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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옆에서 ‘정일봉 성형외과’라는 간판을 달고 의료 영업을 하고 있다. 눈 성형에 이름이 좀 나 있어 비교적 환자들이 많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사는 데는 별 걱정이 없고 적당히 사회봉사도 하고 있다. 자비로 목회자 건강세미나도 열고 노 목회자 부부의 처진 눈꺼풀 성형도 무료로 해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내가 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나는 의사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목사이다. 목사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로 서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직분이다. 그런데 그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온전할 리 없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을 갖고 산다. 의사라는 직업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다소 억지스러울지는 모르지만 이 직업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다. 앞으로 평생 의사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지,아니면 단 며칠 후에 다른 일로 새로이 하나님의 사역을 맡게 될지 그 또한 그분의 뜻에 맡기고 일단은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극명하게 대비된 삶을 살았지 않나 생각한다.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의 내 인생이 시련과 혼돈의 계절이었다면,그 이후는 여유와 안정의 계절이었다. 나는 신앙을 갖기 전까지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술과 담배,노름 등 무절제한 생활로 지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 가슴 속 깊숙이 사랑으로 찾아온 뒤부터 그 전의 모든 악습을 깨끗이 털어내고 그 자리에 남을 이해하며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온유함으로 채웠다.
나는 1951년 광주광역시(당시 전남 광주시)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누가 봐도 좋은 조건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건 허울이었고 내용은 엉망이었다. 아버지가 의사이다 보니 경제적으로야 부족함이 없었지만 가정에는 언제나 짙은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야기는 안 하고 싶지만 우리 4남매의 성장기에 워낙 영향을 강하게 끼쳤기에 잠시라도 언급하겠다. 아버지는 술과 잦은 외도,거기다 폭력까지 곧잘 쓰셨다. 어머니는 매사에 신경질적이고 참지를 못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은 언제나 공포 분위기였고 우리는 항상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머니의 가출이었다. 어머니는 화가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니 우리 4남매는 부모님과의 좋은 추억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우연히 남동생의 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매일 집 뒤의 십자가를 보며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기도한다.” 처음엔 섬뜩했으나 이내 내 생각과 꼭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안 해줘도 되는 응답을 하나님께서 해주셨다. 내가 광주일고 1학년에 들어간 해,아버지는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셨다. 그것도 어머니가 외갓집에 간 사이에 혼자서 외롭게 하늘나라로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