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한국개신교 주요교단

도심안 2012. 12. 30. 17:16

한국개신교 주요 교단

1. 고신(대한 예수교 장로회)- 관건은 신사참배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H.N.Alen 의사가 입국하여 의료선교로 복음전도의 길을 열고 1885.4. 5 H.G Underwood 선교사의 입국으로 장로교 선교는 활발히 시작되었다. 1893. 1.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되고 1901. 5. 15 평양 장로회 신학교 개교, 1907. 9. 17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어 장로교 교회 확장은 잘 되었으나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1938. 9.10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 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가 문을 닫고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들이 순교하고 한상동, 주남선 목사, 손명복, 조수옥전도사등은 평양형무소에서, 손양원 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이들은 한국교회 재건의 주역이 되었고,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46. 6. 23 진해에서 하기신학강좌를 개최하고 9. 20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8. 4. 제 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문제를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노회가 천서를 줄 수 없다] 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이때부터 총회 내엔 출옥성도들이 중심된 고려신학교를 거세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고 장로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1952년 고신은 신사참배의 문제를 걸고 독립하였다.

● 예장고신- 고신대학교

2. 예장과 기장의 분열 - 관건은 신학적 노선

김재준목사와 박형룡목사의 신학적인 성향 차이에 따른 분열이다. 김재준목사나 박형룡목사는 같은 프리스턴신학교 출신이신데 김재준 목사는 자유주의화가 된 후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박형룡 목사는 근본주의신학을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서로의 입장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형룡목사파는 김재준목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김재준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단이 만들어 졌는데 1954년 6월10일 제39회 총회를 한국신학대학에서 열고서는 총회 명칭을 기독교 장로회로 한 것이다. 바로 한국 신학대학교에서 만들어진 것이 기장이라는 교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과 기장은 나뉘게 되었다. 즉 예수교 장로회는 보수적인 입장이었고 기독교 장로회는 진보적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신학적 노선으로 인해 결국 장로교는 예장과 기장으로 분열되었다.

● 기장- 한신대학교

3.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 - 관건은 자유주의 노선인 WCC의 가입여부

기장과 예장이 갈라진 후 6년 만에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됐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은 WCC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 문제로 다시 한 번 분열을 경험하게 되는데, 통합은 WCC 가입을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합동은 WCC 가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은 또 한번의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통합은 하나의 교단으로 이어졌는데 합동은 또 여러 군소 교단으로 분열을 하게 되어서 여러 가지의 군소 교단이 많다. 통합의 특징 중 하나가 에큐메니컬이라는 종교통합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 통합은 현재 이른바 "가장 잘 나가는 교단"이다. 한국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새문안교회, 연동교회(이성희 목사) 등이 통합이며, 교세 성장으로 주목을 받는 명성교회(김삼환 목사), 소망교회(곽선희 목사), 동안교회(김동호 목사), 주님의 교회, 온누리 교회(하용조 목사)가 통합이다. 독특한 목회로 사회적 주목을 받는 김진홍 목사(두레공동체), 무료급식으로 유명해진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역시 통합이다.

● 예장통합- 장로회신학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 대전신학대학교, 영남신학대학교,

부산장로회신학교, 한일장신대학교, 호남신학대학교

 합동이란 이름은 한 때 고신과 합동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이른바 합동측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는 측이 만든 교단이다. 합동의 신학적 입장은 고신과 비슷하며 현재 통합측과 활발한 재연합 논의가 벌어지고 있으나 실현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장로로 있어 유명한 충현교회(김창인 목사)와 사랑의 교회(오정현 목사)가 대표적 교회이다.

● 예장합동- 총신대학교

4. 예장 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은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회로 출범해 1972년 현 교단명으로 개칭하였다. 198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등과 한국장로교협의회를 창립하고, 1985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연합회 회원교단이 되었다.

평양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순수한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교단과는 신앙적 뿌리가 같다. 소재지는 경기도 안양시에 있으며 설립목적은 평양신학의 전통에 근거를 둔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 전파이고 주요활동은 국내 복음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이다.

● 예장대신- 안양대학교

5. 기독교 대한 성결교

4중복음, 즉 중생·성결·신유·재림을 주요 명제로 삼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영혼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던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정빈 두 사람이 1907년 미국 감리교 출신인 동양선교회 선교사 C.E.카우만 부부와 E.A.킬보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 염곡(현재의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고, 1921년에는 '기독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활천(活泉)》을 발간하였다. 그 후 유지재단 설립, 총회 조직 등 교세확장에 힘써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구세군과 더불어 다른 교단보다도 심하게 탄압받아 강제해산되었으며, 많은 교역자와 신도가 순교하거나 추방당하고 또는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에 재건되어 1949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나 다시 6·25전쟁으로 많은 성직자가 납북되는 등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51년 미국에 본부를 둔 동양선교회 주한선교부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1957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기념사업을 펼쳤다. 1961년 연합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의 탈퇴문제로 일시 교단이 분열되었으나 1965년에 다시 합동을 이룩하고 교세확장에 힘썼다.

● 서울 신학대학교

6. 예수교 대한 성결교

196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때 국제복음주의협회(NAE)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의 단체에서 탈퇴한 인사들이 같은해 5월 30일 서대문구 소재 독립문교회당에서 보수 총회를 결성하였다. 1962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교파의 명칭을 정하고, 독립적인 신학교 운영을 결의하였는데 그 학교가 현재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하는 성결대학교로 발전하였다. 1972년 내부적인 신학노선상의 갈등으로 예수교대한성결교회 혁신측이 분리를 선언하였고, 1973년 6월 혁신 총회를 구성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혁신 총회로 분열되었다. 1976년 3월에는 전영식을 초대 원장으로 한 한국보수신학원(현재 성결교신학대학원)을 설립하였다. 1988년 12월 제67회 총회 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총회장:강용조)와 혁신 총회(총회장:손택구)가 분열 15년 만에 조건 없이 재결합을 하였다. 1995년 10월에는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57개국의 10만여 명이 참가한 ‘95 AWF 대회 및 성결인의 세계대회’를 개최하였다.

● 성결대학교

7.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교리는 신약성서적 교회를 표방하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행습의 표준으로 신구약성서를 유일한 경전으로 삼는다. 교회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이며 의식은 상징적일 뿐 구원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내세운다.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M.펜윅이 토론토대학교 기독청년회의 후원으로 극동선교에 뜻을 품고 내한하여 포교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펜윅은 서울·황해도 솔내[松川] ·함경도 원산(元山) 등지를 전전하며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일단 귀국하여 침례교로 전향한 후 1896년 다시 내한하였다.

원산에 본부를 두고 선교에 힘쓰던 중 1901년 재정난으로 한국에서 철수하는 엘라딩 기념 선교회의 충남 공주 ·강경 지역의 선교기반을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 순회선교회와 병합하고 조직을 강화하였다. 1905년 공주에 성서학원을 설립, 목회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신명균에게 안수하여 원장에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침례교 첫 목사의 탄생이었다.

1906년 강경에서 첫 회의를 열어 명칭을 '대한기독교회'라 하고, 초대 감독에 펜윅을 추대하였다. 원산에 본부를 두고 한국 전역에 걸쳐 선교사업을 벌이는 한편,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교세를 넓혔다. 1921년 일제의 강요로 명칭을 '동아(東亞)기독교회'로 개칭하였고, 1936년 펜윅이 사망한 후로는 일제의 교회탄압이 심하여 많은 순교자를 냈다.

광복 후인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되었으며 1950년 제40회 총회때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 아버나티 부부가 내한하여 이들과 손잡으면서 선교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59년에는 그 동안 분열 상태이던 대한기독교침례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가 다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이 설립된 후,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되었다. 1951년 부산 침례병원 개설, 1954년 대전침례신학대학 설립(현 침례신학대학교), 1955년 《침례회보》 발행, 1979년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점차적으로 교세를 확장해갔다.

●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수도침례신학교

8.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보통 순복음교회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인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성령충만·신유·재림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가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과 함께 정동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그 후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성산 ·배부근이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던 중, 1945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출국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목사 등이 각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으나 6 ·25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오순절 운동이 직접적으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교회와 연결된 것은 미국 '하나님 성회' 소속 선교사 A.B.체스넛이 내한하여 박성순 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을 창립하고 명칭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고 한 때부터이다. 같은 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힘쓰다가 1957년 신학교 맹휴사건으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Full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출처 : 찬하 아빠의 이야기
글쓴이 : 찬하아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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