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의 정치가 명재 윤증 - 생애와 발자취
20여차례 벼슬 제수 거부, 지역화합 등 대통합 정치 역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
서기 1714년 86세의 윤증이 사망했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배신하여 사림(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수년 후 그 일이 탄로나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화가 나서 절교 편지를 보냈다. 윤증은 어렸을 때 유계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윤증이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숙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바라본 윤증은 두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그것도 스승이 쓴 책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당하는 비양심적인 인물이다.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君師父)가 하나로 취급되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두 스승을 배신했다는 평가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하지만 윤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당시의 임금 숙종은 이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또한 『윤증연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사가 무려 2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백명의 관학(館學) 유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해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려운' 배은망덕한 인물에 대한 숙종의 추모시와 밀물 같은 조문객은 어떤 연유일까? 더구나 그의 집은 서울도 아니었다. 그의 집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라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집 뒤로는 노성산이, 문 밖으로는 계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윤증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성(泥城)이라고 불렸던 이 한적한 농촌까지 2천여명의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두 현상은 그만큼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가운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증의 생애에 관한 상반된 두 평가 중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국가의 공적 기록인 「실록」을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적 기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의 기록은 비록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관이 어느 당파 사람인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오늘날도 여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과 야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이 다른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윤증에 대한 상반된 평가
『숙종실록』은 윤증의 생애를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으로 기술했지만 사실상 그는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사였다. 이 말이 그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당시 남인·노론(老論)과 함께 3대 정당 중의 하나인 소론(少論)을 이끌었던 저명한 정치가였다. 바로 이 때문에 『숙종실록』의 사관이 그의 생애를 혹평한 것이다. 그 사관은 반대당인 노론(老論)측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다. 송시열은 윤증의 스승인 동시에 정적(政敵)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송시열과 윤증은 은원(恩怨)으로 얽힌 모순된 존재였다. 윤선거와 윤증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윤선거는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자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콤플렉스를 안겨준 모순된 존재였다.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윤선거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드라마는 개인적인 인연에만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이 엮어 가는 이야기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해 있던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이 담겨 있었다. 그 해법에 따른 정치적 행보는 아직까지도 윤선거와 윤증의 파평(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 그와 한바탕 다툰 데 이어 그의 아들 윤증과도 크게 다투었다. 이렇게 말하면 두 집안이 대대로 원수 사이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 조선에서 동문 사이는 곧 같은 당인(黨人)임을 뜻한다. 조선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윤선거와 송시열이 같은 정당인 서인이었던 점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당시 서인은 집권당이었으므로 이 두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여당인(與黨人)들이었다.
같은 당 소속이었던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문거(文擧)의 며느리, 즉 윤선거의 조카며느리였다. 자유롭게 남녀가 교제하는 현재도 우리나라 지배층들은 혼인을 서로의 권력과 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유력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던 조선시대에 결혼은 곧 집안끼리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두 집안이 사돈이란 의미는 두 집안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유력한 증거다. 같은 당파이자 사돈 사이인 가까운 관계가 왜 악화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일까?
윤증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학문집안이었다. 그의 집안이 당대의 학문가였음을 말해 주는 유적은 현재도 남아 있다. 논산시 노성면에 현존하는 종학당(宗學堂)이 바로 그곳이다. 종학당은 글자 그대로 일가(宗)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學) 집(堂)이었다. 종학당은 인조 후반기인 1640년경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일종의 집안 학교였다.
윤증의 일가 자제들은 눈 아래 병사저수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이곳 종학당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학문을 전수받았다. 학문 높은 집안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가의 자제들이 함께 모여 배우는 종학당 학습법이 효과만점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종학당 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만 무려 42명이었다니 그 위력을 알 만하다.
윤증의 할아버지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성혼은 선조 때 이이와 함께 서인을 이끈 서인의 영수였다.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제자였으니 윤증의 집안은 서인의 두 영수 이이와 성혼의 양쪽 학맥을 이은 셈이다. 즉 윤증은 한몸에 이이의 학통에다 성혼의 외손이란 두 정기를 받은 셈이자 조선 유학의 종주를 이은 셈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송시열·송준길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가장 학문이 높은 학생으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하지만 윤증의 어린시절은 국가의 치욕이었던 병자호란으로 크게 영향받는다. 9살 어린 나이에 겪은 병자호란은 너무도 큰 상처를 심었고 평생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청나라가 침입하자 그의 아버지는 부인과 어린 남매를 이끌고 강화도로 피란했다. 북방의 기마민족은 전통적으로 수전(水戰)에 약하다. 세계를 정복한 몽고족은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멀지 않은 바다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인조도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기마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장기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봉림대군과 비빈(妃嬪)들은 미리 강화도로 들어갔고 윤선거 같은 양반 가문들도 강화도로 피신했다. 문제는 정작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다 길이 끊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인조 14년인 병자년, 바람도 찬 12월이었다. 이 바람에 무수한 이산가족이 생겼다. 왕실과 많은 양반가족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윤증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윤증의 할아버지인 윤황이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친구 권순장·김익겸과 함께 청군이 상륙하면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포를 거쳐 갑문(閘門)을 통해 상륙한 청군이 삽시간에 밀려들면서 조선군은 대응 한번 제대로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성은 어느새 청군으로 뒤덮였다.
이때 순절을 약속했던 윤선거의 두 친구는 김상용이 분신하자 그들도 따라서 죽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약속대로 죽지 않고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명으로 남한산성에 파견되던 침원군(琛原君) 이세완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했다. 이 사건이 훗날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 의리론을 두고 벌어지는 「회니시비」(懷泥是非)의 논쟁거리가 된다.
자결한 것은 윤선거의 두 친구뿐이 아니었다. 윤증의 어머니 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37년 정월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시세가 급박해졌다. 윤선거는 사우(士友)들과 앞으로의 처신을 논의하고 있는데 부인 이씨가 여종을 보내왔다.
윤선거를 만난 부인 이씨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뵙고 결별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자결했다. 윤선거는 부인을 말릴 수도, 그 의지를 칭찬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어서 차마 부인의 자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9세 때 어머니 사후 손수 장례 치러
한편 윤증과 그 누이는 곁에서 통곡할 따름이었다. 부인 이씨는 여종에게 후사를 부탁한 후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하직했다. 사우들에게 돌아간 아버지의 소식이 끊어지고 어머니는 자결했지만 윤증은 의연했다.
윤증은 한 살 위의 누이와 함께 노비들을 인솔해 손수 염을 하고 입관(入棺)한 다음 임시로 거처하던 강화도 사람 정파총(鄭把摠)의 집 마루 아래 빈소(殯所)를 정했다. 윤증은 마당을 파 관을 묻고 사방 모서리에 돌 여덟개를 놓은 후 중간에 숯으로 표식을 삼았다. 윤증과 누이는 슬프게 곡(哭)을 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윤증은 침착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작은 수첩을 꺼내 누이에게 주었다. 족보가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윤증은 누이에게 족보를 외우게 하였다. 『만일 서로 헤어지게 되면 누님은 여자이니 이것으로 서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속깊은 의도였다.
청군이 성을 점령한 상태에서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윤증은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과연 윤증과 누이는 혼란한 와중에 헤어지게 되었다. 윤증은 성안 사람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김포의 청군 진영으로 끌려갔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후 풀려났다. 그의 누이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남의 여종이 되어 의주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족보를 말했는데 다행히 의주에서 만난 어사(御史) 이시매(李時煤)가 아버지 윤선거와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몸값을 대신 지불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윤증의 재치가 없었다면 그의 누이는 머나먼 변방에서 남의 종으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증이 김포에서 풀려났을 때 어린 그를 업고 다닌 인물은 여종 동절(冬節)이었다. 동절은 윤선거가 강화도로 피란 와서 거주하던 집의 주인인 정파총(鄭把摠)의 소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관을 내주어 빈소를 차리게 한 사람도 동절이었다.
그런 동절이 늙어 죽은 후 제상(祭床) 차릴 아들이 없자 윤증은 몸소 제상을 차려 주었다. 그것도 윤증이 기력이 남아 있던 85세 때까지 제사를 지내 주었다. 85세는 그가 몸이 쇠약해져 새벽에 가묘(家廟)에 참배하는 것을 그만둔 해이니 조상을 지내는 정성으로 여종의 은혜를 기린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다.
윤증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모두 출타해 가묘(家廟)에 참배할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사당에 참배하게 하자 다른 사촌들은 마지못해 참배한 후 모여 낄낄거렸으나 윤증은 양손을 단정히 하고 용모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를 본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하니 할아버지 윤황은 『이 아이는 보통 아이와 다르다』며 더욱 귀여워하였다.
벼슬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키로 결심
윤증은 다른 사촌들이 시샘을 할 정도로 어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만약 벼슬에 뜻을 두었으면 그 누구보다 빨리 출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증은 일찍이 벼슬을 포기했다. 그는 학문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쳤던 당시에 이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한번도 과거를 보지 않았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증 같은 이름있는 학자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출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황이 척화신(斥和臣)으로 절개를 드높인 데다 서인의 정통학통을 이은 그에게 관직이 제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37세 때 제수받은 벼슬은 정6품 공조좌랑(工曹佐郞)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뜻이 없었기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43세 때인 현종 12년에는 정4품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을 맡는 곳으로 학덕이 뛰어난 인물만이 임명될 수 있는 영예로운 관직이었다.
윤증은 벼슬에 뜻이 없었다. 그는 41세 때인 현종 10년(1669)에 여러 집안 어른과 당대 유학의 원로들에게 이런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처음부터 과거를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실제 그는 이후 정4품 사헌부 장령(掌令), 종3품 사헌부 집의(執義) 등 모든 벼슬하는 이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청요직(淸要職)이 제수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다.
그에게 당쟁은 거의 운명처럼 보인다. 일찍이 벼슬을 포기했고, 또 여러번 제수된 벼슬에 단 한번도 나가지 않았으면서도 격심한 노소분당의 한 가운데 그는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쟁의 두 당사자가 아버지 윤선거와 스승 송시열이었던 탓이다. 이 두 사람이 부딪친 당쟁에 아들이자 제자인 그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윤선거와 송시열이 부딪친 발단은 백호(白湖) 윤휴문제였다. 그 유명한 사문난적(斯門亂賊) 논쟁에 휘말린 것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원래 윤휴와 송시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위기를 맞이한 조선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식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송시열은 양란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주자학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주자는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인 효종에게까지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했을 정도로 주자를 절대시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성리학 체제로는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는 데 격분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격했다. 송시열의 분노는 이 한마디 말로 요약된다.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도 심하다."
하지만 서인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반대당파 남인인 윤휴를 "그는 고명한 학자이므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감싸고 나섰다. 그러자 윤휴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린 서인들은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황산서원은 충남 강경의 금강 근처에 세워진 서원이다. 오늘날은 세계화의 현란한 구호 속에 천시받는 국학(國學)의 현주소를 말해주듯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조선 유학의 학통을 이은 대유학자들을 모신 핵심적인 서원이었다.
이 황산서원에 송시열·윤선거 등 저명한 서인학자 10여명이 모인 때는 1653년(효종 4)이었다. 언덕 위 팔우재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고요하게 흘렀으나 이들의 논의는 긴장이 감돌았다. 윤휴가 사문난적이냐 아니냐는 주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모는 데 윤선거가 끝내 동의하지 않자 송시열은 극단적으로 나왔다.
"주자를 이기려 한 윤휴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는 죽음 이외의 형벌이 없소. 임금이 춘추의 법으로 다스릴 때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공(윤선거)은 응당 윤휴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
이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양단간에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 당시는 주자학 절대주의 시기였다. 이는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에서 '스탈린이 옳은가? 트로츠키가 옳은가?'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이미 사상이나 학문의 차원을 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나 이념의 차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윤휴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음양(陰陽)으로 말한다면 주자가 양(陽)이고 윤휴가 음(陰)이 되겠습니다." 황산서원 회합이 송시열의 승리로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주희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라는 개인간의 선택 차원이 아니라 조선 주자학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아닌가 라는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선택 차원의 논쟁이었다. 주희가 틀리고 윤휴가 옳다고 말한다면 윤휴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릴 판이었기에 윤선거로서는 윤휴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산서원 회합은 외견상 송시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승리한 송시열 또한 이를 법적인 문제로 비화시키지는 않았다. 송시열은 윤휴문제에 대해 서인학자 사이의 합의를 도출한 것에 만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산서원 회합에서 쌓인 감정의 앙금은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한 상태였다.
효종의 죽음이 계기가 된 예송논쟁은 이 감정의 앙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예송논쟁은 그 배후에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심각한 문제를 깔고 있지만 그 표면적 모습은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성인인 맏아들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복을 입게 돼 있었고 기타의 경우는 1년복을 입게 돼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송시열의 1년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기 위해서 1년설을 주장한 것이라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1차 예송논쟁은 가까스로 집권당인 서인의 승리로 끝났으나 15년 후인 현종 15년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때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끝났다.
2차 예송논쟁 결과 정권이 교체됐고 남인들이 집권했다. 실각한 송시열은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까지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송시열은 그 누구보다 효종과 가까웠던 자신을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으로 모는 데 분개했다. 하지만 송시열에 대한 남인들의 적대감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남인들은 유배지의 송시열을 계속 압박했다. 그의 유배지에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도록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6년 뒤 다시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서인계 척신(왕실의 인척)들이 주축이 돼 남인들에게 정치보복이 가해졌다.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물고 물리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윤휴가 처형되고 이어 무려 1백여명의 남인들이 사형·유배·삭탈관작 등의 화를 입었다.
집권 서인으로서 화해의 정치 주장
서인계 척신들의 이런 정치행태에 대해 서인 내부에서도 반발이 터져나왔다. 남인들에 대한 공작정치에 소장파 서인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소장파 서인들은 공작정치의 실행자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이 나서서 척신들의 공작정치를 중지시켜 주기를 바랐다.
송시열이 조정에 나온 것은 이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반목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휩쓸리는 모습을 보였다. 소장파 서인들은 송시열의 이런 처사에 반발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이들은 송시열과 함께 부름을 받은 두 선비 박세채와 윤증을 주목했다.
윤증이 서울길에 오른 것은 소장파 서인들의 이런 바람 속에서였다. 숙종 9년 5월 윤증은 생애에서 딱 한번 출사할 생각을 품은 채 서울길에 올랐다. 한해 전 그에게 내려진 벼슬은 정3품 호조참의(戶曹參議)였다.
윤증은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임금을 알현하는 대신 과천에 머물렀다. 과천에는 부친의 제자이자 자신과 동문 사이인 나량좌(羅良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나량좌의 집에 머물면서 정국을 관망했다. 임금에게 대죄(待罪)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속내는 정국 관망에 있음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차렸다.
윤증이 과천에서 올라오지 않자 송시열과 비슷한 시기 출사한 박세채가 과천까지 찾아와 함께 뜻을 펼 것을 종용했다. 두 사람은 밤을 새우면서 당시 정국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이 자리에서 윤증은 유명한 '3대 명분론', 즉 자신이 정계에 참여하기 위한 3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지금 잇단 정치공작에 희생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남인과 서인을 화해시킬 수 있겠는가? 둘째, 정치에 부당하게 간여하는 외척들을 축출할 수 있겠는가? 셋째, 현 집권자들이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 당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데 이를 시정할 수 있겠는가?"
첫째 조건은 정치공작에 희생된 남인들의 원한을 풀고 정치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둘째는 김석주 등 왕실 친인척의 부당한 정치간섭을 막을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고, 셋째는 반대당 사람들, 즉 남인들도 등용함으로써 정치화합·지역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기호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남인들은 영남지방에 주로 분포해 벼슬아치들은 물론 일반 유생들 사이에서도 지역감정이 심각한 때였다. 일반 백성들은 아니었지만 사대부들 사이에는 지금 못지않게 지역감정이 팽배했다. 심지어 남인 지역인 대구에 거주하는 유생이 서인인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찬성했다 해서 그를 동네에서 내쫓고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윤증은 이런 상황에서 기호지방의 유력한 학자로서 반대지역인 영남지역과의 화해를 주장한 것이다. 또한 서인의 유력인사로서 반대당파인 남인에 대한 포용을 주장한 것이었다. 정치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척신정치의 폐지를 요구한 것은 집권자들의 친인척이 사사로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과 공작정치를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공작과 지역감정이 횡행하는 현재의 정치현실에 3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던지는 현인(賢人)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윤증은 당적으로 볼 때는 서인이었다. 큰 틀로 보아 공작정치의 가해자 입장이었다.
이는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과제에 많은 시사를 준다. 즉 화해는 가해자의 자기반성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누구이고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따진다면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자명해질 것이다. 정치화합과 지역화합, 그리고 권력자 친인척의 정치간여 금지는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원칙이지만 그만큼 지켜지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윤증이 제시한 이런 과제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세채 또한 3대 명분론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정치판의 상황에서 이를 실현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윤증은 자신의 뜻을 펼칠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미련없이 고향인 이성으로 돌아갔다.
박세채도 서울에 올라온 후 송시열은 만나지도 않고 숙종에게만 사의를 표명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름을 받은 세 사람 중 둘이 물러가자 혼자 머쓱해진 송시열 또한 벼슬을 내놓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윤증과 박세채의 처신은 오늘날 국민이 부른다며 정계에 나섰다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은 채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지거나 추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요즘 정치인의 행태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윤증과 박세채의 처신은 '때가 되면 나아가 도(道)를 펼치고 때가 아니면 물러나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율곡의 출사관과 같은 것이었다. 기존 정계의 문제점이 곧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해 섣불리 나섰다가 구악(舊惡)을 뺨치는 신악(新惡)만 보태는 현재의 일부 정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처세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문 짓지 말라고 유언
윤증이 제기한 3가지 조건, 즉 '3대 명분론'에는 남인과 서인의 화해, 척신 정치구조의 타파, 당색과 지역색을 배제한 고른 등용이라는 당시 조선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해법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었다.
이는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투쟁의 정치에서 화해의 정치로, 증오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로 나가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또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증의 이런 처신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도 있었다. 정계에 문제가 있다면 나아가 개혁하는 것이 선비의 바른 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윤증은 이런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언덕에 있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 함께 물에 빠져 허우적대서야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윤증은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엄격한 선비였다. 평상시에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손수 방과 마루를 쓴 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혼자 있을 때도 손님과 함께 있는 듯이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한번도 태만하게 누워 쉬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맞을 때도 노소귀천(老少貴賤)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했다. 윤증은 검소한 삶을 스스로 실천했다. 집안은 아주 검소하였으나 거처하기는 편안하게 했으니 실질을 숭상한 기풍을 알 수 있다. 현미밥과 거친 옷을 입는 것을 분수에 맞다고 여겼다. 집안 여자들에게도 절대로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름난 효자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눈물이 옷소매를 다 적셨으며 삼년상을 지낼 때는 종이 주머니에 소금과 후추 약간을 양념으로 갖추고 삼년 내내 두가지 반찬만으로 끼니를 이을 정도였다.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새벽에 가묘에 참배하고 제사를 스스로 받드는 것을 보고 건강을 염려한 어떤 사람은 『주자도 70세에 이르자 손자에게 제사를 대신 받들게 했는데 이제 그만 쉬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증은 『내 근력이 아직 제사를 받들 만한데 어찌 자식에게 대신케 하겠는가』라고 받았다.
그가 새벽에 사당 참배하는 것을 중지한 것은 죽기 1년 전인 85세 때였다. 숙종 35년, 그의 나이 81세 때는 정1품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윤증은 그때까지 숙종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예는 윤증이 전무후무하다. 물론 이때도 윤증은 18번이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31세 때부터 평생 20여번 이상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사양의 상소를 올리는 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쏟았다는 우스개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는 당시로는 극히 드문 나이인 86세까지 살다가 유봉정사(酉峯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맞는 그의 자세 또한 남달랐다. 웬만한 벼슬만 지내도 화려한 수사가 담긴 검은 오석(烏石) 비문을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자신의 비문을 짓지 말도록 유언했다.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문제로 송시열과 다투었던 것이 한으로 남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그의 무덤가에 서 있는 비문의 내용은 아주 특이하다.
'유명조선국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名朝鮮國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 해석하면 '조정에서 부른 학덕이 높은 선비 윤증의 무덤'이란 뜻이다. 비문의 하단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노서(魯西·윤선거) 선생 묘(墓)에서 석호(石湖·윤문거) 선생께서 13자를 따서 옮겼다.'
즉 윤선거의 묘비에서 13자를 따서 옮겼다는 뜻이다. 비문을 짓지 말라는 유언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묘 앞에 비문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었던 후손들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논산시 노성면의 그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산길 양편에는 한 손아귀에 잡지 못할 정도의 푸른 대나무들이 그의 굵직한 생애를 말해주는 듯 늘어서 있다.
묘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에 댓잎이 바람에 서걱이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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