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아니면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또 하나의 문명인가?
이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네바강 하류 습지에 상트페테르부르그를 세우고 이 '유럽으로 향한 창'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유럽화를 밀어붙였던 이후로 러시아 지성사의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표트르대제가 추진한 서구화 개혁정책은 러시아 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그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 지성계와 사회를 양분하는 기준이 됐다. 서구적 발전모델이냐, 아니면 러시아 고유의 가치냐 하는 논쟁은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구체화됐고, 이는 2008년 지금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러시아의 절대군주인 표트르대제는 강대국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하며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직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에게 다가가 직접 가위를 들고 수염을 잘라버렸다. 경찰국장과 마차를 타고 가다 강의 다리가 망가진 것을 보고는 다짜고짜 경찰국장에게 매질을 가한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어린이 폭행사건을 TV에서 보고 일산경찰서문을 박차고 들어간 우리 대통령의 행동은 얼마나 온건하고 비폭력적인가!)
이런 근대화 프로젝트로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는 서구사회의 열강으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이후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하려는 러시아의 노력과 유럽의 견제, 좌절 뒤 러시아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노선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러시아의 발전사이클의 원형이 됐다.
(푸틴 정부 출범이후 서구의 지원사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등의 '색깔혁명', 나토확대와 부시정부의 MD확산 시도, 에너지자원을 무기로 한 러시아의 반격 등의 과정을 보라)
다시 한번 러시아는 유럽인가, 아니면 아시아인가? 하는 질문을 러시아의 엘리트층에게 던져본다면?
보통 '러시아는 유라시아 국가로서, 또 하나의 문명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러시아 지성계의 고민을 문화사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영국의 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가 쓴 '나타샤댄스'다.
본문 838페이지, 각주까지 합치면 장장 1015페이지에 달하는(번역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이 '징기스칸의 후예들'이란 장이다.
징기스칸의 충성스런 장군인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1237년 키예프 공국을 공격한 후 3년동안 노브고로드(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 중간에 있다)를 제외하고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속수무책으로 몽골군에게 항복을 한다. 이후 250년간 지속된 몽골의 지배는 '제3로마제국'의 신밈임을 자랑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로 부르며 러시아 역사상 이 250년의 시간은 있어서는 안되는 암흑의 시기였고, 야만적인 몽골 제국이 찬란한 러시아 문명에 끼친 영향은 손톱만큼도 없다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당시 세계제국을 이뤘던 몽골의 과세,행정,군사 체계는 러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러시아가 유럽과는 다른 절대적 전제주의를 확립하는데 기초가 됐다.
250년간 지속된 몽골의 지배는 1552년 이반대제가 카잔 한국을 무너뜨림으로서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반대제는 이를 기념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바실리 성당(붉은 광장의 상징인 그 성당)을 세우도록 명령해 1560년에 완공됐다.
이렇게 러시아의 근대사는 '아시아적인 것'을 배제해 유럽문명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많은 서유럽의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 그랬듯 러시아에서도 아시아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과 동경이 싹트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작가일기'에서
" 유럽에서 우리는 늘 추종자이자 노예였지만 아시아에선 주인이 될 수 있다. 유럽에서 우리는 타타르였지만 아시아에선 유럽인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 우리의 문명화의 사명은 우리의 정신을 고무하고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라고 썼다. 러시아는 아시아에서 유럽적인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크림전쟁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오토만제국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적 대의를 져버린 영국과 프랑스에 배신감을 느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러시아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묘사하며 서구적 가치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19세기는 서구문명이 쇠진해가는 문화적 역량에 새로운 활력소를 찾기 위해 아시아나 아프리카같은 미지의 세계에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 마네,모네,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의 판화에 열광하며 그 기법과 정신세계를 자신들의 작품에 접목시겼다. 고갱은 아예 예술활동의 무대를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옮겨가 원주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훗날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미술품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라이프니츠나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바그너, 괴테 등 철학자, 예술가들은 모두 인도철학 불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이 보기에 아시아는 이미 약발이 다 한 서구문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문화적 원천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와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은 유럽에 비해 이미 시베리아를 점령한 러시아는 한 나라 안에 유럽과 아시아을 품고 있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19세기 러시아의 사상가, 예술가 들에게 아시아, 그중에서도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해 추상미술의 원조가 된 칸딘스키는 원래 인류학자가 될 생각이었다. 요양차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코미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정령과 무당, 집단 군무 의식에 대한 전설과 기록을 접하고 코미지역의 샤머니즘에 금방 매료됐다. 샤머니즘의 세계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그대로 반영돼 있다.
칸딘스키 작 'Colorful life'(1907) 뒤에는 교회가 보이지만 나무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