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정일봉 의사 1

도심안 2011. 1. 21. 23:24

 


“이보게,오랜만에 술 한잔 하세.”

“아니,일봉이 자네가 술을 마신다고?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설마 농담이겠지.”

그럴 수밖에. 몇 년째 술자리 근처에도 가지 않던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했으니 그로선 당연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네,진담이네. 그리고 내 정신도 멀쩡하네. 자네와 너무 소원해진 것 같아서 술 한잔 하자는 것이네.”

그날 밤,몇 년만에 처음으로 소주잔을 들었다. 흠뻑 취하도록 마셨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면서도 취하기 위해 악을 쓰고 마셨다. 그리곤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해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마지막 카드를 빼든 것이다.

“당신,죽으려고 작정했어요? 이런 식으로 해야 일이 풀리는 줄 알아요? 턱도 없어요!”


칼날처럼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에 눈을 떴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 집 안방이었다. 소리치는 사람은 아내였다. 어젯밤 만취 상태서 운전대를 잡은 것과 앞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하면 브레이크를 밟았던 것이 어슴프레 기억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거실로 나왔다.

“여보,나 좀 봐주소. 당신이 알다시피 거칠고 막가는 내 성격이 집사 정도로는 감당되지 않니 목사가 되어야겠소. 나 신학교 안 가면 정말 큰 일을 낼지 몰라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이해해줘요,예.”
아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마침내 내가 소원하던 신학 공부를 하게 됐다. 꿈에서도 그리던 목사의 신분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긴 했지만 내 전략은 적중했다. 뒤에 밝힌 아내의 말에 따르면 그날 밤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차문 바깥으로 다리를 내놓고 자고 있었고 이를 본 주민이 발견해 아내에게 알려줬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나는 목사가 됐다. 의사니,성형외과 전문의니,박사니 하는 호칭보다 목사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했던 내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은 이처럼 쉽지 않았다. 주의 종이 되고자 1년을 넘게 간절하게 기도했던 내가 응답을 받기까지는 이처럼 파란을 겪었다.

요즘 내 이름 석자 앞에는 ‘목사 의사’라는 호칭이 붙는다. 나는 이 호칭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있긴 하지만 일단은 현 상태에서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다. 주의 종으로서 너무나 미흡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겉으론 잘 지내고 있다.

대신 나는 기도하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께 나의 온 마음을 열어 기도하고 있다. 지금은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하나님의 떳떳한 종이 되겠노라고 가슴을 뜨겁게 데워 기도하고 있다. 사실 이런 상태서 나의 신앙 이야기를 한다는 게 멋쩍고 부끄럽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나의 불충을 교훈 삼아 다른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 약력=-광주 출생,광주일고,조선대 의대 졸업.울산신학교,예장총회신학대학원 졸업.울산의료선교회 창립,울산양육원 울산구치소 등서 장기간 사회봉사. '칭찬합시다'(MBC) '영육칠오'(CTS) '건강칼럼'(극동방송) 등 방송진행.현 ABBA(의사목사연합) 대표.현 정일봉성형외과 원장

 

어린시절 가정불화로 무절제한 생활



나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옆에서 ‘정일봉 성형외과’라는 간판을 달고 의료 영업을 하고 있다. 눈 성형에 이름이 좀 나 있어 비교적 환자들이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사는 데는 별 걱정이 없고 적당히 사회봉사도 하고 있다. 자비로 목회자 건강세미나도 열고 노 목회자 부부의 처진 눈꺼풀 성형도 무료로 해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목사이다. 목사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서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직분이다. 그런데 그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온전할 리 없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을 갖고 산다. 의사라는 직업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다소 억지스러울지는 모르지만 이 직업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다. 앞으로 평생 의사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지,아니면 단 며칠 후에 다른 일로 새로이 하나님의 사역을 맡게 될지 그 또한 그분의 뜻에 맡기고 일단은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극명하게 대비된 삶을 살았지 않나 생각한다.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의 내 인생이 시련과 혼돈의 계절이었다면,그 이후는 여유와 안정의 계절이었다. 나는 신앙을 갖기 전까지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술과 담배,노름 등 무절제한 생활로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 가슴 속 깊숙이 사랑으로 찾아온 뒤부터 그 전의 모든 악습을 깨끗이 털어내고 그 자리에 남을 이해하며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온유함으로 채웠다.
나는 1951년 광주광역시(당시 전남 광주시)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누가 봐도 좋은 조건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건 허울이었고 내용은 엉망이었다. 아버지가 의사이다 보니 경제적으로야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정에는 언제나 짙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야기는 안 하고 싶지만 우리 4남매의 성장기에 워낙 영향을 강하게 끼쳤기에 잠시라도 언급하겠다. 아버지는 술과 잦은 외도,거기다 폭력까지 곧잘 쓰셨다. 어머니는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참지를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은 언제나 공포 분위기였고 우리는 항상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가출이었다. 어머니는 화가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니 우리 4남매는 부모님과의 좋은 추억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우연히 남동생의 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매일 집 뒤의 십자가를 보며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기도한다.” 처음엔 섬뜩했으나 이내 내 생각과 꼭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안 해줘도 되는 응답을 하나님께서 해주셨다. 내가 광주일고 1학년에 들어간 해,아버지는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셨다. 그것도 어머니가 외갓집에 간 사이에 혼자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탈선 일보직전 하나님 알고 회개



“아버지,살아계실 때 어린 자식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저희도 그토록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나 지금 저는 절 낳아주신 아버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분명히 아버지가 저희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고 무척 사랑했으리라고 믿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평온과 안락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나의 전부인 하나님 아버지,저의 생부를 긍휼히 여기시어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나는 가끔 밤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누군가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했던 말을 실감한다. 돌아가신지 4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버지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어릴 때의 가정환경 탓인지 내 청소년기는 울분과 반항으로 점철됐다. 주위에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참지 못했다. 특히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온 몸으로 싸웠다. 그러다보니 폭력서클 친구들과 곧잘 부딪쳤다. 얻어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나는 울분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운동에 몰두했다. 태권도와 유도도 모자라 권투도장에까지 다니며 샌드백을 두드렸다. 가까운 친구들도 주로 운동을 하거나 아예 공부는 포기하고 곁길로 빠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학교 성적은 비교적 괜찮았다. 이 점에 대해선 나보다 친구들이 더 못 믿었다. 처음에는 운으로 여기던 친구들도 나중에는 실력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일봉이놈,머리 하나는 좋다”고들 말했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거기다 교과서 대신에 수필집이나 사상 서적 등을 읽기 좋아해 말솜씨도 좋았다. 몇몇 친구는 “일봉이 저놈,공부만 좀 하면 후에 국회의원 정도는 충분히 할 거야”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말 또한 기분 좋았고 나 자신이 꽤 똑똑한 줄 알았다. 나중에는 착각인 줄 깨달았지만.
나는 항상 하나님께 ‘찍힌’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내가 교회에 나가고 거기다 목사까지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 완전히 무릎 꿇고 그분 섬기기를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신앙인이 되었으니 일찌감치 그분에게 찍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기에 탈선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정상적인 길을 간 것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개입돼 있었다. 그분은 못나고 부족한 나를 쓰시기 위해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토록 하고 지역 명문인 광주일고를 거쳐 조선대 의대에 입학하게 하셨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끄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집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집안 분위기야 어떻든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으나 돌아가신지 불과 2,3년 후 우리 가족은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특히 내가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는 거처할 집도 없어졌다. 끼니를 거르는 게 예사였고 월셋방의 방세를 못내 거리로 내쫓기기도 했다. 우리 4남매도 어려웠지만 특히 어머니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한때는 의사 부인으로 ‘사모님’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에 부족함을 못 느끼고 살았던 분인데 자식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주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으니 심정이 오죽했으랴. 요즘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출처 :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함께 있어
글쓴이 : 차니미니파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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