨울에는 산에서 산토끼를 잡아서 팔아 먹고사는 이씨가 산토끼를 잡아가지고 한 마리에 2천원도 받고 3천원도 받고 팔았다. 토기를 어떻게 잡느냐고 물으니 옥매기를 놔서 잡는다는 것이었다. 옥매기는 올무를 말하는데, 미군들 전화선인 삐삐선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미군 전화선을 구하기가 어려워 올무를 만들기에는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하루는 장난삼아 철사로 올무를 만들어 뒷산에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았다. 아니 이게 웬일인지 산토끼가 하나 걸렸다. 오랜만에 산토끼 고기를 먹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하고 맛있게 먹었다. 지금은 불법으로 단속이 심했지만, 그 때만 하여도 보통 마을사람들은 토끼몰이를 하여 잡기도 하고, 하나의 놀이로 여겼기 때문에 잡아먹기도 하였는데, 점차 단속이 심하여 져서 나중에는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여름이 되어 어느 시골교회의 목사님 사모님께서 벌을 기르시는데 꿀을 따러 오셔서 나에게 생활이 어렵겠다며 벌을 한통 주셨다. 벌을 한번 길러본 적이 있어서 책으로 공부를 해 두었기에 양봉을 기를 수가 있었다. 식당을 하던 이 집사님이 춘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벌을 세통 내게 주고 가셨다. 벌들이 잘 자라 주었고 열통이나 되었고 꿀도 제법 많이 따서 성도들도 나누어 주고 팔기도 하고 해서 제법 생활이 되어 갔다. 1983년 4월6일 세 번째 아기를 낳았는데, 딸이었다. 진료소 소장님이 받았는데,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고, 몇 개월이 되었는데, 집사람은 친정집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고민을 하고 신경을 쓰다가 점점 정신이 이상해 져 갔다. 어린 아기를 팔로 안고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하고, 주일날 성도들이 헌금을 하지 않으면 헌금 바구니를 들고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라고 왜 헌금을 안 하느냐고 다가가서 여간 무안하게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제 정신이 돌아오면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하다가도 정신이 혼미해질 때에는 동네 길에 나가서 아이를 안고 우두커니 한 시간 동안 서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와 싸울 때에는 손에 잡히는 데로 던지고 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아기를 낳고 너무 못 먹어 굶어서 영양실조로 그런다고 소문이 났고, 별의 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나만은 벌써 3년 전 둘째 아이를 낳고도 귀신들려 정신이 이상해져서 미친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금 그 증세가 돌아 왔구나! 생각을 하고 “이놈의 귀신아 예수이름으로 나가라.” 아무리 기도를 하고 성도들과 모여 통성기도를 하여도 귀신은 떠나가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금식기도를 하여도 안수기도를 하여도 병은 더욱 더 심해져 갔고,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벌써 6개월이 지나 갔다. 집사님들께 교회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하여도 박집사님과 그 밖의 집사님들은 이렇게 아파서 교회를 떠나가면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면서 그래도 고쳐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여 망설이고 기다리던 어느 날 양평에 사시는 용두리교회 장로님께서 오셨다. 나이가 일흔이 되셨는데, 용두리교회에 다니시는 권사님 한분이 우리 교회 고남규집사님의 모친이셨다. 아들집에 오셨다가 우리교회 사모님이 저렇게 정신이상이 되어 아프다고 하니 그 권사님께서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신익균 장로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신 장로님께서 내게 말씀을 하신다. 신 장로님께서는 집사람을 보시더니 “이런 병은 일주일이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모님을 고쳐 주라고 나를 이리 보내셨군요.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6km 정도 떨어진 면 소재지인 반곡리에서 전화가 왔는데, 한 중풍병으로 쓰러진 사람이 있어서 갔더니만 너무 늙어서 침을 놓을 수가 없어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권사님 생각이 나서 이곳에 사모님이 많이 아프다고 하여 이리 왔습니다.” 하신다. 나는 정말로 침이나 약으로 고칠 수 있느냐?고 물으시니 장로님께서는 긴 한숨을 내 쉬시면서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다. 장로님께서는 일찍이 결혼을 하시고 군대를 가셨는데, 집에서는 아내가 첫 아기를 낳은 후 정신 이상이 생겼었다. 휴가를 나와서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울고 다니면서 고쳐 보려 했으나 고치지 못하고 군대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대를 하고 둘째를 낳고 또 정신이상이 되었고, 아이들 다섯을 낳았는데, 모두다 다섯 번이나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한다. 그래서 침도 배우고 약도 미국에서 의사로 있는 형님께서 보내와 먹이고 하여 정신병을 고쳤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러한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면서 그날 밤 내게 이야기를 몇 시간에 걸쳐 다 해 주셨다. 머리 정수리에 사혈 침을 놓고 약을 먹이니 아내는 곤히 잠을 잘 잤고 다음날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깨끗해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흔히 우리 기독교에서는 정신이상이 오면 모두가 마귀 곧 귀신이 들려서 미치게 한다고 알고 있었고, 기도와 금식으로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쫓을 줄만 알았지 침이나 약으로 고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신 이상이란 병을 다시금 연구하게 되었다. 성경적으로는 마9장 귀신들려 미친 자를 보면 힘이 세고 제 몸을 상하게도 하는 정신병이 있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써서 뇌 손상으로 말미암아 정신병이 올 수도 있다. 나 중학교 다닐 때 완도읍에 있는 친구의 누나도 사랑을 하다가 남자가 배신을 하자 미쳐 버렸고, 우리 마을에 아무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를 하여 돈에 미쳐서 돌을 주워서도 돈 돈 하고 무엇이든 손에 들기만 하면 돈 돈 하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써서 정신병이 생기게 되면 더러는 귀신도 함께 역사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더러는 아기를 낳고서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가끔 정신이 이상해 질 때도 있는데, 내가 신학교 다닐 때 진안에 있는 분도 역시 그렇게 아기를 낳으면서도 정신분열로 그 가운데 귀신이 역사 할 때도 있었고, 우리 집사람도 그렇게 아기 낳고 아플 수도 있고 그 장로님 부인께서도 그러한 병이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다쳐서 뇌 손상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이상해 질 수 있고 때론 마귀도 역사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귀의 역사 즉 귀신의 역사는 약으로는 절대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유가 있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되고, 신경을 많이 써서 뇌 세포가 상한 사람이나 다쳐서 상한 사람은 다는 아니고 거의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본다. 요즘은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분열증은 마음의 심리 치료도 하고 약물로도 고칠 수 있지만, 웃음요법 음악요법 스트레스해소요법 취미생활요법 즉 스포츠댄스를 한다든지 꽃이나 분재 난 등을 가꾸기와 때로는 물고기를 기른다든가 곤충도 기르고 애완동물을 기르는 요법도 성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여 온갖 나쁜 생각들과 시름을 잊어버리고 한가지의 집착성에 빠지지 않고 일에 몰두를 하여 정신이 건강해 지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약 1개월의 여유를 가지고 어디든지 가야 하는데, 마땅히 가야 할 곳도 없었다. 서울에 계신 양어머니께서는 친정 조카인 사기꾼 같은 무성이 형이 잘 모시겠다고 하시며 집을 팔아 대구로 내려 가셔서 집을 하나 사셨는데 그나마 그 집도 팔아 서울로 올라와서 집도 자기 앞으로 해 놓고 어머니를 구박하니 양어머니한테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점에 있는 임 희원 전도사가 얼마 전에 이곳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가셨는데, 예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는데 또 한 번 쓰러져서 애들하고 혼자서 교회를 하고 있어서 그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서 보니 전도사님은 몸이 불편한데다 우리마누라까지 아직 온전하지를 않아 아이들이 셋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금 내 고향 완도에 사시는 나의 생모님을 향해 가야만 했다. 방앗간을 사서 내가 방을 만들었던 튼튼한 흙집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데, 일흔 다섯 되신 양어머니께서는 완도에 사는 내게로 내려와 같이 살자고 하시며 이삿짐을 싣고 오셨다. 늘 사기나 쳐 먹고 사는 무성이 형이 밉기도 하지만, 재산을 송두리째 큰 조카며느리가 빼앗아 먹고 작은 친정조카한테 빼앗기고 오신 양어머니도 그렇게 반갑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결혼도 시켜주고 학교도 보내주신 양어머니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같이 살기로 하고, 불목리 산중에 집을 하나 샀다. 옛날 같이 지냈던 나와 동갑네기 친구인 종신이의 형 종선이가 제법 잘 지었는데 마누라를 하나 얻더니만 시골이 싫다고 하여 집을 팔고 서울인지 어딘지 도회지로 떠난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에게는 산골에 논 세마지기가 있었지만, 집을 살만한 돈이 없어서 처가댁에 이 길순 처형과 서 태봉 손위동서에게서 일백 오십 만원을 빌려 싸게 집을 사게 되었다. 집사람은 완도읍 미역공장으로 미역을 찢으러 일을 하러 갔는데, 생전 처음으로 미역을 찢는데도 수 십 년 경험을 가진 숙련된 사람들보다 더 억척같이 많이 찢었다. 미역을 찢는다는 것은 당시에 일본으로 미역을 수출 하는데, 약간 삶아서 파랗게 된 미역을 아주 짠 염장소금에 절여서 줄기는 줄기대로 연한 잎 부분은 잎 부분대로 분리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얼마나 욕심이 많았으면 점심도 안 쌓아가서 먹지도 않았고 사먹지도 않고 그 시간에 더 많이 찢어서 제일 많이 찢는 사람에게는 특별 보너스가 주어져 몇 천원 더 준다고 하니 그것을 받기 위해서 점심시간을 아예 먹지 않고 일을 한 것이다. 손톱이 다 달아서 없으니 손톱 끝에서는 피가 나도록 차마 내가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 했었다. 그 일도 일 년 내내 있는 것이 아니고, 3~4월이면 끝이 나기 때문에 끝나기 전에 벌어야 한다고 죽을지 살지 모르게 열심히 일을 하여 몇 십 만원 제법 큰돈을 모으게 되었다. 일이 끝나자 우리 마을에서는 톳이라고 하는 해초를 가공하여 말리는데, 하루 5 천 원씩을 준다. 어떻게 알고 그곳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는데, 비가 오면 톳을 말릴 수 없으므로 일을 하지 않는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연구를 하다가 바닷가에 수없이 많은 바다 다슬기를 주워 팔기로 한 것이다. 사투리로는 그 바다 다슬기를 갈고동 이라고 부른다. 그 갈고동을 주워서 삶아 뒷부분을 깨뜨리든지 집게로 잘라서 앞쪽을 입으로 쪽쪽 빨면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가 쏙 입속으로 들어온다. 길거리에 가다가 도시에서는 번데기를 사 먹듯이 갈고동도 사서 젊은 연인들끼리도 걸으며 빨아먹기도 한다. 그래서 비오는 날에도 갈고동으로 5천원을 벌어 저축을 한다. 한번 은행 통장에 들어간 돈은 다시금 나올 줄을 모른다. 하루는 양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불을 피워 물을 끓이다가 나뭇잎들을 쌓아둔 곳으로 연결된 부분을 떼어서 부엌으로 쓸어 넣어야 하는데, 그냥 나오셔서 불이 나무 쌓아둔 벼늘로 옮겨 붙어 불이 났다. 개를 한 마리 길렀는데 개집이 부엌에 있어서 개집도 같이 타고 강아지도 타 죽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부엌 위에는 두꺼운 합판으로 되었는데도 그을리기만 했지 타지를 않았었다. 마치 샘이 부엌 문 바로 앞에 있었기에 빨리 물을 뿌려 껐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으신 양어머니께서는 놀라셔서 얼마 있지 않아 “나 시골에서 몬살겠다. 고마 나 죽으나 사나 서울로 갈란데이” 하시고서 일 년도 채 안되어서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래도 이곳에 계신 생모님하고 언니 동생하시며 잘 계셨는데, 그러나 이곳에서 큰일을 하나 하시고 가신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집 아래쪽에 강 학진이라는 형이 살고 있었고, 그 형제들이 여럿 있는데 그 형이 신장이 나빠서 많이 부었었고, 병원에서도 그때만 해도 고칠 수 없었을 때였으니까 물론 돈도 없었으니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양어머니께서 혀를 끌끌 차시며, 기도를 해 주었다고 하신다. 너무 많이 복수가 차 숨을 헐떡이고 있는 형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배를 어루만지며, “하느님네 하느님네 지발 이 사람 쪼매 고쳐 주이소 아직 나이도 젊고 한데 너무 불쌍타 아입니꺼예 제발 고쳐 주이소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합니더” 하고 기도를 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하루 만에 푹 가라앉고 온 몸이 부은 기가 다 빠져서 어머니께 와서 고쳐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더랍니다. 그 형제들 중 몇이 신장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진이 형은 완치되어 잘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양 어머니를 통하여 치료해 주시고자 보내셨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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