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평소 존경하던 대구 동산병원 성형외과 과장인 강진성 장로님께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고 다시 한번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평소 존경하던 그분은 준비를 해놓을 테니 빨리 오라고 하셨다. 같이 가겠다는 아내를 겨우 설득해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대구로 향했다.
“하나님 아버지,제가 아버지의 어린 양들인 고아들을 돌본 것을 기억하시옵고 저를 구해주소서. 아버지,제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의료선교회를 설립해 열심히 봉사한 것을 기억하시옵고 저를 살려주소서. 그리고 아버지,제가 아버지와 함께 하고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기억하시옵고 저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택시 안에서 나는 계속 기도에 매달렸다. 동산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신경외과로 가서 간단한 수속을 마친 뒤 검사를 받았다. MRI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기도를 드렸다. 몇년의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지루하게 검사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내 입에서는 이전에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독백으로 흘러나왔다.
“하나님,저를 살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제가 계속 살 수 있다면 목사가 되겠습니다. 제가 죽지 않고 산다는 보장만 있으면 바로 신학원에 입학하겠습니다.”
마침내 검사 결과가 나왔다. 사형수가 집행일을 앞둔 심정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결과를 듣기 위해 담당 의사 앞에 앉았다. 그의 입에서 ‘괜찮다’는 한 마디만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는 무덤덤하게 “뇌에 엄지손톱만한 혹이 있네요”라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곤 확실한 병명은 아직 알 수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울산으로 옮겼다. 자꾸만 절망감이 들었다. ‘역시 뇌종양이 맞구나.’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뇌종양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애써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래,서울대병원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아보자”는 생각을 굳혔다. 집에 오자마자 서울로 연락해 특진을 신청하고 아내에게 짐을 싸달라고 했다. 바로 다음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친구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원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포천의 한 기도원을 찾아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밤을 지새웠다. 다시 서울로 왔다. 내일이면 이제 세번째 검사를 받게 된다. 잠이 올 리 만무였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몸을 뒤척이다보니 새벽 3시가 넘어섰다. 그때 떠오른 생각. ‘교회에 가서 새벽예배에 참석하자. 내가 평소 설교 테이프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아온 김삼환 목사님이 계시는 명성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검사에 임하자.’
역시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 새벽예배에서 목사님이 주신 메시지의 요지는 질병이든,사업이든,무슨 문제든 성령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목사님께서 내 처지를 일고 있는 기분이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교회 지하실의 기도방으로 달려갔다.
목청껏 통성기도를 했다. 기도하다가 죽겠다는 심정으로 기도에 매달렸다. 기필코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겠다는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심정이었다.
“이제 여기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까”
명성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기도실로 들어가 하나님을 부르짖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주님,저는 이제 여기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까!” 저절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가지 힌트를 주셨다. 집에 있는 두 딸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울산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 두 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면서 딸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내가 딸에게 선물을 주고 싶듯이 하나님께서도 내게 선물을 주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주실 선물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성령이 아닌가.
“하나님,사랑하는 두 딸이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성령을 주옵소서! 성령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이셨다. 두번째로 성령을 체험하게 됐다. 그것도 뜨겁고 강렬하게. 부드럽고 포근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몸을 감싸면서 마음에는 기쁨과 평안이 밀려들었다. 방언을 하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나는 교회 매점에서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몽땅 사서 가방 속에 넣었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퍼부었다. 비를 피하기 싫어 그대로 맞았다.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서울대병원 특진 시간에 맞춰 진찰실로 들어갔다. 신경외과 담당 의사가 내 사진을 쫙 걸어놓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아마 선천적으로 뇌혈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한 것은 6개월 후 다시 검사를 해봅시다.” 현재로선 정확하게 진단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뇌종양일 수도,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뇌종양이든 아니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사가 뭐라고 진단하든 나는 이제 그것에 초월해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다시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얘야,의사가 뭐라고 하든 괘념치 말아라. 내가 알아서 할 게.” 그리고 하나님께선 첫번째 성령 체험 때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망각의 은혜’도 주셨다.
나는 진찰실에서 담당 의사에게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주의해야 할 음식은 무엇인지 등 전날까지만 해도 궁금한 게 산더미 같았었다. 그러나 그날은 병 자체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종양이 있는지,혹이 있는지 모두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십 수년 동안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가끔 간증을 할 때만 기억나지 평소에는 전혀 모르고 지낸다. 이게 무엇인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거두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없는 주님의 은혜를 절감한다.
울산으로 내려가 바로 평소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겉으로는 예전과 꼭 같았다. 그러나 내면은 달랐다. 항상 영적인 갈급함에 목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목사님들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다. 수술중에도 항상 테이프를 듣는데 간혹 환자가 감동을 받고서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만큼 설교 테이프를 많이 들은 사람은 없을 것으로 자부하고 있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이 정해졌다. 내가 하나님께 약속했듯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의 길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잠깐 하나님 곁으로 다가서는 듯하던 아내가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갔다.
‘비지니스 교회’개척 성경적 경영 전수
“사업가들에게 종교적 안식을 주고 비즈니스에 관한 각종 정보도 제공하는 전문교회가 울산의 한 의사 겸 목사에 의해 등장했다. 울산에서 성형외과를 개업하고 있는 정일봉 목사. 그는 최근 울산 삼산동에 ‘울산비즈니스교회’를 개척하고 IMF 시대를 헤쳐나가느라 지친 사업가와 창업 희망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내가 울산에서 울산비즈니스교회를 세운지 얼마 안됐을 때 경향신문에 난 박스기사의 앞부분이다. 이런 내용의 기사는 경제지와 지방지에서도 나갔다. 목사가 되고 난 뒤 나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4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비즈니스교회를 세운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나누면서 성경적 경영을 자연스럽게 전수해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당시 비즈니스교회는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은 이 연재의 첫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한 마디로 악전고투였다. 아내의 허락을 받기 위해 억지로 ‘쇼’까지 연출했다. 당시 내가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울산에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교수진을 비롯,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울산신학교에 이어 예장총회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다음 1998년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울산노회 소속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이후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교회 개척이었다. 울산대 후문 앞에 30여평 정도의 공간을 빌려 십자가를 세우고 ‘예닮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울산대 학생들과 인근 보육원 원아들을 주타깃으로 삼았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 열심히 교회와 교인들을 섬겼다. 힘들긴 했지만 교회가 제법 자리를 잡아갔고 보람도 있었다. 그때 친구인 전도사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고 교회를 넘겨줬다.
그리곤 곧장 울산의 고급아파트가 밀집한 지역의 상가에 ‘좋은교회’를 열었다. 한 명의 교인도 없었지만 매일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시간 나는 대로 아파트촌을 돌며 양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4개월이 지나도 교인이 10명을 넘지 않았다. 내 능력의 한계인지,하나님의 뜻인지 심리적 압박감만 늘고 병원 운영도 잘되지 않았다. 매월 200만원이 넘는 월세도 점차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할 수 없이 교회문을 닫았다.
이후 몇 달 동안 기도하다가 다시 울산 변두리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가 다른 목사님에게 넘겨주고 비즈니스교회를 열었다. 비즈니스교회는 70여평의 공간에 반은 예배실,반은 회의실로 꾸몄다. 매주 50명이 넘는 울산지역 실업인들이 모여 비교적 알차게 운영됐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의료봉사를 다니면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 중 영·호남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호남 출신으로 영·호남 갈등을 항상 마음에 뒀던 나는 영·호남 화합을 위한 음악회와 체육대회 개최,동서 기독인 만남의 장 등을 열어 두 지역 주민들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지역에서 권투대회를 여는 등 지역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그때는 인터넷 사업에 매력을 느껴 칭찬일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발,사회의 칭찬운동을 주도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MBC의 ‘칭찬합시다’와 연계돼 개그맨 김용만씨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너는 목사가 아니더냐?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너의 처지에 맞다고 여기느냐? 다시금 너를 돌아보거라.”
어느 이른 새벽,하나님의 노여운 음성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울산에서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하던 때였다. 과연 그랬다. 곁길로 너무 많이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일들을 너무 많이 벌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울산을 떠나자. 서울로 가서 새롭게 출발하자.’ 아내도 내 뜻에 반대하지 않았다. 10년 이상 살며 정들었던 울산을 떠나 2001년 서울로 올라왔다. 소망교회에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압구정동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병원에 동업자로 참여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경제적 부담이 큰데다가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지 않다보니 집안 분위기가 점점 나빠졌다. 거기에다 다소의 부채도 생겼다. 빨리 돈을 벌겠다는 강박감으로 또 다시 무리수를 두었다. 인터넷 광고와 여성잡지 출판사 운영에 개입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집안이 정도로 점점 어려워지자 아내의 모습이 바뀌어갔다. 아내가 절대자인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남편을 원망했을 아내가 오히려 격려하면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아내는 매일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참된 딸이 되고자 서원했다.
변한 아내의 모습이 내게 용기와 지혜를 주었다.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일단 성형외과 의사로 본분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사당동에 정일봉 성형외과를 열었다. 울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눈 성형에서 인정을 받았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영적으로도 제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숙제가 떠올랐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주의 종이 되겠다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것이었다. 일단은 목사님들의 건강 관리에 도움을 주자는 생각이 스쳤다. 목회자 건강세미나를 시작했다. 반응이 좋았다. 노 목회자들의 처진 눈꺼풀을 무료로 수술해주는 일도 시작했다.
그러자 소망교회의 주일예배에만 참석하던 내게 개척교회의 새벽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영적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영적 스트레스를 받던 상태에서 새로운 활력소를 얻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기도와 성경공부,그리고 교회생활에 헌신적으로 나섰다.
나는 지금 선릉역 옆에서 정일봉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 많은 병원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내 병원은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마음의 짐을 안고 있다. 의사이기 전에 목사인 내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어려운 목회자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나는 지금 ‘ABBA(아바)선교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의 건강을 돌보면서 병든 사람들에게 전인치유를 해주는 또 다른 하나님의 사역을 하겠다는 뜻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내 분신인 두 딸 유진 유빈에게 무한한 사랑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