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집안의 뿌리깊은 골수 반골내력
박정희 집안은 골수 공산주의 집안이었다. 또한 반체제,반골 성향이 흐르는 핏줄이라고 보면 맞다.
박정희의 부친은 박성빈으로 그는 동학반란에서 동학접주로 난에 가담, 고향을 버리고 선산에 자리잡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적이 원래 어디였는지는 현재로는 정체불상이다.
아들이 다섯이던 박성빈의 세째 아들 박상희는 선산인근에서 장차 대통령 재목감으로 불려졌다. 박상희는 아마 20년대 경부터 공산주의 좌익사상에 인접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일제가 1922년부터 28년 사이 벌인 일본과 조선내 공산주의자 검거 과정에서 체포된 전력이 있다.
박상희는 이 당시 이미 매일신보 기자로 봉직하고 있었으므로, 일제가 기자신분인 박상희를 검거했을 때는 박상희의 공산주의 활동에 확실한 심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상희 다음의 아들이 박한생으로 정신이상 병력으로 1925년 숨졌다고 호적에는 기록돼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정작 박한생이 사라진 것은 1928년부터 였다고 마을어른들은 기억한다. [조갑제 박정희 전기]
이런 기록은, 박성빈 일가가 사남 박한생을 일제의 공산주의 소탕령에 겁먹고 미리 박한생을 죽었다고 사망신고 한 후, 만주로 빼돌린 것이 아니냐고 짐작하게 하는 단초다.
박한생의 사망신고가 신고일자와 같은지는 확인하기 힘드나, 박상희의 검거 소식이 1927년11월모일 조선일보 기사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강북 경찰부 고등과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중에 최석현 경부보는 형사 세명을 데리고 구미까지 가서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 박상희, 구산구락부원 윤재우, 김정술 3씨를 검거한 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3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십일 오후 열시경에 대구로 압송하여 대구서 유치장에다가 유치한 우헤 방금 극비리에 취조하는 중인 바,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방금 구미(균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싸여있는 모양이더라."
이 박한생의 소식은 1993년경 세계여성 특종으로, 북한에 살고 있는 박정희 형이란 놀라운 기사로써 재등장한다. 북에 살고 있는 박정희 친형, 즉 박성빈의 사남이라는 그의 이름은 박광선으로 출생지는 선산, 박정희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또한 그가 선산을 떠난 때의 나이도, 선산에서는 박한생이 사망했던 시기가 1928년, 나이 19세 때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그 사망 신고 시기가 1925년이었듯이, 박광선이 고향을 떠난 나이라는 것이 14세 때였다고 하면, 박한생의 사망신고시기와 박광선이 고향을 떠났다고 하는 연령은 얼추 맞아진다.
그리고 박광선은 북에 정착한 후 이름을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시나리오가 맞다면, 박정희 집안은 1917년 경부터 집안의 대들보 노릇을 하던 박상희로부터 비롯, 공산주의 집안이 되었다.
문제는 더 있다. 박정희 부친 박성빈은 동학접주인 바, 동학은 1905년부터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후, 1910년대 부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근거지를 바꾸어 활동한다.
즉, 박성빈이 계속 동학신봉자였다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천도교와 접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천도교는 김일성이 북한에 소련군과 입성, 단독정권을 수립할 때 조선노동당 외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집단이었다. 바로 거기에 박광선으로 바뀐 박한생이 김일성, 김책부대와 같이 북한에 들어갔으며 북조선 정권의 장관직까지 오르는 고위직급으로 있었다.
즉, 북조선 수립의 가장 큰 양대 세력, 공산당과 천도교의 양쪽에 박정희 집안은 고루 뿌리가 있었던 셈이다.
정상이라면, 박광선이 경북 선산출신이므로 그는 조국이 해방하면 그의 고향 선산으로 돌아왔어야 말이 맞는다. 그러나 박광선은 그러지 않고 김일성에게 합류했다. 이는 그가 선산에서는 사망신고로 이미 죽은 자가 되어 대낮에 얼굴 들고 돌아갈 입장이 더는 못 되기 때문일 것이다.
즉, 박광선은 1946년부터 북조선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그의 형이라 할 박상희는 1946년10월1일의 경북민요에 가담, 선산지역에서 인민내무상이란 주동자 급으로 난을 일으켜 경찰서와 관광서를 접수하고 인민재판까지 벌이고 경찰들을 감금한 상태에서, 서울로부터 내려온 토벌대에 의해 교전 중 가슴과 옆구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등, 양 형제가 북과 남한에서의 동시적으로 공산혁명을 시도했다.
경북일대에 벌어진 공산폭동에서 가장 나중에 진압되고 충청토벌대로도 안되어 서울에서 토벌대가 내려와서 진압된 곳이 선산지역이란 기록으로 보아, 박상희는 가장 악질적인 골수 공산주의자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박상희, 박한생의 동생인 박정희는 만주 군관 시절,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가담, 공산주의 활동을 그 때부터 했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은 1944년 창립, 만주까지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박정희는 1944년 봄부터 일본군사학교를 마치고 만주에서 근무시작했다. 이 때 최창윤의 추천으로 박정희가 건국동맹에 가담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제패망직전, 광복군을 찾아갔으며 광복군으로 활동했다는 설에 대하여, 진미령 여사의 부친인 김동석씨는 그의 저서에서 해방 후 소련군에 일제패잔병으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갈뻔한 박정희와 정일권을 구출한 일화를 기록함으로써, 박정희의 광복군 활약설이 거짓임을 밝히고 있다.
그 박정희 역시, 1946년에도 이재복의 권유로 군에 있으면서 남로당에 가입, 남로당의 군대 내 주요 서열에 오르며, 여순반란사건 토벌대의 연락장교까지 되었다가 검거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일로 박정희는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군내 남로당 점조직을 모두 불고 그 보상으로 목숨을 구명했다.
이로써, 박정희 가계는 박상희, 박한생, 박정희까지 삼명이 나란히 공산폭동을 노린 골수 공산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
공산주의의 가장 극명한 특징은 권력집중이다. 권력에 집착하며 가장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
말년의 박정희의 종신제까지 노리던 권력집착증으로 볼 때, 박정희 역시, 그 사상적 원형은 끝내 공산주의 그림자에서 못 벗어난 것이라 봐야 맞을 것이다.
박정희는 1973년 6.23 선언하며, 김일성에게 남북내정불간섭을 제안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북한의 독재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김일성도 박정희의 내정에 간섭치 말아달라는 부탁이나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그의 아내 육영수를 1965년부터 국모로 이미지화 작업하고, 육영수가 사라지자 1974년 경부터 그의 딸 박근혜를 제2 국모 인 양 색칠하는 작업을 함으로써 - 전국으로 다니며 충효사상을 고작 25세 나이 젊은 여성이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지역유지들 상대로 강연하게 하는 미친 하극상적 짓을 벌인다. 그것도 최태민이란 사기꾼 목사까지 곁에 나란히 다니게 하여 풍기를 문란케 했다. - , 일가족 독재형태의 권력집중을 꾀하다가 결국 부하의 총에 맞아 정치권력을 내놓으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박근혜가 친대한민국적 행동을 하지 못하고 끝내 민주당 편이 되거나 친김정일적 발언에서 못 헤어나는 이유, 역시 뒤로는 그 가계의 골수 깊은 공산주의 이력에서 비롯되는 지 모른다. 또는 동학난을 벌인 반골 집안적 DNA 때문이거나.
2010.7.25. 파아란 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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