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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한국을 빚낸 위인 중 10명을 뽑아다 연표로 알려주세요.

도심안 2012. 2. 18. 21:00
  • 한국을 빚낸 위인 중 10명을 뽑아다 연표로 알려주세요.
  • 단군 ?~?우리 민족의 시조, 고조선의 첫 임금. 천제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 기원전 2333년 아사달(지금의 평양?)에 서울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세웠다. 단군에 관한 '삼국 유사'의 기록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황제인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원하므로, 환인은 천부인(하늘 나라 왕의 표지)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에 내려왔는데,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웅이 360여 가지 일을 맡아 다스릴 때 곰과 범 한마리가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 환웅은 쑥 한 줌과 마늘 20쪽씩 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먹으며 굴 속에 있던 중 범은 참지 못하고 도중에 뛰쳐나갔으나, 곰은 잘 참아 내어 37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다. 이 웅녀가 아기 갖기를 원하자, 환웅이 잠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함으로써 단군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단군은 인간으로서 처음 왕이 되어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고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동명왕 전58~전19(~동명왕 19)고구려의 시조(재위 전37~전19). 성은 고, 이름은 주몽.추모.상해.도모. 동부여왕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즉위하였는데, 어느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다. 유화가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자기를 꾀어 내었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쫓겨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가두었다. 그 유화가 햇볕을 받고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 사내아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씩씩하여 7세가 되자 활도 잘 쏘았다. 그러자,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신하들은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은 유화 부인의 말에 좋아서 졸본부여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곧 고구려이다. 기원전 36년에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은 다음, 기원전 34년에 성곽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이어서 해인국을 정벌하고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온조왕 ?~28(?~온조왕 46)백제의 시조(재위 전 18~28). 고구려 시조 동명 성왕의 세째 아들. 동명 성왕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큰왕비의 아들)가 내려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려 하였으나, 도읍 문제로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충청 남도 아산군 인주?)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충청 남도 천원군 입장?)에 도읍을 정하고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기원전 5년 남한산으로 도읍을 옮기고, 9년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세웠다. 박 혁거세 전69~4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 전설에 의하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의 소벌공이 어느 날 숲속에서 말의 울음 소리를 듣고 다가갔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알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아이가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빼어나고 총명하여, 의논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17세 때 왕비를 맞고, 왕비와 함께 전국을 돌면서 농사.양잠을 장려했다. 국호를 서라벌, 서울을 금성이라 정하고 궁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사람들은 박과 같이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박(박)이라는 성을 붙였고, 박이 또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에서 혁거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광개토 대왕 375~413(소수림왕 5~장수왕 1)고구려 제 19대 왕(재위 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이름은 담덕. 12세 때인 386년 태자로 책봉되고 아버지가 일찍 죽자 17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2년에는 백제 북쪽의 석현(지금의 재령 부근) 등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396년에는 친히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무너뜨리고 왕의 동생과 그의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왔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 등 두성 700여리의 땅을 갖게 되었다. 405~406년에 모용의 두 번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동성. 목저성에서 모두 물리쳤다. 410년 (광개토 대왕 20)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랴오허강 동쪽으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 하였다. 작은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그는, 아깝게도 39세로 죽었다. 왕이 된 후 하루도 궁궐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전쟁터를 달려 배달 민족의 영웅으로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의 능은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봉천 지안현 퉁커우에 세운 광개토 대왕의 능비에 그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묘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다. 이사부 ?~?신라의 장군. 성은 김씨. 신라 17대 내물왕의 4대손. 512년 아슬라주(지금의 강릉)의 우두머리로서, 우산국(지금의 울릉도)를 공격할 때 나무로 만든 사자로 적을 위협하여 항복받았었다고 한다. 545년 (진흥왕 6)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두 나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영토를 넓히는 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이 박 이종으로 되어 있다. 백결 선생 ?~?신라 자비왕 때 거문고의 명인. 경주 낭산 기슭에 살았다. 가난하여 누더기옷을 입었으므로 세상에서 '현순 백결'의 문자를 빌어 백결 선생이라고 하였다.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세상의 근심을 잊곤 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이웃집에서 모두 떡방아 소리가 들리는데, 양식조차 없는 것을 아내가 한탄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 곡조가 후세에 전해져 '방아타령(대악)'이라고 일컬어졌다. 의자왕 ?~660(?~의자왕 20)백제의 제 31대 마지막 왕(재위 641~660). 의자는 왕의 이름이며, 시호가 없다.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무왕 3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효성과 우애가 깊어 해동 증자로 불리었다. 왕위에 오르자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 성을 빼앗고, 윤 충을 시켜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함으로써 성주품석 등을 죽게 하였다. 그 뒤 당항성.요차성을 공격하고 국위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빠져 성 충.흥수 같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다. 계백의 황산벌 싸움을 마지막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소정방에게 끌려가 당나라에서 병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계백 ?~660(?~의자왕 20)백제 말기의 장군. 일찌기 벼슬길에 나가 달솔에 이르렀다. 660년 백제의 끝왕인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자, 기회를 노리던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에 쳐들어왔다. 이 때 그는 백제를 구하기 위하여 5천 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벌(지금의 충청 남도 연산 들)에서 나.당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싸움터로 떠나기에 앞서, 이미 백제가 망할 것을 알고, '노예가 되는 것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말하며, 아내와 자식들을 손수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계백의 결사대는 김 유신의 군사 5만 명과 싸워 신라의 공격을 네 차례나 막아 냈다. 그리하여,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신라 장군 품일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 하여금 나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기특히 여겨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다시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느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 군중으로 돌려 보냈다. 나이 어린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그는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라 위한 그의 충성과 용맹은 후세인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다. 관창 645~660(선덕 여왕 14~무열왕 17)신라 무열왕 때의 화랑. 신라 좌장군 품일의 아들. 어려서 화랑이 되어 수련을 쌓아 15세 때에 이미 말타기.활쏘기에 능했다. 660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 황산벌(지금의 충청 남도 논산군 연산)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뛰어난 전략으로 대항해 왔다. 신라군은 용기를 잃고 여러 장군이 모여 걱정만 하자 관창이 나서서 싸우기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장군들은 그가 나이가 너무 어려 들어 주지 않았지만 자기의 굳은 결심을 여러 번 주장하여 허락을 받고 적진에 뛰어 들었다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용맹과 나이 어림을 생각하여 살려 보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 못하고 살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교훈을 생각하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다시 잡혔다. 계백은 그의 용맹과 애국심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목을 베어 그의 말 안장에 얹어 돌려 보냈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크게 감동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이긴 신라는 전사한 관창에 급찬의 관위를 내리고, 예의를 갖추어 장사지내주었다. 김유신 595~673(진평왕 17~문무왕 13)신라 시대의 장군. 김 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629년 (진평왕 51)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참가했을 때,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더 높여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644년 상장군이 되어서 백제에 빼앗겼던 일곱 성을 되찾았으며, 돌아올 때 백제군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 크게 무찔렀다. 647년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진덕 여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 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이 되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인 금성에 남고, 김인문과 김흠순 등의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 대왕의 칭호를 올리었다. 문무왕 ?~681(?~문무왕 21)신라의 제 30대 왕(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 무열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 왕후 김씨. 풍채가 좋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650년 (진덕 여왕 4) 왕명을 받고 당나라에 가서 대부경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병부령이 되었다가 6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과 더불어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1년 무열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다. 662년에 나.당 연합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실패하였으나, 668년에 다시 고구려를 쳐서 함락 시켰다. 그런데, 당나라가 고구려.백제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김 유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몰아내게 하여 677년 대동강.원산만에 이르는 그 이남 지역을 완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의복.당악.역술을 본땄다. 676년(문무왕 16)의상을 시켜 경북 영주에 부석사를 짓게 하였다. 죽을 때 유언을 하여, 경상 북도 월성군 앞바다에 수중묘를 만들게 함으로써 동해 대왕암에 묻혔다. 원효대사 ?~?신라의 중. 설총의 아버지. 불교의 통합에 힘썼다. 혜초 704~787신라의 중. 723년(성덕왕 22) 불교가 일어난 인도를 돌아보려는 큰 꿈을 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의 항구 도시 광저우로 갔다. 거기서 인도의 중 금강지의 제자가 되어, 불법 공부와 함께 인도에 대한 공부도 하였다. 그 후, 인도차이나를 거쳐 인도 동해안에 도착하였으며, 부다가야를 비롯한 불교의 유적을 찾아 순례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가 쓴 '왕오천축국전'의 ' 오천축국'이란 중천축.동천축.서천축.남천축.북천축을 말하며, 오늘날의 인도 대륙의 중부.동부.서부.남부.북 부에 해당되는 지역이므로, 인도 대륙을 두루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북쪽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의 안서 도호부가 있는 쿠차를 거쳐, 733년 당안에 도착 하였다. 그후 그 곳의 천복사에서, 그 곳에 와 있던 금강지와 함께 밀교(불교의 한 교파)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금강지의 죽음으로 이 일은 중단되었으나, 금 강지의 가르침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오대산 건원 보리사에 들어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의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 스의 학자 펠리오가 중국 간쑤성 둔황의 석굴에서 발견함으로써 1200년 만에 햇빛을 본 귀중한 책이다. 장보고 ?~846(?~문성왕 8)신라시대의 장군. 일명 궁복.궁파. 일찌기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생활에 분개하여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 매매를 뿌리뽑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 명의 군사로 바닷길의 요충지인 청해(지금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군사를 훈련하고, 해적을 소탕하였다. 837(화강왕 2)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우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 뒤 감의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시기하는 신하들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죽음을 당했다. 대조영 ?~719(?~천통21)발해의 시조. 왕호 고왕(재위 699~719). 668년(고구려 보장왕 27)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 유민으로 라오허강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당나라의 억압에 대항하여 천문령에서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말갈족을 합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았...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sinogenzi(sino*****)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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