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한글로 약진한 한국이 이제는 한글날 마저 버렸다

도심안 2010. 10. 10. 20:12

 

 

한글로 약진한  한국이 이제는 한글날 마저  버렸다

 

한글날이다  한글의 역사를 바로  알자

한글은   허장군이 두씨황후 재림을 비는 두언전(竇諺傳 ) 글자

 유자광 정여립이 계승한  한글문화성지   유성룡이 하회마을로  옮겨가

 

 

 동방예의지국을  받은 허기장군의 후손 태인허씨족보에 두언전 한글전설 책이 보인다  

 

 고려가요  쌍화점  송인 세력가 집앞은 이런 유상곡수로 시를짓는  난정기 놀이터가 있다

 

 

대장금마을 홍씨 족보에는  세종대왕 딸 정의공주 시어머니 허지신 이름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허씨  안씨 이씨가 함께사는 제현동(재인동)에서

고려 조선의 왕비후궁  그리고 대장금을 거느린 유자광 중종후궁 희빈(홍경주딸)이 살았다

 

 

 

 

 두언전은 허기장군 (당현종의 수양아들) 이 당현종 모친  두황후로  그 명복을 빌어주는  산제당 명인전으로 남아있는데 

태인허씨 족보에 허왕두 즉 許王竇 당현종 어머니를 의미 한다

 

이 두언전으로 전하는 허장군 신당굴 아래에 이제는 명암사라는 암자로 남아있다

고려무신 이의방의 동생 이한이 조선왕조의 조상인데 태인 허씨 족보에는 이자겸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이 태인허씨 둘째 아들이라 한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미모에  가무악 뛰어난 기능으로  궁녀에서 황후 그리고 황제로서 중국예술창조 탑을 이루었다

그 세계각국에서 데려온 가무악공  수용소 이원梨園에서 서양 로마제국의 가무기녀를 접하고 새로운 측천무후 문자도 만들어서 사용했다

그래서 가무예술및 하류교육에 로마문자로 쉽게 교육시켜서  서민 노예 포로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자는 누구든 교육시켜서 자기 세력으로 만들었다

측천무후가 가장 가까이하는 손자 당현종에게 측천무후 손자 무씨 무헤비가 황후로 맞이한다

이 시대 서역 터어키 지역의 국방을 맡은 허기장군이 막강한 실력이므로 수양아들로 입적시킨다

무씨 이씨 구별없이 최고의 능력자를 심복으로 삼아 그 막강한 무력으로 정적을  쉽게 제거하는 그 교육은 로마 민주주의 학교 체제를 모방하려고 하였다

로마의 기독교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검법의 명수  사요한을 호위대장으로 등용한것을 보면 로마문자로 로마식 정치 즉 전투기술, 음악, 웅변,의술을  중요시하고  천인 백성들도 누구나 기능을 연마하여 등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난에 도망처 허기장군 주둔지역 사천성 청해성지역으로 온 당현종을 구출하고 반격작전을 하여 수복 한다

그러나 당현종의 태자 숙종이 먼저 서울로 들어 가서 숙종 황제로 왕권을 차지하여 버렸다

이런 정치를 측근에서 평생 보고 배운  가야족 허기장군이

 당나라의 최고능력자와 가무악공 미인 보물을 모두 소유하고 신라국으로  정읍 노령산  고향지역으로 와서 사유집단 사병을 양성하여  한글 같은 글자로 학당을 세우고  전투 음악 웅변 의술을  모두에게 가르친다

그런데 그 문자 교육에서 한글은 세종대왕의 딸과 수양대군이  이곳에 살면서  배워 한글로 반포하였고

군사교육은   정중부가 이의방에, 임진난에 이순신, 대원군이 전봉준을  최익현이 임병찬을 찾고 김구 이승만도 정읍을 찾아 병력에 의존했다

웅변은 책을 크게 읽는 토탬소리로  병법교육강연으로  적벽가 화룡도 등  판소리가되어 전주대사습훈련으로 가저갔다

그리고 의학은   최충헌 설경성 송교 권채 허준   대장금이  궁중으로 가저갔다

그리고 음악은 유자광이 악학괘범책을 한글로 백제가요 정읍사 수제천 소리,   허기장군 허씨의  세력지 정읍과  청도 진주 농악으로 남아있다

하회마을 탈놀이는 이고에 최치원이 군수로 학당에서  농악 탈춤등 가무잡희5가지를 가르치며  향악잡영 5수(鄕樂雜詠 5首) 시를 여기서 남겼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시켜 정걸(정극인의 손자)등등  군장을 데려가고  자기는 이곳의 농악 탈춤 광대를 하회마을로 가져갔다

허씨 안씨 유씨 하회마을과 똑같은 지형 물돌이 만경대 건넌들 마을에는 

이곳에는   정의공주가 시집온 마을은 허씨 안씨 이씨 마을에 유자광이 살았다

 성종 연산군시대 유자광에 아첨하다가  중종이 한글페지 언문청 페지하고 유자광을 성토하고 죽이고 나니 유자광을 버리려고 최대가문  문화유씨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허기장군이  한글 전투 음악 웅변 의술 교육을 시켜 민족의 문화와 국방을 지킨 정읍 대장금 탄생 마을에서 한민족을 로마제국 선진국으로 만들려하였던 유적을 탐색하는 교육의 터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를 알지 못해 구절초 공원으로 들국화 공원인데 이곳이 하회마을과 똑깥은 물돌이 마을 건넌들 즉 판소리 흥부전에 나오는 태인 산안 건넌들넘어 복덕골(북당골)미을 입구인데

여기서 동쪽으로 2키로 가면  장금산 장금터널 대장금 강가 마을이 있다

물속에 잠긴 마을에 왕희지 제자 42인이 유상곡수 술잔 띄우고 시 짓는 난정(蘭亭) 마을이 땜 공사로 인하여   공자의 제자 72인으로 수를 늘려서  난국정蘭鞠亭 이름으로 사군자 국화 글자를 더했다

당나라 왕족 무씨 송씨 안씨 이씨 등을 허기 장군 후손 이자겸이 이곳에 정착시켜  최고의 인재를 교육시켜서 고려조선의 왕비 후궁 궁녀 어의 군사등  수락간 여인까지 이곳에서  보충했다


 고려가요 쌍화점의 실세력자  몽고 왕족과 혼인한 송인의 비석 제실이 있다

그 냇가에 몽고 고려귀족이 유상곡수하였던 난정 바위도 있다

나는 이곳이 음악의 성역이기에 98년 전주대사습 농악심사하면서  사물놀이 김덕수 단장에게 이곳에 한국음악의 성지로 만들자고 햇는데

지금은 서양음악 전문공연 감상공원으로 아마 한국에 처음 로마교육과 음악이 들어온 성역으로  발전되어 민족의 역사를 보이려 한다

이들 허기장군 허씨 군사 예술 교육인재들이 자기 종족의 땅 경상도 청도 진주에 파견되어  그 세력 후백제 대구전투로 승리 도청이 되고  청도농악 진주농악 정읍농악 만이 토탬3000년 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영호남이 정치인이 가장 강력한 위상으로 판치고 있음은 로마교육 자신있는 무술과 예술 학문의 바탕 로마교육 천년전통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충분한 교육환경 긴 역사에서  생성된다

하회마을을 보고 감탄을 하였으면 그 자취를  정읍 산내면  대장금마을로 알아 보자

 

  정읍 대장금 탄생지 유자광이 악학괘범을 짓고  흥부전의 복덕골 마을 허기장군의  군사음악 웅변 의술 교육터 

현재는  구절초 공원으로  사용 정읍  허기장군의  대장금마을

 

 

 

안동 하회마을 사진

 

안동  허도령  하회마을 사진과  위의  정읍  허기장군  대장금마을의  물돌이 강변 사진이  똑 같은 지형이다  

                                           유성룡 유자광 모두 문화유씨  허도령과 허기장군  허씨 집성마을이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성룡의  기록을 보고 생각하자

 

 

선조 106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16일(정유) 1번째기사

사간원이 유성룡을 탄핵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은 간사한 자질에다 간교한 지혜로 명성과 벼슬을 도둑질하여 사람을 해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세상을 속여도 세상이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그 평생의 심술입니다.

정권을 잡은 이래로 붕당을 결성하여 국사를 그르치고 사삼을 자행하여 백성을 괴롭힌 죄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철(鄭澈)이 악한 짓을 멋대로 할 때에 우성전(禹性傳)과 이성중(李誠中)은 유성룡의 심복으로서 간사한 정철에게 붙어서 사대부들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지금까지 화(禍)가 계속되는 것은 모두 유성룡이 남몰래 사주한 것입니다.

공론이 이미 발론 된 뒤에도 유성룡은 유성전과 유성중 두 사람이 탄핵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감정을 품고 늘 원망하여 마침내 사류(士類)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자기 뜻에 거슬리는 자는 원수처럼 배척하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진출(進出)이 남보다 늦을까 염려하니 불량한 무리들이 그림자처럼 성룡의 문에 붙어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사론(士論)을 분열시켜 남북(南北)의 설(說)이 또 세상에 떠돌고 있는데, 이는 실로 성룡이 그 시초를 만든 것입니다.

 

왜적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모두 아는 일인데 유성룡은 대신으로서 맨 먼저 화친을 주장하고 호택(胡澤)이 나왔을 때에 기미책(羈縻策)을 힘써 주장하여 드디어 심유경(沈惟敬)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었습니다.

이에 중국에서 그것을 꼬투리로 삼아 왜적을 봉(封)하는 칙서 내용에 ‘조선에서 일본을 봉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온 나라

백성들이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듣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성룡은 조정의 의논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깊이 숨겨 대관(臺官)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황신(黃愼)이 떠나간 뒤에 대관이 비로소 듣고 논하였으니, 그의 조정을 멸시하고 기탄없는 짓을 함이 극심합니다.

 지난해 왜적이 서울에 다가왔는데도 오히려 화친하자는 의견을 가지고 비변사에서 큰소리를 치니, 유영경(柳永慶)이 앉아 있다가 분이 나서 일어나 말하기를 ‘전일에도 이미 잘못을 저지르고 오늘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가?’ 하니 유성룡이 문득 성을 내며 ‘영공(令公)의 비석에는 화친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써야 하겠다.’ 하였으니, 그의 방자한 짓에 대해 누가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소응궁(蕭應宮)의 말을 빙자하여 사의(邪議)를 고취시켜 자기 뜻을 멋대로 시행하려고 하자, 김응남(金應南)이 혼자 차자를 올려 그의 부당함을 진술하였는데, 유성룡이 도리어 회계(回啓)하기를 ‘신과 응남의 의견이 별로 다른 것이 없다.’ 하였으니, 간사함을 숨기고 상을 속인 죄가 또한 극심합니다.

끝내 사기(事機)를 저해하여 천하의 대사를 망쳤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천하의 죄인입니다.

 

광주(廣州)의 사전(私田)에 백성들을 시켜 경작하고 단양(丹陽)의 신장(新庄)에 포망(逋亡)한 자들을 소집하였으며,

안동(安東)의 구제(舊第)는 기름진 땅을 많이 점령하였는데도 부역을 하지 않으므로 안동부사(府使) 정사호(鄭賜湖)가 그 가호에 부역을 시키려고 하자 남몰래 친한 자를 시켜 남쪽 지방으로 좌천시키니, 식자들은 모두 침뱉고 욕하였습니다.

이는 유성룡의 죄상의 대략인데, 지난번 중국에 사신 가는 것을 회피한 일로 약간의 견책을 받았으나 다만 정승만을 체직시켰으니, 어떻게 그의 죄를 징계하고 온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하겠습니까. 나머지 위세가 아직까지 치성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시비가 밝혀지지 않고 공론이 시행되지 않으니 후일의 화(禍)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 바 참으로 한심합니다. 삭탈 관작시켜 조야(朝野)의 울분은 조금이나마 쾌하게 하소서.

하니, 선조왕 답하기를,

“어찌 그러기까지야 하였겠는가. 전해 들은 말은 반드시 모두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미 체직시킨 대신을 다시 논할 필요 없다.하였다. 

 

 

이처럼 선조는  유성룡을 감싸고 있었다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