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아리랑에서 K-POP 3000년 한류음악 발상지는 정읍?

도심안 2011. 7. 31. 18:38

 

아리랑에서 K-POP 3000년 한류음악 발상지는 정

 

가야독립군이 당나라, 일본,고려를 정복, 허씨 왕국수도에  애국가를 '정읍'로 제정 세웠었다

태인허씨의 무대는 동북아시아였다(4)

아리랑 3000년 한국음악의 발상지  역사의 유적지는  흑치상지 허기  최치원이 대대로 이어 세운 최초 학당   은나라의 비들기 찬송소리가 서양 그리스  기독교와 한국의 백제에서 하늘님으로 부른  환웅님이다   

  그 비들기소리를 찬송가로 부른 그 유적의 현장  그 태산태수 최치원  율수학당 터  정읍시 칠보면의 3000년 역사의 유적과 역사를 찾아본다

중국의  은나라. 진나라. 당나라. 송나라.가 망하면 귀족들이 보물과 악공들을 데리고 망명하여 그  유적과 그 군악 정읍사 노래가 신라 태산태수  최치원  삼대목 향악잡영5수에서 고려시대 의종-충열왕, 그리고 유자광 악학괘범 정극인 상춘곡이 모두 이곳에서 율수학당에서 길러진 음악이 세계최고 한류 음악이다

당현종이 안록산의 난에  촉으로  피난 태자에게 황제를 빼앗기고  로마 터키 방어군 허기장군을 성왕으로 이씨 성을 주고

당나라 최고 무용수 측천무후가 황제가되어 세계최고예술시대에서 양성한 악공을   그의 손자 당현종이 양성한 음악 악공까지  당현종이  수양아들 태인 허씨 허기장군에게 주어서 신라 정읍(태산. 칠보)에 가서  당현종의 황제 복위를  준비하였다

그시기 경덕왕 때부터 신라는 음악이 창성 처용무 반주음악이 정읍사 이며 그반주 악대가 정읍농악으로 모든 민요를 반주하는

농악이다

K-pop 특징으로 최고의  미모  의상에 파격적인 동작의 춤은 한국 농악뿐이다

그것도 다양한  모든 굿거리 세마치 삼체 휘모리 단모리 오방진등 노래반주   박자를 사용한 농악은 정읍농악 뿐이다

설장구  상모놀이 상쇠 버꾸등 서양과 달리 무용과음악 노래 연극을 겸한 군악이  시시대 서양의 발레 팝송을 가미하여 세계특유의 예술을 창조했다

3000년 이어온 창조의 선두 그역사 바탕에 K-pop 이 생성한다

전국농악이 미국애국가 멜로디로 오염된 이시점에서 정읍사와 정읍농악의 발상지  허기장군 최치원이 데려온 악공의

양성소 태산 율수학당 교육이 현 전주대사습에서  승마 궁술  농악  병서읽기(판소리)로  태인 사람 숙빈최상궁의  아들 영조대왕과 손자 정조대왕이 3000년 전통을  재생시킨 것이였다

K-pop  세계 진동 그 코리아 유구한 예술 전통 역사를  청소년이 매주  화 금에 정읍 칠보면허기장군  최치원 정극인의 활동유적  향토관에서 50곡 농악 멜러디를 배워 이어가고 있다

.

 진시황제가 타고 다닌 5두마차 석상이 태인허씨 탄생굴 허장군굴 (정읍 칠보면)  앞에 석상 돌마차가 지금도 있다

 

 

     비들기 소리를 찬송가로 사용한 은나라 탕왕의 수도 은허에서 출토된 탈춤 가면과  '타오티'사각무늬

여기 탈은 백제 부여출토 가면이있고 사각무늬와 같은 무늬가 정읍 칠보지역 기와무늬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산비들기 새우는 소리를 기우제 찬송가로 사용한 위의 은나라 탈과 모양이 같은 부여출토 구리가면

 

70년대 중학교 교과서 표지에 은나라  천신의 상징' 타오티'표지무늬에

 

은나라  천신의 상징' 타오티'표지무늬의 기왓장이 정읍 사내면 용장사 절터에

기와무늬가 있다

더 선명한 무늬 기와는 1970년 원광대 미술교수 정승섭 전박물관장이 여기서 수집햇다  

 

로마제국 터키의 교회를  당나라 악공이 모방하려한 허기장군 칠보면 허궁실 신당터

 

 

터키 이스탄불 로마제국에 세운 금마를  베니스로 가저간 금마차를 허기장군이

보고 아래의  5두마차를 이곳에  만들어 세웠나

 

 

 

 

 

 

 

 

 

 

 

 

 

 

 

 

진시황제의 오두 마차가 가야허씨 허왕굴앞에 대기하고있다

 한국에서  진시황제 마차를 처음 타보는 필자의  탐험 사진

 

또는 진시황제의 불로초를 케러온   서시의 신하들리 진시황제 재림을 빌고 있는 절터로서

이곳을 '절터고개'로 부른다 

 

 

 

 진시황제의 능안의 오두 마차가  왜 허장군 굴앞에 있을까

 

   진과 한나라 망명족이   진시황제의  전용마차를 대기하고 재림을 기원하는 후손이 가야 부족 태인허씨 허기장군 굴앞 석상

 

중국 운강석굴을 만든  석공이 이곳에서 잠시 주둔하다가  경주 토함산으로 피신하여

 

아래와 같이 당현종을 신당  만들려다가  ...... 중지되고  토함산으로 가서....

 

 

 시황제가 나오기를 빈 이굴 그종교가 일본시조 천조대신의 천석굴문 

 신화 그 모양 유사하다

일본서기 기록  478년 대산성 전투현장이 이곳이다

 

 

 

 그리고 허왕굴은 일본시조 천조대신신화와 유사하다

 필자의 향토 문화인 최재필 김민영 답사사진

 

 

 

 

 

 

 

섬진강과 동진강을 연결하는 교통과 군사의 최고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가야국은 진시황제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망명군들이 노령산맥 요새지에서 진시황제의 재림을 기원하고 정착하다가  한나라가 마한을 세워  마한땅이 되었다

그래서 적국  한나라의 소속을 벗어나려고 마한 동쪽 땅으로  진시황제 진나라 부족들이   진한과 변한으로  경상도 지역에 정착하여 후에 신라와 가야국을 세운것으로 본다

동해안 족 산악지대 서라벌경주로 간 진한부족은 신라를 세우고  청도군 이서고국(공암면)으로 간 부족은  김수로왕의 김해세력와  합세하여 가야국이 세워진다

삼국사기에서도 진한은 진나라 피난민으로 마한에서 동쪽의 땅을 주어 진한이되었다 기록했다

그리고 박혁거세는 유달리 말우는소리를 애국가로 사용했다

고구려는 꾀꼬리, 백제 비들기를,  토탬찬송가 애국가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석탈해가 까치소리 김알지가 닭우는 소리로 탄생한다

유달리 한민족 은 새의 자손이라고 하는데 말소리를 내는 박혁거세는 진시황제가 타고 다니는

5두마차의 말우는소리를 상징하는 겉 같다

서라벌을 습격한 적이 있는 가야국을 신라와 고구려가 합세 멸망시키자 청도에 있는가야 이서고국 유민이  백제국 남원 정읍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백제가 망하자  부안과 진도 완도 등지에서 해상세력으로 당과 신라를 교역했다

그러다가 당나라 에서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나라 전국토가  점령당했다 

당나라 현종황제가  호남성 장사현 장가게로 피난하여 망국에 이르는 시기에 가야족 태인 허씨 허기가 찾아가서 도왔고 이어서 전주도독 김원웅이 당나라에 지원군으로 참전하였다

당나라 현종왕은 지원군 요청하는 글에 '땅만 두고 여자 보물은 다주겠다'라고 호소했다

허기와 김원웅은 모두 가야족 전라도  연고 사람으로 당연히 당나라 참전승리 댓가로 당나라의

여자는 정읍사 노래 장사꾼 아내가 아니라 중국 장사현에 토벌군으로 간 남편 허기와 김원웅을 이르는 유행노래였다

 

 

가야인이 만든 가야토기(소형)와  허기,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노획한 도공이  부안에서만든 토기(대형) 비교 사진 ,  이것이  고려청자기로 발전했다

 

그리고 도자기 만드는 당나라 장사현 도자기 장사요 가마터  최고의 기술자를 잡아왔다

그 잡아온 도자기 기술자가 만든 가야토기가 가야시대 작은 것과 아주 다르게 거대한 당나라 기술작품으로 나타난다

부안  격포 채석강 수성당과 남원에서 이런 토기가 출토 된다

그리고 참전한 가야장군의 철모 갑옷이 남원에서 출토 된다

가야허씨  망명족이 가야토기를   당나라  755년 참전으로 노획한 당 도공이 만든 부안 채석강 바닷가 에서  만든 비교사진 

 

장보고는 허기의 군사로 들어가서 장가계 장씨 호족의 양자로 입적하여 엄청난 군사력으로 커지자 신라의 왕권을 넘어볼수 있었다가 암살당하였다

그후에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망하게 되는데 황소의 난에서 군산 문창군(선유도)사람 최치원이 참전하고 귀국한다

  888년에 태산태수 허사문 이 이곳 허장군굴에서 신화를 창조하고 최치원을 태수로 영입하고

장보고의 후손 장원을 입국시켜서  역대 당나라 참천군사 세력들이  정읍 태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신라의 왕족 상주태수 아자개의 양자로  견훤을 입적시켜서 신라의 귀족으로 군사 세력을 가춘 견훤을 최치원. 장원. 허사문. 배경으로 장보고 세력지 순천에서 후백제가 반군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광주 정읍 전주를 함락했다

삼국유사 출판시기는

견훤은 '광주북촌사람 이씨'라고 했다

광주북촌은 태산(정읍 태인)인데 그 당시 충열왕때 최고 권력자 송인이 태산(정읍 태인)사람인데  견훤역적을 태산사람으로 쓰면 송인을  고향을 모독하는 죄악이 된다

그래서 광주북촌 이씨라고 애매하게 기록햇는데 허사문 탄생지 정읍 산외면 이치 마을 옆에 지네마을이라는 공동마을이 있다

 

 견훤 그 힘은 당나라 참전군사 세력을 믿고 백성들이 따랐기 때문이다

갑오동학군도 대원군이 명령이라하여 순식간에  점령햇던 예가 있다

누가 서당선생 전봉준 만을 믿고 역적행위를 하겠는가

견훤을 허사문과 유금필이 나주로 망명시키고 금산사에 있는  가무악공과 절의 군사들은 허사문의 세력으로 지금까지도 송월주 (정읍산외사람) 주지가  세력으로 잇고 있다

그시대 역사로서 

태인(시산, 태산)허씨의 왕족이  정읍사를 가무외교로 활용하여  고려현종이 거란 침입시 나주 피난 길에 태인 왕림마을에서 정박할 때 고려현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결과 태인허씨 종족 세력인 이자겸, 이자의 등이 집권하여 송나라 사신을  직접 교류하였다가  정중부란의 주모자 금산사 출신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죽자 같은 태인성씨 허승 김광립이 정중부를 죽였다 

그래서 태인허씨 세력으로 장악했다 

 

숙청으로  이성계의 선조도 이를 피해서 함경도로 망명하였다.

 고려 현종이 나주로 피난 시에 정박하는 날  여기 태인 왕림마을에서  두명 현종왕비가 태인허씨 후손으로 바뀐다 

그러나 고려말 우왕때 왜병의  정읍.고부.태인현 방화사건으로  이성계는 여진족 함경도 군사를 몰아와서  왜병을 물리치고 지리산 황산전투에서  승전하여 다시  태인허씨 종족계 이씨 세력을 되찾은 것이다. 

이의방 허승의 죽음으로 같은 부족 이씨는 함경도로 피신 하는 그시기 충열왕 시대 정읍 (태산)허씨 마을세력 송인이 몽고황족과  절친하여 이성계세력을 길렀고 송인이 충선왕아들 즉  공양왕의 조부 왕전 왕자로 바꾸려했던다 

정읍 송씨는 공민왕에게 세력을 뺏기고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무술 세력을 길렀다

개국공신 이화의 후손이 정읍의 호족으로  허씨 이씨  이자겸 고려 세력시대 송나라에서 귀족송씨들이 이곳 허씨 땅에 살다가  몽고군 7차침입에 송군비장군의 대승으로 송씨 세력의 집성촌이 되었다

그래서 송씨와 허씨(이씨)는 대대로 뭉처서 고려  현종시대부터 조선말기 이씨조선까지 결과적으로 태인 허씨  가야 독립군의 최후승리로 해석된다

 

그 세력이 여진족 퉁두란과 정읍송씨 사병이  지리산 왜구 이지발도를 처단하여 고려의 모든 민심은 이성계에게 몰렸다

그리고 이성계의 최영장군과 최종결전에서   군악대장 송안이 군악 나발을 잘 불어서 승리하였다

단종시대  양영대군과 수양대군은  정읍에서 가야족 이자겸 송인 허승의 후손세력과 이화 퉁두란이 길러논 송인수의 딸을 단종왕비 누이를 임영대군 부인으로 친족을 만들어 세조의 왕권세력을 만들었다 군악대장 송안의 후손 들에게서 가야금을 배워서 세조대왕을 가야금 계면조음악을 창조하였고 부하 유자광은 한민족음악 정읍사를 한글로 번역 악학괘범 책을 만들었다

한민족 5000년 예술  이리랑은

이런 세력이 조선 단종, 연산군 시대의 유자광까지 이어져 정읍사로 지켰던 줄거리다.

아래에 태인허씨의 무대는 동북아시아였다(2)

 이전발표 글을 첨부 이해를 돕는다

 

 그림으로 그려본 일본시조 천조대신 출현 천석굴 유적 신화 그림

 
▲ 허장군봉. 허궁실뒷산이며 칠보면 복호마을 뒷산으로 허장군의 굴이 있으며 허장군이 굴안에서 도를 닦는다고 한다. 일본서기 내용과 유사한 허왕굴 역사내용 상상도 필자의 그림

패망 가야의 허세신 일족이 백제로 귀화해서 태인 허씨 시조되다

삼한과 삼국시대는 모계사회로 토템(동물)신앙시대다. 허황후, 유화, 소서노가 여왕인 것을 석가, 공자의 불교, 유교식 남성 위주의 고려말기 풍속으로 말미암아 김수로,  주몽,  온조 등 남자왕으로 바꿔진 것이다.

선진국 인도에서 온 허황후의 가야는 철기무기등 강력한 국가로  신라국 경주에 인접한 경북 청도군까지 점령하여 서라벌을 급습한 경력이 있다. 가야는 백제땅도 지리산 남원까지 점령했다.

여기서 놀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군을 지원받아 가야를 멸망시켰다. 가야는 허세신(許勢臣)이라는 사람이 백제와 친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 천황이 탄생한 규슈에서 이런  거북모양  가야왕관이 출토되었다

일본에 없는 진시황제 오두마차에 모시려는 진시황제 풍속신앙이  가야왕족이 일본을 정복고  이 가야왕관을 쓰고 후에 백제계가 통치한 것으로  중국 일본 역사의 고증자료가 여기에 있다

 

 

  백두대간 호남정맥 등산로에 있다

칠보면 시산리 장군봉에 복호라는 마을이름은   일본시조 탄생설화의 반호(磐戶)란 이름과 위치가 유사하다는 점이 478년 일본서기에 대산성 반란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야 패망후에  반 신라 가야부흥군 세력 후손으로 보이는 허세신(許勢臣) 부족이 백제에 귀화해서  토착화하여 시산(태산)허씨가 되었다. 시산군(詩山君)이란 태산군 명칭의 호로 대대로 호족이 되어 통치하다가 백제마저 망하자  통일신라시대 서남해안의 위도, 선유도, 인천해안의 해상을 떠돌다가 동진강과 섬진강의 교통 중심지 태산(정읍 칠보)과 지리산에서 유격대로 잠적한 세력으로 보인다.

백제 패망후 시산 허씨, 서남해안 떠돌아

그 세력이 백제저항군 흑지상지장군의 세력과 연계되어 당나라 측천무후의 군사력으로 흡수되게된다. 당나라 3대 고종의 후궁 측천무후의 잔혹한 정권 찬탈과 독재정치가 장기간 지속된 것은  노예 서민등을 막론하고 과거 등용을 철저하게 능력과 책임으로 실시하여 민심을 얻은 결과다. 여기에서 고선지, 이정기, 왕모중등이 벼슬을하여 패망한 고구려 백제의 유랑인들이 당나라로 몰려들었다.

측천무후가 죽은 뒤에 현종의 심복이 된 왕모중(고구려인)은 선왕 중종을 위씨황후가 독살하여 왕권을 차지하려 하자 고구려사람 왕모중이 급습하여  위씨황후 일파를 숙청하고 현종 황제를 옹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모중이 당나라 궁중을 장악하여 세력이 커지자 환관들이 시기하였다. 당나라 환관들은 미녀 양귀비를 등장시켜 미인계로  현종을 이간시켜서 왕모중을 숙청하고 이어서 또 안록산을 숙청하려다 755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후부터는 당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반란이 계속되다 망했다.

통일신라 때 정읍호족 허이기, 당에 건너가 위기의 당 현종 도왔다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을 양귀비 세력이 제거하려고 하자 안록산이 알고 반란을 이르켜서 중국을 장악하고 황제라고 칭하였다  

고구려 백제계  왕모중의 세력이였던  태인허씨 허이기등 선유도군수 아들 최치원, 장보고,  김원웅, 이정기, 이사도등 당나라 대륙을 정복한다  

당나라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이사도(고구려 장군 이정기의 손자)와 장보고의 진영에 도우러 찾아간 통일신라의 정읍 호족 허이기가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피난한 호남성 장사현 (장가계 근방)로 찾아가서 풍전등화의  당나라 현종을 도왔다. 이에 당나라 현종황제는 천하 제일로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감사의 글을 허이기에게 써주었다.

여기서 허이기는 왜 당나라 현종이  망하기 직전인데 위험하게 구출하러 갔을까 의문이 든다. 그것은 허이기가 백제, 고구려인의 세력을  밀어낸 안록산의 정적이기에위험한 양자강으로 돌아서 찾아간 것이다.

장보고의 등장...중국 정세 불안해지자 청해진에 살면서 해상권 장악

그리고 요즘 관광지로 유명한 장가계 지방으로 한나라  장량의 후손 장씨의 아들로 입적한 장보고를 이사도의 산동반도에 합류시켜서 그 힘으로 난을 평정했다. 이사도는 고구려 연개소문 같이 '국토회복의 야망'으로 돌아서서 낙양성을 함락하고 중국통일의 기반을 완성했다.

이때에  이사도의 군사령관 '유오'가 이사도를 암살하여 야망은 수포로 끝났다.

염장의 장보고,  안두희의 김구 암살수법은 여기의 기록을 그대로 모방한듯 하다.

무정부 상태인 이 시기에 장보고는 속마음으로는 이사도와 같은 연합군으로 임하였고 양다리 외교로 임하다가 이사도 암살로 종전이 되고 중국 상황이 불안해지자 신라 청해진(완도)에서 살면서 신라의 왕족에 접근하며 강력한 한.중.일.해양을 장악한 활동을 하였다.

 

 

 

장보고 수하는 대부분 태인허씨계의 인천 이씨 부족

   

 

일본천황 하강지의 천석굴에는  굴문이 없기 때문에 씨름선수가 돌을 던저버린 신화로 일본 이주에서 변햇다

 

 여기의 정읍 허왕굴 허씨족은 일본의 천황족으로 타향 

일본에서 비슷한굴을 찾아서  허씨신화로 만들어 낸굴이다

굴문이 없어서 굴문을 씨름장사가 던저버린  신화로 만든거 같다

 

 

그러나 장보고가 암살되었고 대부분 이씨들인 그 부족들은 계속 일본에 왕래하며 반항한다. 이씨들은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계속 반란을 기도하자, 이창진 등이 일본에 파견한 청해진의 무역선과 그 책임자였던 이충(李忠) 등에 대해서 염장(염문)은 이소정(李少貞) 등을 일본정부에 보내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 청해진 시대에  이창진, 이충, 이소정 등 이씨들이 중심이 된 것을 보면 그들은 태인허씨 계의 후손 인천이씨 부족으로 이기, 허도등의  친족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부하들이 대부분 이씨들이란 점이다. 이것은 당나라 이사도 군사에서 활약한 태인허씨계 세력이 대거 장보고 세력에 참여한 결과로 보인다. 태인허씨와 양천허씨가 주로 남해안 지방에 많이 사는 이유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장보고 세력, 신태인 벽골군으로 강제이주..김제 부량은 부안장씨 집성촌

염장의 재토벌로 장보고 유민들이 일본에 살았고 그후에  장보고 유민을 모두 신태인 지역과 같은 군이였던  벽골군(碧骨郡)에  851년(문성왕 13) 강제 이주됐다. 따라서 부안 장씨는 부량면이 집성지로서 장보고 후손이다

장보고는  중국 장사현(장가계 근방)에서 허이기를 따라간  노예로서 장가게지방의 장씨호족의 성을 받아 장씨가 되었고 나머지 무리들은 거의 이씨(이창진, 이소정 등등)이므로 견훤도 이들 후손으로 서남해안세력으로 보인다.

 

 

견훤은  태인허씨 후손 이씨로 신라왕족 아자개의 양자?

견훤이 태인허씨 후손 아자개의 양자로 있었다. 산내면 운주산은 이사도의 "운주'자사와 관련이 있는지 운주산에 견훤이 세웠다는 왕박암 굴이 있고 중국으로 보내는 토기에 말 돼지 소등에 안장을 달아 보냈다는 유물과 전설이 있다.

운주산 밑의 국가신을 모시는 사직골과 허궁실이란 이름과 일본서기, 삼국사기의 기록인 '기생반숙조의  대산성반란사건'이 남았다.

당나라 운주(산동성)자사  이사도의 친족으로 이씨 성을 가진 자가 신라의 최고 요새지 산내면 운주산 아래 사직골 허궁실에서  한때 왕궁으로 칭했던 부족국가 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후백제 견훤은 광주 북촌 사람으로 성씨가 이씨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정읍 옹칠내(옹동-칠보-산내)지역에서는 후백제 견훤은 지내, 최치원은 금돼지가 그 조상이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도 도강김씨는 도깨비, 권씨는 돼지가 조상이라고 심하게 놀려대는 풍속이 있다.

전주이씨로 보이는 고려 무신정권의 주장 이의방은 태산군사람이다. 그리고  이의방을 죽인  정중부 부자를 태인 허씨 허승이 죽인  사실이 있다.

태인 허씨 시조 묘가 있는 이치마을 위에 지네마을 공동이 견훤의 지내 지렁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아래를 클릭하여 자세한 글을 보자

http://blog.daum.net/nongaak/7090536  

견훤은  태산허씨 탄생 지네마을(蚣洞)인가

 

 

이자겸/이자의-이의방-송승래/송인-송현수-유자광따라 이어져 온 정읍사의 맥

후백제 견훤의 이씨를 왕건이 몰락시켰고  이자겸, 이자의가 궁중세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를 이의방이 계승하여 고려 강종까지 이어지다가  몽고침입시 입암산에서 송군비 장군이 승전하여 군사를 장악해서  송송래,  송인 등 삼벌초 진압세력이 고려말에 이 지역의 임씨, 홍씨, 이씨를  등용시켰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송현수 내각에서 유규의 아들 유자광은 음악, 군사에 능숙한 세력으로 중종반정까지 삼국시대의 궁중악을 정읍이란 이름으로 남게된다.

당시 서민은 궁중악을 모르고 함부로 불러서도 안되었다. 정읍사를 수천개에 이르는 한국민요중 한 개로 보는 풍토가  정읍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정읍의 애향인과  청년학도에게 연구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 답사를 통해 알아낸 사실을 공개한다.

미래의 길고 지속된 연구계승에는 확실한 해답이 밝혀질 것이다.

 

이자겸의 땅  태인 허씨  종중 제실과 묘가 있는 선산으로 고려시대 성역 중국송나라사신 가무향연 접대 삼신산 연못을 이처럼 만들엇다

   

▲ 정읍 삼산동 음성향, 고려 이자겸이 송나라사신을 정읍사 궁증악으로 맞이한 태인허씨 선산이 있는 곳.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중국 사신의 왕래가 유일하게 계속된 가무연향하던 곳. 논을 못으로 복원한 합섬사진 가운데 섬의 산이 있었다. 이 마을을 기로회의 뜻 "자로'라고도 부른다.

기로회는 고려무신 최충헌 시대  유자량 현덕수등이 은거하며 풍류 한림별곡의 노래를 즐겨 정읍사 상춘곡 불우헌곡 시조 태산가로 이어지는 백제가요의 관청 음성서로서 마을이 음성부락이다

 

 

아리랑 3000년 한국음악의 발상지  역사의 유적지  흑치상지 허기  최치원이 세운 최초학당   정읍 칠보 중학교학생이 백제가요 정읍곡을  교가로 부르고 관현악 난타 사물놀이로 3000년  전통을 계승하고있다 

은나라의 비들기소리가 서양 그리스  기독교와 한국의 백제에서 하늘님으로 부른  환웅님 새로  그 비들기소리를 찬송가로 부른 그 유적의 현장  그 태산태수 최치원  율수학당 터  정읍시 칠보면의 무성서원과  칠보초.중학교 학생 그리고 사찰 스님등 청년 주민등이 정읍사3000년 진짜  멜로디 농악 으로 배우고있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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