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관 연혁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대가야국의 중심지로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 內珍朱智)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을 계승해 오다가 562년(신라 진흥왕 23) 신라에 병합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양군(高陽郡)으로 강주(康州: 晉州)의 관할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영천현(靈川縣)으로 개편되어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속하게 되었다.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고양군과 영천현을 고령현(高靈縣)으로 병합하고, 1895년(고종 32) 지방재정 개정으로 성주군(星州郡)과 현풍군(玄風郡)의 일부를 통합한 고령군이 되었다. 1975년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고령박씨(高靈朴氏) 시조 박언성(朴彦成)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 고양대군(高陽大君)이다. 후대에 어사공(御史公) 박섬(朴暹), 부창정공(副倉正公) 박환(朴還), 주부공(主簿公) 박연(朴連)을 중시조로 하는 3파가 형성되었다. "숙종때 암행어사 박문수의 직계후손" 박정희와 고령박씨 박정희(1917~1979)는 경상북도 선산에서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 뒤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했다. 광복 이후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한다. 그 후 육군포병학교장, 제5사단장, 제7사단장, 제1군 참모장, 제6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한다. 1949년 사상 관련사건에 연루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을 주도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다.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67년 재선된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켰으며,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파병을 강행했다.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유신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으로 농어촌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완성으로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과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기도 했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했다.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서했다. 영부인 육영수(1925~1974)는 충북 옥천 출신이다. 그는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옥천여중 교사를 지냈으며, 1950년 6.25 동란 중에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했다. 자선봉사단체인 양지회를 결성하고 미망인회 자활공장 등을 만들었다. 육영사업 일환으로 어린이대공원과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하고, 소년소녀 잡지 < 어깨동무>를 발간했다.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박정희와의 사이에 지만(志晩),근혜(槿惠),근영(槿映) 등 1남 2녀를 두었다.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는 박정희의 생가가 있다. 지난 1993년 2월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박정희는 이 집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선조 때 고령에서 성주(星州)로 옮겼다가 다시 1914년에 현 위치인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00년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이다. 1964년 구미시가 안채 및 사랑채를 단장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다. 한편 조선 숙종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같은 고령박씨 어사공파 집안이다. 특히 박정희는 박문수의 직계 후손이다. 박문수는 도승지, 어영대장, 병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 암행어사 박문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박문수의 증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낸 구당 박장원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명문 출신이다. 박문수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달한데다 기지와 유머가 풍부했다. 박문수는 워낙 강직한 성격으로 바른말을 잘해 대중의 절대적인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벼슬길에서는 기복이 많았다.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한 것도 너무 흑백이 분명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 탓이었다. 박문수는 임금 앞에서 허리만 굽힐 뿐 고개를 쳐들고 임금을 쳐다보았다. 대신들이 박문수의 행동이 불손하다고 탄핵했다. 그러나 영조는 “영성군(박문수)의 말이 옳으오. 군신 간에 너무 어려운 듯이 부복하는 것은 좋지 못하니 앞으로는 고개를 들고 임금을 바라보도록 하시오”하고 박문수 편을 들었다. 살얼음판 같은 벼슬길에서 박문수가 그 재능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박문수와 박정희는 닮은 점이 많다. 우선 강직한 성품은 두 사람 모두 닮은꼴이다. 박정희는 1959년 고령박씨 종친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종친회 고문으로 있었다. 육군 소령 당시 박정희는 종친회에서 기금을 요청하면 < 군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조금 내놓았을 뿐 종친회 행사나 사업에는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5.16 후에도 문중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문중에서 <너무 한다>는 원망도 있었다. 과거사 청산을 놓고 여전히 박정희 관련 비사들이 들추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리더십에 대한 연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고령박씨 문중에서는 박문수와 박정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고령박씨 후손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기질이 강한 집안이다. 그러나 때로는 전통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엉뚱한 사람들이 나온다. 박어사도 그랬고 어쩌면 박정희도 그런 셈이다.” 고령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둘째 아들인 고령대군 박기언을 시조로 한다. 고령박씨는 7세손 때 크게 번성하면서 어사공파, 부창정공파, 주부공파로 나누어진다. 오늘날 고령박씨의 인구는 많지 않다. 그러나 60여 개의 박씨 본관 가운데서 주축을 이루는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충주. 순천. 무안 등 소위 < 8박>의 하나로 꼽힌다. 주요 세거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 경기도 이천시 율면 고당리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정배리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산리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운계리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동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
출처 : Welcome to Peter`s blog.
글쓴이 : ☆ PETER LEE ☆ 원글보기
메모 :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李대통령 "통일세 준비할때 됐다"(상보) (0) | 2010.08.15 |
---|---|
[스크랩] 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 ① (0) | 2010.08.13 |
[스크랩] 박정희 집안의 뿌리깊은 골수 반골내력 (0) | 2010.08.12 |
[스크랩]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그의 쓸쓸한 뒤안길 (0) | 2010.08.07 |
[스크랩] <DJ정부 최대 경상흑자…경제성적 우수> (0) | 2010.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