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딸 정의공주가 정읍 허장군당에서 본 한글 '두언전 (竇諺傳)'
한글성경 두언전 竇諺傳 정의공주. 수양대군. 임영대군. 최항. 안지, 연고지 활동지 대장금 마을
한글과 음악 의학의 발상지 대장금 마을의 한글창조 비밀역사를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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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마을의 당산 고인돌시대 토탬 거북을 상징하는 거대한 원시 신앙건축 거북 당산바위 신당에
한글로 기도하는 로마 시대 같은 산제당 언문책이 명인전 무속이름으로 남아있다
한국은 한글 때문에 기적의 발전을 이루었다
로마제국은 한글같이쉬운 로마글자로 노예천인까지 글을 알아서 민주주의를 하였고
동양 군주는 고의로 백성이 모르는 어려운 한문 5만자를 독재정권 비밀문서로 사용하여 부정부패 독재국가에 정권유지 암호글이 목적이였다
그래서 한글같이 쉬운 문자를 부정하고 사용 도 금지하여 누구도 사용을 못하고 있었다
최만리의 한글반포 반대하는 이유는 '한글은 예전부터 있었던 글 귀족 양반 만의 사용 글씨를 서민 노예까지 알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 내용이였다
세종대왕의 승지로 있었던 권채의 이모 홍씨 외손자 안맹담에게 세종의 큰딸 정의공주를 중매 하여 안맹담에게 시집왔는데 시어머니 허씨 할머니 홍씨로부터 알게된 사투리글자 한글을 접하게 된다
757년에 당나라 에서 귀국하여 세운 허기궁전의 마을인 허궁실에 허기장군 신당 굴이 있었다
정읍 산내면은 그곳의 허장군 신당을 종교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그 곳은 신라 최치원 신선과 거북을 신으로 여기고 하늘의 매미를 신으로 신봉하는 무속 토탬 종교였다
그곳에서는 서양 기독교처럼 쉬운 글자로 찬송가 성경같이 아무나 읽고 쓰고 하늘의 매미와 땅의 거북을 신으로 여기는 김수로왕 신화 같이 거북을 모신 산제당으로 내려오다
(이후에는 불교 유교의 탄압으로 사라지고 씨름하고 농악치고 정바치 경읽기로 8.15 해방후에 김영선 노인이 주제하였다)
정의공주는 이것 을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알리자 세종은 급히 수양대군을 파견하여 안맹담과 호족 송인수 그리고 악공 허오를 알고 음악에 뛰어난 여자를 세조후궁 근빈박씨로 맞아 들인다
단종왕비는 세조의 친구 송인수의 딸로 들이고 세조암살 미수 사륙신사건일어나서 안맹담 그리고 허오등이 세조의 충신으로 난정공신 일등으로 된다
그리고 국악으로 종묘제사를 행하고 한글을 노래 월인 천강지곡을 짓고 가장 뛰어난 우리한민족 예술 가무기녀 박씨를 후궁으로 들인다
그 세조후궁 근빈박씨는 민족주의 임금 연산군시대 최고 실력의 춤을 보였고 그 후손 호성군이 임진난에 평양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이곳의 신당은 가야망국으로 허세신이 백제로 망명하여 정착한 곳이였다
그 허세신 후손 허기장군이 측천무후 대당시대 동로마 토번국 터어키 인도 몽고를 점령한 고선지장군과 와 같이 활약하고 유일하게
살아난 한국의 장군이 다수 포로와 악공 보물을 가지고 '동방예의지국' 이름으로 귀국해 정착하고 구자라트글자 로마글자 같이 한글을 만들어
학당을 세우고 여기 허장군 신당에서 한글성경책 명인전 이름으로 변하여 전한다
측천무후는 로마제국의 교육을 모방 계급보다 능력을 중시하고 음악 예술크게 장려하여 구테타 세력이 당 최대의 영토로 서역을 점령하였다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는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아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안록산을 버리고 양귀비 오빠 양국충으로 권력이 넘어가자 안록산이 구테타를 이르켜서 전국을 장악하고 황제가 되었다
허기장군은 당나라 서쪽 지역의 군장으로 반격작전으로 당현종을 구출하여 당현종의 수양아들로 이씨 '이기'라는이름으로 신라국 대사관으로 보내어젔고 신라에서도 후에 당나라 대사로 보냈다
최치원 역시 당나라 황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신라국 대사관으로 귀국하고 또 당니라사신으로도 행적이 잇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이상한 문자를 척척읽고 해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에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허장군 굴 즉 허왕두굴 성경책이 한글책이였나 보다
당현종의 어머니 성씨가 두씨이다
태인허씨 족보에는 여기 허장군 신당을 허왕두라고 부른다
당현종이 억울하게 암살된 어머니 두씨황후 명복을 비는 성경을 허기장군이 당나라에서부터 한국인 군사들이 읽을수잇고 또 귀국하여 한글로 사용한것으로 여겨진다
한글 때문에 잘사는 나라 한글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한글날 음주가무로 노는날 ? !!
중국에서는 한문때문에 한글나라 북한보다 도 신학문교육이 늦어지고 한글사용 조선족이 학문의 선두를 달리고 있어 고민이단다
한문으로는 이터넷왕국이 전혀불가능하다
30년후에는 한글이 세계공용어가 되어가고 50년후에는 한글한국어로 통일되는 날이 확실하다
유자광이 데려와 중종의 1등 어의가 된 대장금 한글로 배운 지헤실력 그 원인은 한글이였다
진시황제 진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황제,등 중국황제의 불로초등 치료 약초를 재배하고 그것을 최초로 대장금의 조상 최충헌 며느리 최우시대 '대씨부인' 세력시대 ‘향약구급방’ 책을 출판되었고 대씨기 대대로 장금산과 수침동 산에서 주로 약을 체집하여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책을 만든 산내면 너디사람으로 세종대왕의 승지 권채와 그 부하 유호통 노중례가 이곳 장금산에서 사투리로 약초 이름 기록 한글문자 창조에 수양대군이
참여하여 판소리 농악. 향약. 한글이 모두 장금산에서 완성되었다
정의공주 시댁 제현향(재인동) 마을의 거북당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안씨 허씨 이씨 3성이 산다고 기록되어있다
실존인물 대장금은 서낭당에서 장금산에서 '향약월별 채취(鄕藥採取)'하는 일이 장금산 대부분 주민의 하는 일로서 수운 한글로 교육
대장금이 약초 채집하는 숲길 가에 한문 이두문 한글표기 1500가지 약초를 심어서 의약 한글 국악 판소리의 근본 교육 지역의 역사고증을 현지에서 한 눈에 보고 이해하는 학습 관광을 하게 기획한다
대장금 마을에서 살았던 세종대왕의 승지 권채가
부하 유호통 노중례 박윤근과 향약집성방 책
정읍 장금산 주민들이 알기쉽게 약초를 한국이름으로 월별로 구별하여 써주어 만든 책 여기 지은이 의원 유호통 은
양영대군. 수양대군의 전문의사였다 이책을 누나 정의공주가 궁녀들과 비밀리 연구 한글을 만들었다
한문 이두문 한글표기 150가지 약초 예
중국약명 - 향약채취월령 이두문 - 고어 - 한글
萆麻子 - 阿次加伊 - 아가리 - 아주까리
蟾蜍 - 豆何非 - 두허비 - 두꺼비
麥門冬 - 冬乙沙伊 - 겨 사리 - 겨을사리
그 세종대왕 당시 집현전에서 직제학, 대사성으로 이마을 사람 권채가 세종에게 전래 한글정보를 알려서 그 자료를 큰딸 정의공주가 비밀리에 만들어 수양대군이 현지답사 완성하여 반포했다
즉 아주까리 중국 이름 피마자(萆麻子)를 이두문자 아차가리(阿次加伊 ) 에서 옛문자 '아가리' 그리고 한글로 '아주까리' 라고 한글문자로 만들어 기록하였다
인도 구자라트 제국이 터어키와 중국을 지배하였을 때에 사용한 글자가 한글문자
그래서 지금 한국기업의 인도진출 공업단지를 구자라트로 현재 건설중이다
한글의 발상지 인도 구자라트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 태인 허씨 망명족에 허나라( 許國 )이 터어키 접경에 변장으로 지키다가 755 안록산의 난에
당현종을 구출하여 '동방예의지국' 으로 신라에 귀국 허씨의 땅 경북청도 . 전북정읍. 부안 . 백제세대 옛 땅를 찾아 살고
서양교육 학교 향학당에서 이런 한글문자로 약초 이름을 쓰다가 수양대군이 여기 와서 배우고 한글문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글을 처음 사용한 정읍사람들은
용비어천가작자 - 안지. 최항, 월인 천강지곡작자- 수양대군,
백제가요 정읍사를 한글로 번역한 유자광, 상춘곡 한글시 정극인, 소설 홍길동전 홍길동과 허균, 시조 태산가에 이항. 양사언,
모두 정읍 장금산 근처 사람이나 이곳에서 머물다가 배워 한글을 사용했다
정읍 장금산 지역에 연고가 없이는 한글을 사용한 예는 거의 없었다
대장금 마을에서 로마교육 교과과목 전투-손자병법, 웅변(판소리) 화령도. 적벽가. 의원. 한약 . 농악. 한글. 향학당. 교육등등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을 구성하여 열거하여 적어 본다
BC 210년 중국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해오도록 조선에 불로초 구하러 보낸 서시(徐市)는 진나라가 망하여 귀국을 못하고 허왕굴 앞에 진시황제 재림하여 타고나갈 5두마차 유적이 남아 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 케러보낸 서시가 굴앞에 오두마차를 대기하고 진시황제 재림을
기원하는 곳이 허기 장군 재림 기도장으로 허옥보굴(許王寶屈)로 한국한약 발생지로 그 자료가 될수도 있다
허기장군 허왕보굴의 전설과 제사 절차 상상도
백제가 망하고 당나라 측천무후 황제의 심복 허경종의 도움으로 군사 군장으로 있다가 터어키 땅에 변장으로 세력을 키운 '허기(이기)' 장군이 755년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서 피난하여 온 당현종을 구해주어서 ‘신라는 동방예의지국’ 이라는 당현종 친필이 쓴 글씨와 당나라 최고 미녀 악공 기술자 보물등을 모두 갖고 개선장군으로 귀국한다
백제시대 고향땅인 정읍시 산내면 장금산에 정착하여 허장군의 후손이 호족으로 정착 887년 허사문이 당나라 교포 최치원과 장보고 후손이 찾아와서 정착하여 살게하고 태인허씨 후손 이자의 이지겸 통치시대 원나라에 밀려난 송나라 망명 귀족 송씨를 이곳에서 정착시키어 고려 궁중세력 사병 양성하고 군사훈련지로 1170 고려무신정권 이의방 허승에서 조선시대 동학군까지 국방무술 향학당교육은 이곳 사람 무술로 지탱했다
원나라 황제의 병을 고친 설경성 의원이 살았고 한국 최초 의학책 향약구급방 한약책이 고려 최씨정권시대 1236년 대장금 성씨 대씨 부인이 최우의 부인으로 있을 때 출판되고 금산사 금구를 이의방의 고향이라고 하여 군으로 승격했다
고려말 허중민 어의가 있었고 조선시대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권채 허준의 연고지로서 중종의 의녀 대장금의 고향 땅이다
고려 때 남양 홍씨 홍규가 자기 딸을 몽골제국에 공녀로 바치길 거부했다가 쇠몽둥이로 구타당한 바 있고, 그 홍규의 딸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 홍씨는 몽골제국 공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궁에 들어와 살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몽고가 약한 틈을 보고 나중에 기철을 죽이고 원나라를 반대하는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홍규는 같은 익산사람 송송례와 삼별초를 움직여 최충헌의 손자 최항 그리고 김준 임유구와 그 일당을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년 만에 끝나게 되었으며,
1274 홍씨 홍규와 여산송씨 송송래와 송분, 송인이 합세하여 그 바탕에 고려 충열왕이 임금이 되어 공민왕 때 까지 平和의 時代로 宋氏, 林氏, 洪氏, 蔡氏, 등이 합세한 고려정원이였다
1353 공민왕이 집권하여 홍씨들이 사는 정읍 산내 장금산 너디 대장금 마을은 임실(구고)현과 태산(정읍)현과 접경지역이다
그 이유는 공민왕 어머니 홍씨 고향 장금산 아래 너디 마을인 구고현과 태산현. 두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준다
그러다가 1359 홍건적의 침입으로 이성계와 권희 이방실 안우등이 합세하여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그 힘으로 중앙집권 세력을 장악하였고
고려 우왕 때에 또 다시 왜구의 침입으로 홍규와 이성계가 정읍 고부, 태산,을 거처서 지리산에서 1380 왜장 아지발도 대장을 사살하는 대승전을 이루니 더욱 커진 태산군 향학당 훈련 세력으로 이씨 조선창업 세력이 된다
1371 이성계는 명덕태후 홍씨 계보 우왕 창왕을 죽이고 자기와 가까운 동족 태인허씨 친족계열 인천 이씨 공예태후 후손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고 차후에 이성계가 조선 태조가 되었다
공민왕이 몽고와 친한 송씨 권씨 허씨 족을 모두 숙청할 때에는 이곳 사람 송인의 아들 송안이 함흥으로 도망하여 이성계 부하로 숨어들어 가서 함경도에서 부터 이성계를 따라서 활동, 지리산 황산전투와 공양왕 때 최영장군과의 이성계 간의 전투에서 이성계 군사 군악대장으로 음악전투신호로 1388년 승리하게 된다
이때에는 반대로 홍씨 세력은 숙청을 피하여 이곳 정읍시 산내면 너디 마을과 . 임실 순창 근처 산간 연고지에서 숨어서 살었다
권근의 아우 권우는 이곳 홍씨의 사위로 후에 세종의 스승으로 변계랑 정인지등 72인을 가르첬다
충녕대군(세종)의 스승 권우 아들 권채(1399~1438) 너디마을 홍씨 외가집 가문에서 태어난다
권채가 집현전 직제학 대사성에 근무할때에 세종대왕이 고려시대 ‘향약구급방’ 책을 개선 ‘향약집성방’ 책으로 크게 확대 출판하는데 권채가 의원 유호통 노중례 박윤근을 전속으로 데리고 출판하였으며 유호통은 양영대군과 수양대군의 병을 치료하여 상을 받었고 박윤근은 이곳 산내 사람이였다
권채 유호통 노중례가 만든 책 향약구급방 향약집성방에 기록된 중국어 약초 한문이름을 한국말 소리 이두문자 표기로 쓰다가 원래 사용한 몽고 인도 터어키 문자를 한글문자로도 사용한 사투리 소리표현 글자가 한글창조의 첫 길이 여기 장금산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수양대군이 향악(국악)과 향약(의학) 한국말 소리를 표기 한글창제를 명나라가 알지 못하게 세종의 비밀 연구지시를 위한 답사를 하였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한글소리 문자자료를 누나 정의공주와 함께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었고
모든 최초한글은 시, 소설, 시조, 가요, 향가, 판소리, 등 정읍 향학당 에서 시작 되어 있었다
그리고 권채가 구성한 집현전을 수양대군이 이어 받아 그 인맥으로 1452 특히 단종왕 시대 정읍인맥 송인수 유자광 부친 유규 홍길동의 형 홍령 세력으로 단종내각에 참여 한다
수양대군의 원래 반대파 하위지 등 사륙신의 구테타 발각으로 여기서 단종을 모신 대맹례가 태맹레(太孟禮) 로 변성하여 함경도 가서 살았고
그 후에 유자광이 함경도에 자주가고 대장금마을 사람 유자광의 세력으로 태맹레(太孟禮) 일부 후손이 고향을 찾아 산내면, 산외면 종산리에 살았다
대장금은 장금산 서낭당 의녀 가문으로 약초관리 의녀로 내려오다가 영특하여
연산군시대에 유자광의 직속 부관으로 너디마을 사는 홍경주가 군부 벼슬을 맡아서 중종반정에 성공하여 유자광 몫 왕비로서 홍경주 딸이 희빈 홍씨로 입궐 한다 이때에 고향친구 희빈 홍씨 친족 홍침(洪沈)과 대장금이 친하게 지낸다
중종의 후궁 희빈은 유자광의 힘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유자광 벼슬이 ‘부원군’으로 올랐던 아래 기록이 있다
이때 같은 박원종의 수양딸이 중종 후궁 경빈박씨 유자광의 수양딸이 희빈홍씨 였다
'세조(世祖)에게 인정을 받아 녹공(錄功) 되었고, 부원군(府院君)에 이르렀다'(중종실록 10년(1515 ) 9월 8일)
유자광은 서자라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일 수가 없어서 심복 홍경주의 딸로 종종의 후궁 희빈이 되었다
유자광 고모부 홍령의 친족 홍경주와 그 장형 홍경림의 후손이 이곳 태인현의 홍씨 집성촌에 후손 홍성대 등이 살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태조 왕건의 사위 허사문, 공민왕 모친 명덕태후, 단종왕비,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 등 대를 이은 왕비들의 교육을 맡아 양육하는 고을 이였기에 너디마을 입구에는 홍살문(紅門)과 영문(營門)마을 이름이 있고 장금산 서낭당집이 있고 또 음악악공이 사는 ‘재인동(才人洞)마을이 있는 누평현 또는 돌평현의 고려 군청 소재지였다
중종의 노환을 치료하는 시기에 장수노인의 비결을 보려고 수차례나 장금산 대장금 고향 마을의 사람 100세 노인만을 집요하게 서울로 올라오게 전라관찰사에게 독촉하였다
연산군시대 부터 중종시대까지는 정읍사람 유자광(옹동) 송세림 (칠보) 홍경주(산내)등등 태인현 사람들이 궁중 수라간에서 의술치료을 의녀 인선 차출을 장악한 세력이였다
이 마을 사람 홍령은 홍길동의 형이 되며 유자광 고모부로서 단종 왕을 모시다가 영월에서 죽었고 이때 대장금의 친족 대씨들이 함경도로 도망하여 태명례 남원태씨 시조로 살고 있다
유자광이 함경도에가서 태명례로 부터 명태와 전복요리를 연산군 수라상에 올려서 태명례 이름 '명태'라고 부르고 대장금이 요리를 발전시킨다
유자광이 연산군시대 궁중 의약과 요리 담당 사옹원장이였던 유자광이 고향에서 어린 대장금이 수라상이 무거워서 힘이 들어 하므로
수라상의 무거워 둘로 나누자는 대장금 어린 궁녀 의견을 연산군에 전하였다가 유자광이 아래와 같이 국문을 당하여 으로 죽을 뻔하였다
연산 10년(1504) 기사
음식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11년후 중종 10년에 대장금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 난다
"우선 중종실록 1524-1533 년간에 이런 글이 있고, 태인 사람들이 자주 오른다.
1524년(중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全遞兒)를 대장금에게 주라" 고 되어 있다.
1533년(중종 28년).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醫女) 대장금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고 되어 있다.
중종의 병이 완쾌하고 장금산(산내면 장금터널의 산) 남북의 두 100세 장수노인에게 수차레 상경을 명령한 것은 대장금의 인척에게 상을 내리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건강상 이유로 상경하지 못하자 이들에게 후한 식량과 옷감등 재물을 주도록 전라관찰사에게 하명한 기록이 있다.
1533년 7월 17일 (중종33년)에 대장금이 중종의 병을 치료하면서 태인현 산내면의 송효행씨 부인 김씨와 순창 의 마유량씨 부인 조씨가 100세 이상으로 전국최고 장수노인으로 알려져 중종이 수차례 두사람을 궁중으로 올려오게 하여 중종의 병, 노인병의 표본으로 관찰하고 치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장금이 자기의 고향에서 소문난 100세 이상 노인의 존재를 중종에 알린 때문일 것이다.
"홍침(洪沈)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이라는 중종실록의 궁중기록은 수침동 마을 홍씨 수침(水沈)댁, 장금댁(內醫長今)이라는 호칭으로 궁중에서 불렸다
발해 대조영 후손 대장금이기에 고구려 당산 같이 사각 돌무더기로 되어 있다
홍씨 후손들이 토속성씨로 지칭하는 두월리 장금리 홍씨 집성촌으로 보인다.
명종때 화가로서 태인현감 신잠이 8년간을 이곳에서 근무하였고 홍침의 이름 수침동과 장금이 이름 장금산으로 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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