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남긴 선진들(목사/장로) |
[목사]교회와 민족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된 小竹 강신명 목사 (1) | |
[[제1208호] 2009년 12월 5일] | |
신앙의 터전, 아버지!
강신명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만큼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에서 많이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한 인물이 살다간 자취를 엮어서 역사를 만들고 인물을 바로 세우는 작업은 후대의 몫이다. 기독교 역사의 큰 지도자들의 공과를 구분하여 공을 세워주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3백만 성도운동만큼 중요하다. 한 인물의 삶과 신앙의 자취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예수 믿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신명 목사님은 선천북교회를 목회하시다가 월남하시어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영락교회를 세우시고 동사목사로 섬기다가 선천교회 교인들을 모두 한 목사님께 이양하시고 홀로 새문안교회로 부임하시어 24년을 목회하신 위대한 목회자이다. 그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공을 세우셨는데 특히 서울장신대학교 교장과 이사장을 24년간이나 역임하시면서 학교법인을 만드시고 가진 부동산과 재산을 모두 학교에 헌납하시는 헌신의 모범을 보이셨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두신 강신명 목사님의 면모를 살펴보는 한국장로신문의 기획 시리즈에 박수를 보내며 기대가 크다. /문성모 목사 그의 아버지 강병주 목사 강신명은 태어나면서부터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양육을 받았다. 처음부터 강신명에게는 영적인 일과 육적인 부분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교회의 일과 민족의 일도 그러했다. 그러나 순서는 있었다. 영적이고 내적인 것이 언제나 먼저였다. 육적인 일과 민족을 위한 일은 복음의 일을 할 때 자동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결과였다. 곧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구조요 복음주의가 갖고 있는 원리였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신학은 아버지 강병주로부터 나왔다. 강병주는 진주(晉州) 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인 강기원(姜祺元)과 이성곡(李星谷)의 장남으로 경북 영주군 평은면 천본리의 내매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심한 정신적 방황과 세상에 대한 반항을 거듭했었다. 강병주가 15살 되던 해, 목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거친 기질을 잠재우려 경주 최씨 가문의 최영주와 부부의 연을 맺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을 살아도 자녀를 얻지 못하자 강병주는 그것을 핑계로 소실을 얻겠다며 고집했다. 부친이 반대를 하자 1907년, 세상을 등지겠다며 해인사로 향했다. 그러나 승려가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도중에 일단의 의병들을 만남으로 일시에 꺾이고 말았다. 당시 경상도 일대에는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적지 않은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07년 7월에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발단으로 영주, 순흥, 풍기 등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의병들이 활동하였다. 그해 7월과 8월에 청풍과 단양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풍기에 나타났다가 영주로 이동했고 8월에는 영주 군내에 의병 300명이 분파소와 우편국을 습격하는 등 그 이름을 크게 알렸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1907년에 영주의 중심지였던 순흥부내의 관아를 비롯하여 민가 180여 호를 전소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맞선 의병들의 의분은 극에 달해 영주 일대에서 가장 크게 활동을 하였던 이강년 부대와 신돌석 부대는 1907년 11월 11일에 영주의 순흥읍을 습격하여 읍 전체를 전소시키기도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강병주는 주막의 담장을 뛰어 넘으면서 예수를 믿는 것을 담보로 목숨을 살려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미 그의 고향, 진주 강씨의 집성촌 내매에는 강재원이 중심이 되어 세웠던 예배처소가 있어 하나님과 기독교회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던 터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강병주의 모습은 단호했다. 그는 강재원과 함께 예배처소를 교회가 되도록 했고 마을 전체를 복음화시켰다. 그리고 장로가 되고 동네 동장이 되어 고향 천본리를 개조시켰다. 마을을 기독교 이상촌으로 만들기 위해 선구자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친 강기원까지도 자신의 아들이 바뀐 것에 감탄하여 예수를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러한 점들이 일본을 긴장시켰다. 3·1운동 당시 내매마을 사람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지도자인 강병주가 신학교를 다니느라 평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만세운동 혐의자로 분류해 대구형무소에 8개월 동안 가두었다. 강병주는 강재원과 함께 인근의 영주와 풍기까지 전도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내매의 진주 강씨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영주읍교회(지금의 영주제일교회), 풍기읍교회(지금의 성내교회) 등이 설립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이들이 하였다. 영주의 주변에 있던 내매교회가 이들로 말미암아 영주의 모교회가 된 것이다. 강병주는 1910년 봄, 장로교가 세운 대구 계성학교 사범과에 입학을 하고 1915년에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여 1919년 대구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1925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내매교회와 영주읍교회의 조사(助事), 그리고 풍기읍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되어 10년 가까이 목회를 하였다. 그로 인해 이들 교회의 기초가 잡혔고 교인들의 도덕적 생활 방식이 확고하게 되었다. 1933년에 그가 서울로 떠날 무렵, 풍기읍교회는 성인 신자만 4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어 있었다. 강병주는 1933년 6월, 장로회 총회 종교교육과 교사양성 과장이 되어 서울로 옮기기까지 경안지역의 교회지도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총회 종교교육 활동도 활발히 하여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였다. 특히 평북노회에서 그는 명강사로 알려졌었다. 후일 평양신학교를 갓 졸업한 강신명이 선천 남·북교회의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강병주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병주에게는 한글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었다. 그는 어린 자녀들을 곁에 두고 성경을 가르칠 때조차 읽기와 쓰기에 신경을 썼다. 후일, 강신명이 ‘새서방 새각시’ 같은,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던 것도 신앙과 더불어 어린이들에게 우리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훈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병주는 기독교에 입교 후, 바로 강신명을 첫아들로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집안의 토지를 얻어 내매교회 병설로 강석진과 함께 기독내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기독내명학교는 강신명이 공부하던 1910년대에는 동네의 몇몇의 아이들만 다녔던 작은 사립학교였지만 1920년대에는 북장로교 경안노회 중 가장 큰 학교로 발전하였다. 강신명의 아내 이영신도 기독내명학교 교사였다. 아버지 강병주는 자신이 세운 학교의 교사였던 이영신이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강신명은 처음부터 목회자로 길러졌다. 강신명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1920년대 초에 내매교회에서 열린 김익두의 부흥회에서였지만 그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강병주는 일찍부터 강신명을 민족을 사랑하는 목회자로 만들고 싶었다. 기독내명학교 설립의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풍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강신명이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만 다닌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강신명은 아버지 때문에 기독교 학교인 평양의 숭실중학교, 공주 영명학교, 배재학당을 거쳐 계성중학교를 졸업했고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마친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던 것이다. 강병주에게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창설된 학교가 신앙교육과 만인 평등의 교육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민족 사랑과 주의 종이 되기 위한 바탕이 바로 거기에서 만들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신명이 목사가 되고 민족을 위하여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남다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강병주로부터 유전된 기질, 남다른 학구열과 복음적 정열, 민족 사랑, 기독교 교육에 대한 강병주의 깊은 신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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