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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발생기 .진나라는 신라(진한)이 한나라는 고구려(마한)이 개국했다 (

도심안 2010. 7. 24. 11:59

삼한 발생기 .진나라는 신라(진한)이 한나라는 고구려(마한)이 개국했다 (펌

① 三韓의 뿌리


  三韓이란 馬韓 . 辰韓 . 弁韓을 말한다. 三韓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韓이며 韓의 뿌리는 夏나라 때이다.

  BC.2224년 韓原은 韓氏로서 이름은 치두남씨(蚩頭男氏)이며 河北省 固安縣에서 韓이라는 나라로 都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우(夏禹) 즉 대우(大禹.BC.2205~2198년)인 夏나라가 생기기 19년전에 이미 河北省 固安縣 東南에서 諸侯國으로 出發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夏나라의 첫 임금은 大禹로서 黃帝의 아들인 昌意가 낳은 사람이 전욱고양씨이다. 전욱씨는 곤(鯀)을 낳았고 곤은 文命인 우(禹)를 낳았다고 中國史前史話를 저술한 서량지(徐亮之)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史記 五帝本紀에서도 똑같은 記錄을 남기고 있다. 그러니까 黃帝로부터 夏禹王은 高孫子가 되고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로부터 손자(孫子)가 된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하우씨(夏禹氏)의 아버지가 바로 鯀(곤)이며 一名 곤곤(鯀鯀)이라 한다. 山東大學에서 發行한 泰山神文化에는 堯舜 때 폭우가 40일간이나 쏟아져 땅에서 300미터 이상 물이 차올랐다고 되어있다. 그때 곤(鯀)은 地方의 諸侯王으로서 天子가 되고 싶은 욕심에 洪水를 막고 治山治水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失敗한 후 山東省 羽山에서 舜임금으로부터 참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곤(鯀)이 바로 죽은 후 큰물고기가 되었다는 說이 있어 一名 雙魚라는 별칭이 붙은 사람이다. 가야(伽耶)의 시조(始祖)로 불리는 雙魚는 바로 곤(鯀)을 뜻한다. 곤이 참형을 당한 것을 안 伽耶에서는 新羅의 始祖인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BC.2578년)를 伽耶의 始祖인 것으로 경남 김해에 있는 首露王 비문에 새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小昊金天氏는 黃帝의 아들로서 天子의 자리에 올라 山東省 曲阜에서 黃帝의 뒤를 이은 王이다. 지금도 山東省 泗水縣에는 小昊金天氏의 墓地와 黃帝의 묘지가 있다. 하지만 黃帝 墓는 1958년 文化革命 때 파헤쳐 버리고 小昊金天氏의 陵은 지금도 남아있음을 筆者는 3번이나 踏査한 바 있다.

  夏나라가 등극한 지 19년 전 河北省 固安縣 東南에서 韓나라는 나라를 建國하게 된 것이 三韓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305쪽에는 韓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韓은 옛 나라 이름이다. 그곳은 지금의 中國大陸인 河北省 固安縣 東南이다. 고리국은 固安縣 남쪽이며 고리국이 있던 河間縣보다 약간 북쪽에 位置하고 있다. 즉 北京市 경계선에 걸쳐있는 남쪽에 固安縣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高句麗 祖上 나라인 고리국(櫜離國)은 固安縣보다 남쪽이지만 지도상으로 보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韓國이 있던 곳과 고리국이 있던 곳은 불과 수 킬로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韓나라가 BC.2224년이라면 고리국은 BC.260년경이므로 韓나라보다 고리국은 무려 2064년 뒤에 생긴 나라다. 그렇게 본다면 불과 수 킬로 떨어진 나라였기에 血統이 같을 수 있음을 意味하고 있다.

  韓나라는 면면히 이어 내려오면서 周나라와 함께 왔지만 周나라가 망하고도 韓나라는 맥을 이어 내려왔다. 다시 地名辭典을 살펴보기로 한다.

韓에서 三韓이 나타난 것은 漢나라 때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周나라 위렬왕(威烈王.BC.425년) 23년에 晋나라에서 分離되어 나온 諸侯國은 韓 . 魏 . 趙의 三韓이다. 즉 三家가 떨어져 나오면서 韓은 건(虔)이, 魏는 斯가, 趙나라는 적(籍)이 각각 諸侯國으로 세웠다고 歷代帝王年表에는 記錄하고 있다. 그리하여 韓나라는 都邑地를 平陽으로 定했는데, 이곳은 山東省 臨汾縣에서 다스렸다고 地名辭典에는 적고 있다. 하지만 후에 河南省 禹縣에서 新鄭縣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韓나라의 彊域은 그 당시 河南省 西北部와 陝西省 東部의 모든 地域이었다고 되어있다.

後漢書에 나타난 韓에 대해 적어보기로 한다.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吊,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間, 地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以支國, 盡王三韓之地.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韓나라는 세 종류가 있었다. 첫째로 말한다면 馬韓이며,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란 나라이다. 이들은 馬韓의 서쪽에 있다. 무려 54개 나라가 있었다. 그 북으로는 樂浪이며 남으로는 倭가 인접하고 있다. 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개 나라이다. 그 북으로는 예맥(濊貊)이 접해있다. 弁辰의 나라는 辰韓의 남쪽으로 역시 12개 나라이다. 그 남쪽으로는 倭가 가까이 있었다. 무려 78개 나라였다.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이며 작은 나라는 수천 가호이다. 각각 산과 넓은 땅 사이에 있었다. 강역의 둘레는 4천여리이며 동서로는 넓은 땅이 바다와 같이 한없이 넓었다. 모두가 옛날에는 辰나라이다.

馬韓이 최대로 크고 넓었으며 모두 함께 나라가 같은 종족으로 辰나라 王을 위하고 있었다. 都邑을 갖고 있던 나라는 가지와 같은 나라이다. 그러기에 왕을 모두 합한 것이 三韓의 땅이라고 하였다.

  本文에서 馬韓은 54개국이며 辰韓은 12개국, 그리고 弁辰의 나라도 12개국으로 모두 합해 78개 나라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皆古之辰國也라고 하는 것은 본래 秦나라인 秦韓 즉 秦國이며 秦始王이 亡한 후 생긴 나라가 辰韓이다. 秦나라가 滅亡하자 君臣과 백성들이 秦나라를 다시 별처럼 일으키고자 念願하는 뜻에서 辰韓이라고 했다. 辰國은 역시 秦國을 意味하고 있다.

後漢書 東夷傳 韓편을 보면 辰韓者耆老自言, 秦之亡人, 避苦役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라고 적고 있다. 이 말은 辰韓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한 사람들이다. 고생고생 끝에 적당한 韓國으로 피난왔다. 그곳은 馬韓의 동쪽 경계의 땅에서 살았다고 적고 있다.

都邑地는 가지와 같은 작은 나라들로 78개의 나라 모두가 三韓 땅이라고 되어있다. 梁書도 똑같은 記錄을 하고 있으며 三國遺事에도 같은 맥으로 적고 있다.

  後漢書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三韓의 四方이 4천여 리라고 했다. 한반도에는 78개의 나라가 있을 곳도 없는 彊域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中國大陸의 中原 땅이 모두 三韓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馬韓은 53개 나라, 辰韓과 弁辰이 각각 12개 나라이므로, 中國大陸의 新疆省과 西藏省 一部 그리고 東北의 滿洲地域을 빼놓고는 모두 三韓 땅 이었음을 말해준다.









② 馬韓의 彊域圖


  馬韓은 BC.1285년 웅백다씨(熊伯多氏)로부터 무려 35대에 이르러 諸侯國으로 始作됨을 볼 수 있다. 하지만 正史의 記錄에 빠져있어 史學者들은 歷史的 考證이 없다는 뜻에 否定해 버리는 것이 一般的인 見解이다.

  주무왕(周武王.BC.1134~1116년)의 年代는 歷代帝王年代表에서는 BC.1134년에서 1116년으로 되어있으나 여러 正史를 考證해 본 결과 BC.1122년에서 1070년까지로 되어있어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와같이 箕子朝鮮은 엄연히 문헌이 여러 正史에 記錄되어 있는데도 한국의 敎壇史學者들은 日帝 때 歪曲시킨 植民史學을 工夫해 왔기 때문에 否認하고 있다. 아예 箕子朝鮮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完全히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現實이다.

이와같이 歷史家들의 見解에 따라 때로는 날조되고 造作되는 事例가 非一非再한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周나라가 建國되기 151년 전에 이미 諸侯國으로서 馬韓은 BC.134년까지 中國大陸에서 1131년간 면면히 이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天子國이 아닌 관계상 馬韓의 上古代 歷史의 紀錄에서 正史에 빠져 있었던 게 事實이다.

  처음에 建國된 馬韓이 亡한 후 箕子朝鮮의 마지막 王이었던 哀王 準은 燕나라 노관(盧綰)의 반란으로 因해 北쪽에서 匈奴가 侵入해오자 山西省 太原에 都邑해 있던 箕子朝鮮은 南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秦나라가 亡한 후 空地 즉 빈땅으로 있던 지금의 西安에서 다시 馬韓으로 建國하게 된다.

BC.1285년에 웅백다씨(熊伯多氏)에 의해 세워진 馬韓이 亡하게 된 것은 周나라 末期 群小國家가 2천 개가 난립하는 과정에서 七雄時代가 到來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七雄이란 秦나라 . 韓나라 . 趙나라 . 魏나라 . 楚나라 . 燕나라 . 齊나라였다.

이 무렵 燕나라는 반란에 의해 勢力이 弱化되면서 秦나라가 得勢하게 된다. 그리하여 BC.255년 七雄이 힘을 겨루다가 秦나라에 의해 六國은 亡하게 된다. 秦나라가 天下를 統一시키고 단독으로 秦天下가 始作되는 것은 BC.221년이다. 그러나 秦나라가 統一한 지 10년도 되지않아 農民의 봉기가 일어나자 秦始王은 아들 호해(胡亥)에 의해 살해되고 불과 48년만에 秦나라는 亡하게 된다.

  秦나라가 처음에 都邑한 곳은 甘肅省 天水縣이었다. 秦始皇帝 37년인 BC.210년에 陝西省 咸陽으로 都邑을 옮기게 된다. 다시말해 秦始王 37년 아들 胡亥는 아버지 秦始王을 살해한 후 都邑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秦始王의 아들 胡亥가 咸陽으로 都邑을 옮기고 王位에 올랐으나 불과 3년만에 秦나라는 歷史속으로 사라져갔다.

   秦나라가 六國을 統一시킨 彊域은 韓 . 趙 . 魏 . 楚 . 燕 . 齊 나라가 있었던 땅은 秦나라가 亡하므로 因해 空地가 되었다. 이 時期에 箕子朝鮮은 남아있던 燕나라의 반란으로 山西省 太原에서 남으로 내려와 秦나라가 都邑했던 咸陽의 바로 동쪽인 西安에 都邑을 定한 후 馬韓이란 國號로 建國하게 된다.

그때 箕子朝鮮 41대 마지막 왕이었던 哀王은 國號를 馬韓이라 하고 十代로 이어 내려왔다. 그리하여 馬韓의 彊域은 前述한 바와 같이 54개의 작은 나라들이 馬韓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馬韓의 彊域은 中原대륙의 ⅔ 이상으로 勢力이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 당시 馬韓에 속해있던 55개국은 대략 다음과 같다(三國志 韓傳 참고).






①유원양국(有爰襄國) ②모수국(牟水國) ③상외국(桑外國) ④소석색국(小石索國) ⑤대석색국(大石索國) ⑥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⑦신분활국(臣濆活國) ⑧백제국(伯濟國) ⑨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⑩일화국(日華國) ⑪고탄자국(古誕者國) ⑫고리국(古離國) ⑬노람국(怒藍國) ⑭월지국(月支國) ⑮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16)소위건국(索謂乾國) (17)고원국(古爰國) (18)막로국(莫盧國) (19)비리국(卑離國) (20)점리비국(占卑離國) (21)신흔국(臣釁國) (22)지침국(支侵國) (23)구로국(狗盧國) (24)비미국(卑彌國) (25)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26)고포국(古蒲國) (27)치리국국(致利鞠國) (28)염로국(冉路國) (29)아림국(兒林國) (30)사로국(駟盧國) (31)내비리국(內卑離國) (32)감해국(感奚國) (33)만로국(萬盧國) (34)벽비리국(辟卑離國) (35)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36)일리국(一離國) (37)불미국(不彌國) (38)지반국(支半國) (39)구소국(狗素國) (40)서로국(捷盧國) (41)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42)신소도국(臣蘇塗國) (43)막로국(莫盧國) (44)고납국(古臘國) (45)소반국(素半國) (46)신운신국(臣雲新國) (47)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8)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49)일난국(一難國) (50)구해국(狗奚國) (51)불운국(不雲國) (52)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53)원지국(爰池國) (54)건마국(乾馬國, (55)초리국(楚離國) 등 55個國으로 되어있다.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반도에는 이와같은 나라가 있었던 事實조차 없다. 다만 백제국(伯濟國)만은 일백 백(百)자가 아닌 맏 백(伯)자의 백제국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한반도가 아닌 中原大陸에서 엄청난 彊域의 强國으로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馬韓은 高句麗의 뿌리로서 秦나라가 亡한 후 漢나라 國號가 定해지기 전까지 馬韓으로서 大陸을 얼마동안 支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위와같은 증거는 箕子通紀와 箕子朝鮮聖蹟史의 記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箕子는 41代 哀王에서 亡한 후 哀王은 大陸을 떠돌아 다녔다. 南으로 내려가 金馬郡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金馬郡은 그 당시 益山이었다. 그후 나라이름을 고치고 東으로 옮겨와 國號를 馬韓이라 했으며 平壤에서 王으로 등극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로 哀王은 馬韓王으로 등극하였지만 事實上 後代 史學者들은 漢高祖 劉邦이라 稱했다.

馬韓의 2代 王은 康王이다. 康王은 죽은 후 諱號를 惠帝라 했는데 在位는 4年으로 되어있으나 漢나라 年代表에는 6年으로 되어있다. 따지고보면 箕子朝鮮 41代 哀王은 準이며 哀王의 아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衛滿朝鮮이었던 王滿은 衛滿이며, 王滿은 漢나라 2代인 惠帝이다. 이러한 事實은 山東大學에서 出刊된 史記辭典에 보면 王滿의 孫子인 右渠는 漢나라 武帝임을 記錄하고 있다.

  馬韓의 6代 王은 孝王이다. 孝王이 죽은 후의 諱號는 漢武帝이다. 王滿이었던 漢나라 惠帝의 孫子가 바로 右渠이며 右渠가 漢武帝라고 되어있다.

馬韓王은 8代 襄王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襄王은 後日 漢나라 宣帝이며 襄王때까지 馬韓王으로 불려 오다가 馬韓王의 9代에 해당하는 元王때 와서 비로소 國號를 漢나라로 改稱한 것으로 되어있다. 다시말해 元王은 漢나라 元帝이며 BC.48년에 이르러 國號를 漢나라로 改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漢나라는 事實上 30代 후부터 漢나라로 불리게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그 이유는 箕子通紀와 史記辭典에서 잘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본다면 BC.1285년 熊伯多氏에 의해 馬韓이 建國되었으나 BC.134년에 戰亂이 심해지자 馬韓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箕子朝鮮의 마지막 哀王은 또다시 馬韓을 建國하므로서 漢나라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現在 中國에서는 56개 民族으로 分離해 漢族이 中國民族으로 最高인 줄 알고 있으나 눈감고 아웅하는 式이므로 歷史의 實體가 밝혀질 경우 中國은 恥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中國은 華夏族이라고 자칭하고 있으나 알고보면 中國의 歷史는 없다. 中國民族의 뿌리를 歷史的으로 中國學者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東北工程이니 하여 中國의 歷史로 編入시키려하고 있다. 中國에서는 唐나라가 어떤 뿌리에서 建國되었는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共産主義와 社會主義 社會에서는 歷史의 實體를 밝히는 것을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上古代부터 歷史의 實相이 밝혀질 경우 中國大陸은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漢나라와 唐나라의 血統과 系譜가 밝혀질 경우 自動的으로 한民族의 歷史는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한국의 位相은 높아지게 되고 民族正氣가 살아나면 한국은 世界 속의 一等國家로 浮上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馬韓은 55個 國家로 形成되었다는 것은 中國大陸 거의 모두라 할만큼 彊域이 廣大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後漢書 東夷傳 첫머리의 다음과 같은 文章을 보면 놀랄 것이다.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라고 되어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다.

왕의 제도가 일어나게 된 것은 東方의 東夷들이다. 東夷들은 王의 制度를 만든 뿌리라고 적고 있다. 고로 東方의 東夷들은 人類歷史上 最初로 國家의 틀을 만들어 다스려 온 것임을 잘 나타낸 글귀라고 보아야한다. 여하간 後漢書와 三國志 . 晉書 . 史記 . 山海經 . 三國遺事 . 滿洲源流考 . 通志 . 通典 . 資治通鑑 . 冊府元龜 . 太平御覽 등 수많은 正史들이 記錄한 東夷의 뿌리는 실로 방대하게 實相을 적고있다.

  前述한 바와같이 三國志에서 보는 馬韓의 彊域은 한반도의 30배 이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馬韓에서 뿌리가 내려진 諸侯國만 하더라도 數百國이 넘는다는 事實을 認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學者들이 너무 無知하여 國家的으로 엄청난 受難을 당하고 있다. 하루빨리 高句麗史 뿌리인 馬韓만이라도 제대로 硏究되었다면 中國에서 東北工程이니 渤海가 唐나라 속국이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古朝鮮을 집중 硏究하여 整理했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國家의 位相이 이렇게까지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馬韓 . 辰韓 . 弁韓인 三韓을 한반도 안에 가두어놓고 불장난을 한 것이 큰불을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도달하고 있다. 현재 歷史認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現象이다. 하루빨리 馬韓의 彊域이라도 史書에 있는 그대로 밝혀 民族史를 바르게 해야할 것이다.




세잎 (2006-10-22 12:00:37)  
위 55개국은 마한이고, 마한에서 백제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텐데요.
환단고기에 진한의 왕계표가 없는 것으로 봐서, 진한은 왜, 임나이고,
번한이 고구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환 배달 초기단군국에서는 삼한이 아닌 2개의 칸이 있었으며, 2한은 마한 번한으로 보며,
두칸의 영역경계가 만리장성으로 보며, 초기 만리장성은 마한과 번한의 경계의 표시였다고 추측해 봅니다.

진한은 단군국 중기 쯤에서 생겼다고 알고 있습니다.

환국에서 배달성으로 도읍지를 천도하였는데, 기존세력이 마한이고, 천도세력이 번한으로 보며,
주신 = 주(어미 왕) + 신(신불), 천독 = 천(달성) + 독(어미 왕)으로
기존세력과 천도세력의 경계가 만리장성이고, 기존세력 마한과 천도세력 번한의 중심세력이 해주신
아바타, 황탁순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진실 (2006-10-22 12:38:26)  
마한과 번한에 위치는 바뀔수도있다고 봅니다 워낙 복잡하게
대륙사가 전개 되서 고정돼어 영토가 있었던게 아니라고 볼수있읍니다

헌데 왕계표가 없다고해서 진한을 왜라고 말하고 임나도 튀어 나왔는데
이것은 넘 오버한거 아닙니까?
세잎 (2006-10-22 13:04:48)  
마한 번한 진한 왜 임나 이게 누가 기록한 역사이고, 이 중심세력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국가명이 뒤죽박죽이고, 고대사서는 오류투성이 이고,

역사를 잘못찾는 것도 역사왜곡이 됩니다.

고조선에 삼한이 있었다. 삼한은 마 번 진한이다.

기존글을 되풀이 하는 것 같아서 생략하고, 마한이 고구려라는 것은 처음들어 봅니다.
진실 (2006-10-22 13:23:37)  
마한이 고구려란 증거는 고구려가 왜국으로 가면서
왜국(일본)에 집단 거주했고 그 지역명이 아직도 많은데
고구려인 집성촌을 코마 .코마무라 라고 되어 있는걸로 압니다

고구려 혹은 고려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절대 코마란 명칭이
붙지 않고 고우라이 인가 뭐 이런식으로 붙는걸로 압니다

헌데 왜? 코마라고 했을까요? 참고로 일본에서 곰을 쿠마라 한답니다

오히려 웅진이란 도시명을 썼던 백제가 코마가 되야 할텐데 어째서
고구려를 코마로 할까요? 마한에 최초 계보가 웅백다에서
시작하니까 고구려를 마한에 후계로 본거 아닐까요?

본글에 이어서 펌합니다

삼국유사 辰韓편을 보면 亦作秦韓이라고 되어있다. 辰韓은 역시 秦나라 秦韓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했다. 三國遺事편에서 後漢書를 引用한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與以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 漸涿等, 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 中略, 財買井宅, 庾信公祖宗, 中略.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辰韓의 늙은 노인들이 스스로 말한 바에 의하면 秦나라가 亡한 후 秦나라 사람들은 적당한 곳을 찾아 韓나라로 왔다. 여기서 韓國은 한반도가 아니라 전술한 바와 같이 魏나라, 趙나라가 있을 당시의 韓國이다.

이때 韓國은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305쪽에 있는 것처럼 韓國은 옛 國名으로 지금의 河北省 固安縣 東南에 있었다. 그러나 秦나라가 陝西省 咸陽으로 都邑을 옮긴 후 亡했으므로 BC.207년경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때 韓國은 河北省 固安縣에서 섬서성(陝西省) 韓城縣으로 都邑地를 옮긴 이후이다. 그렇게 본다면 秦나라 사람들은 秦나라가 亡한 후 동으로 옮겨와 韓城縣에 있던 韓國으로 이주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陝西省 韓城縣은 馬韓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때 韓國은 바로 馬韓을 뜻한다. 다시 本文을 이어서 풀어보기로 한다.

또한 馬韓의 동쪽으로 경계 지역이기도 한다. 무리들은 서로 부르면서 秦나라와 같은 말을 했다. 고로 혹 이름을 秦韓이라 했다.

그 당시 12개국이 있었는데 각각 一萬戶 정도였고 辰韓이라는 나라로 칭했다. 또는 崔致遠의 말에 의하면 辰韓은 본래 燕나라 사람들이 피난온 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탁수(涿水)라는 이름을 취했다. 이곳이 있는 바를 말한다면 읍(邑)이나 마을 등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르기를 사탁(沙涿)이라고 했으며 한편 점탁(漸涿) 등이라고 했다.

新羅 사람들은 방언(方言:사투리)으로 말했으며 탁(涿)이라는 음을 읽을 때는 道를 위한다고 했다. 고금에 혹 사량(沙梁)이라고 지어졌으며 량(梁)이란 역시 읽을 때는 道로 읽었다. 新羅가 全盛期 때는 서울 안에 17만8천9백36戶였으며 1천3백6십坊이었고 55里의 거리였다.

여기서 잠깐 한 집 당 식구수를 환산해 보기로 한다. 古代社會 즉 BC.207년경에는 한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평균 낳은 子女가 5명에서 6명 정도라고 본다면 5, 6명의 자녀가 다시 5, 6명을 낳는다고 보았을 때 한 집안에 적어도 20명 꼴은 되었다고 보아진다.

歷代神仙通鑑에 보면 한 집안에 3백 명이나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극히 드문 예라고 보더라도 秦나라가 亡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고 해도 한 집안에 평균 10명 꼴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新羅가 全盛時에 서울 안에 17만8천9백36戶였으므로 1백7십8만9천3백6십名에 해당한다.

現在 2002년도 경북 慶州의 人口가 29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필자가 경주시에 직접 전화하여 확인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新羅가 992년간 경북 慶州에 都邑하고 있었다는 것은 배꼽이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1천3백6십坊이라 했는데, 방(坊)은 읍과 리(里), 그리고 동(洞)을 말한다. 그렇다면 邑․洞․里가 1천3백6십 고을이나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新羅 서울의 둘레와 거리가 55里라고 했는데, 10里가 古代社會에는 5.6㎞이므로 상당한 거리라고 보아야한다.

本文에서 사탁(沙涿) 또는 사량(沙梁)이라 했으므로 分明한 것은 한반도에는 地名이 없고 大陸임을 나타내고 있다. 본래 沙梁인 沙梁州는 玄菟郡에 속한 곳이므로 지금의 西安을 뜻하고 있다. 이곳에는 35家口의 누른 黃金色으로 지은 큰집이 있었다. 그중 재매정택(財買井宅:집안에 우물이 있는 부잣집을 뜻함)이란 집은 김유신(金庾信) 공의 조상 집이라고 적고 있다.

三國志 辰韓편을 보면 역시 秦나라가 망한 후 秦나라 사람들이 東쪽으로 피난 겸 이주해 온 곳이 馬韓의 땅이라고 했다. 하지만 言語는 方言으로 使用했기 때문에 馬韓과는 약간 달랐다고 했다. 본래 秦나라는 명분있고 이름있는 나라였기에 秦나라가 亡한 후 뿔뿔이 흩어져 다니면서도 나무로 만든 활을 가지고 다녔다. 이 사람들은 일정한 곳이 없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였고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술잔으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리고 모든 무리들이 서로 만나면 이름을 부르고 말하는 것이 秦나라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秦나라 사람들이라해도 燕나라와 齊나라 사람들 못지않게 명물들이었다. 그 이름은 樂浪으로서 아전(阿殘)들이었다. 아전이란 마지막 남아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즉 樂浪의 후예임을 말한다. 아전(阿殘)들은 東方人의 이름이다. 설명하자면 樂浪 사람으로 본래 남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有名했던 그 이름은 辰韓 사람으로 처음은 여섯 나라(六國)였으나 나누어져 12個國으로 되었다고 辰韓편에 記錄하고 있다.

다시말해 三國遺事 辰韓편에는 辰韓은 곧 秦韓이며 秦나라가 망한 후 秦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겠다는 뜻으로 秦韓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新羅의 直系 祖上은 秦韓임을 알 수 있다.

다시 晉書 秦韓편을 本文을 싣고 解說해 보기로 한다.


辰韓, 馬韓之東, 自言秦之亡人, 避役入韓, 韓割東界以居之, 立城柵, 言語有類秦人, 由是或謂之爲秦韓, 初有六國, 後稍分爲十二, 又有弁辰, 亦十二國, 合四五萬戶, 各有渠帥, 皆屬於辰韓,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地宜五穀, 欲饒蠶桑, 善作縑布, 服牛乘馬, 其風俗可類馬韓, 兵器亦與之同, 初生子, 便以石押其頭使扁, 喜舞善彈瑟, 瑟形似筑, 武帝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復來朝貢, 七年又來.


辰韓은 馬韓의 동쪽이다. 秦나라 사람이 스스로 말한 것이다. 피난와서 적당한 韓나라 馬韓의 경계 지역에서 일구고 살았다. 이곳에 나무로 된 성책을 세웠다. 말은 秦나라 사람과 같았다. 그 연유를 혹 설명한다면 秦韓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였으나 그 후 차츰 12個國으로 나누어졌다. 또는 변진(弁辰) 역시 12個國으로 되었는데 모두 합하여 45만 호였다. 고을마다 각각 거수(渠帥:큰 장수와 같은 사람)가 있었다. 모두가 辰韓에 속해 살았다. 辰韓은 언제나 馬韓 사람들이 만든 主人들이 행세했다. 그리하여 辰韓의 世上을 이어갔다. 그러나 부득이 自立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바르게 본다면 모두가 이민 온 사람들이다. 고로 馬韓의 다스림에 위해서였다. 땅은 좋아 오곡이 잘 되었다. 풍속으로는 풍요롭게 지냈으며 누에를 치고 뽕나무도 길렀다. 그리하여 좋은 합사 비단과 베를 짰다.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길을 기르고 탔다. 그 풍속들은 馬韓과 같았다. 무기인 병장기 역시 馬韓과 같았다.

처음에 아이가 태어나면 평평한 돌로 머리를 눌러 흡사 평평한 그릇처럼 납작할 정도로 하였다. 기쁠 때는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겼다. 비파의 형태는 대나무에 13줄로 만든 것과 같았다.

비파는 秦나라 몽염(蒙恬)이란 사람이 처음으로 13줄로 만들었다.

晋나라 무제(武帝 司馬炎 泰始. AD.265~274년) 때 태강(太康.AD.280~289년) 元年에는 그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方物:여러가지 물건)을 헌납했다. 2年마다 다시와 朝貢을 했으며 7年에 또다시 왔다고 적고 있다.


梁書의 新羅편 本文을 적고 解說해 보기로 한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 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去之, 以秦人故, 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爭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신라자의 그 선조의 본은 辰韓의 종족이다. 辰韓을 역시 말한다면 秦나라 秦韓이다. 서로 萬里의 거리이다. 전하는 말로는 秦나라 때 망한 사람들이다. 秦나라가 망하자 피난와서 馬韓의 적당한 곳에 이르렀다. 馬韓이 분할되어 있는 동쪽 경계에서 살았다. 이 사람들은 秦나라 사람인 고로 이름하여 秦韓이라 했다. 그 사람들의 말과 명물은 中國人과 같았다. 이름하여 나라라 했다. 나무로 된 활을 갖고 다니면서 떼를 지어 도둑질을 하고 길을 가다가도 술과 술잔을 지니고 다녔다. 무리끼리 서로 만나면 부르기도 했다. 馬韓 사람과는 같지 아니했다. 또는 辰韓王은 언제나 馬韓 사람에 의해 움직여졌다고 되어있다.

梁書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辰韓은 秦나라가 망한 후 馬韓으로 피난와서 辰韓이 생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辰韓의 初期에는 馬韓의 制度에 의해 辰韓이 움직여졌으나 후에 辰韓이 독자적으로 自立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新羅는 辰韓에 의해 생겨났으며 辰韓은 馬韓의 制度下에 自生하게 되었다. 그러나 辰韓은 秦나라가 망한 후 피난 온 秦나라 사람들에 의해 辰韓이 세워졌으므로 辰韓은 秦韓임을 分明히 하고 있다. 고로 新羅가 생긴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엄연히 新羅는 秦韓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秦나라가 망한 후 秦나라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일부 君臣들은 얻어먹고 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甘肅省 成縣의 땅이다. 이곳에서 누에를 쳐 비단을 만들어 멀리 西域으로 交易을 한 것은 新羅였다. 그리하여 비단길 즉 실크로드의 길을 연 것은 始林이며 계림(雞林)인 新羅였다. 그러나 辰韓 사람들은 무어라 해도 秦나라가 亡한 후 馬韓의 도움을 받아 辰韓으로 自立하게 된 것은 高句麗의 뿌리인 句驪의 先祖 고리국(櫜離國)의 덕분이었다.


弁韓은 辰韓 후 생긴 諸侯國이라 할 수 있다. 弁韓은 秦나라가 망한 후 辰韓과 떨어져 멀리 中國 서남쪽으로 이주하여 自體로 弁韓을 形成하기에 이른다.

三國遺事 卞韓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卞韓은 百濟라 했으며 一名 南扶餘 즉 사비성(泗沘城)이라고 되어있다. 그럼 卞韓의 本文을 싣고 解說해 보기로 한다.


新羅始祖赫居世卽位十九年壬午, 卞韓人以國來降, 新舊唐書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 後漢書云, 卞韓在南, 馬韓在西, 辰韓吊, 致遠云, 卞韓百濟也, 按本紀, 溫祚之起在鴻嘉四年甲辰, 則後於赫世東明之世四十餘年, 而唐書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云者, 謂溫祚之系出自東明故云耳, 或有人出樂浪之地, 立國於卞韓, 與馬韓等並峙者, 在溫祚之前爾, 非所都在樂浪之北也, 或者濫九龍山亦名卞那山, 故以高句麗爲卞韓者盖謬, 當以古賢之說爲是百濟地自有卞山, 故云卞韓, 十五萬二千三百戶.


신라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지 19년 壬午 때이다. 변한 사람들이 나라에 항복해 왔다. 新唐書․舊唐書에 의하면 변한은 묘족(苗族)의 후예로서 樂浪 땅에 살고있었다. 後漢書에 따르면 卞韓은 남쪽에 있었고 馬韓이 있는 서쪽이다. 그리고 辰韓이 있는 동쪽이라 했다.

崔致遠의 말에 의하면 卞韓은 묘족(苗族)의 후예로서 百濟라고 적고 있다. 안본기(按本紀) 즉 안황보밀(按皇甫謐) 史學者의 記錄에는 溫祚가 일어나게 된 것은 홍가(鴻嘉.BC.20~17년) 4년 甲辰이라고 했다. 곧 그 뒤에 혁거세(赫居世)와 東明의 治世 때 40餘年이다. 이어서 唐書에서 말한바와 같이 卞韓인 묘족(苗族)은 樂浪 땅에 있는 자로서 溫祚의 뿌리가 나타나게 된 것은 옛 東明에 의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卞韓 사람들은 혹 樂浪의 땅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라를 세워 卞韓이라고 했다. 그 당시 馬韓과 더불어 나란히 대치하고 있던 자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溫祚가 있던 그 이전이라고 했다. 都邑地가 아닐 때는 樂浪의 북쪽이며 혹자는 람구(濫九) 용산(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의 이름이라 하였다.

고로 高句麗를 위하는 자는 卞韓者이며 잘못되었더라도 덮어 주었다. 이와같은 것 때문에 百濟의 땅은 변산(卞山)이므로 옛에 이르기를 卞韓이라 하였으며 15만2천3백 家戶였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通해 卞山을 찾아보기로 한다. 사전 130쪽에는 卞山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卞山은 절강성(浙江省) 오흥현(吳興縣) 西北 18里로 되어있다. 또한 隋書地理志에는 長城縣에 卞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환우기(寰宇記)에는 卞山이라고 되어있고 郡國志에 의하면 卞이 화하여 옥을 캐는 곳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했다. 주처풍토기(周處風土記)에는 관 같고 고깔 같다고 하여 고깔 변(弁)이라 했다. 서능효의사비(徐陵孝義寺碑)에는 高弁蒼蒼遙聞天語라 했다. 즉 높은 고깔은 푸르고 푸르며 멀리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과 같다고 적고 있다. 卞山의 주된 산 위에는 3곳의 큰바위가 있고 구슬같은 돌이 수려하여 구름같다고 했다. 또한 구슬같은 바위는 최고의 승리자라 했으며 山에는 西쪽 편으로 피신할 수 있는 동굴의 넓이가 5尺(약 1.5m)이나 되고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측량할 수 없다고 했다. 서로 서로 전해오는 말에는 唐나라 말기 누른 새집이 어지럽게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피신처라고 적고 있다.


다음은 通典에 있는 卞韓을 살펴보기로 한다. 本文을 싣고 解說해본다.


弁辰, 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風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竈皆在戶西,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自立爲辰王, 後漢光武建武中, 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 帝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靈帝末, 韓濊竝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人韓者, 獻帝建安中, 公孫康分屯有有鹽縣, 屯有, 有鹽, 竝漢遼東屬縣, 竝今東夷之地, 以南荒地, 爲帶方郡, 遣公孫摸, 張敞等, 收集遣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魏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 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干有餘人, 部徒事與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晋武帝咸寧中, 馬韓王來朝, 自後無聞, 三韓蓋爲百濟新羅所呑幷.


弁辰 즉 卞韓과 辰韓은 더불어 함께 섞여 살았다. 역시 성곽(城郭)도 있었다. 의복도 사는 곳에서 더불어 辰韓과 같았다. 言語와 風俗도 서로 같았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다른 데가 있었다. 부엌을 설치하고 있으며 모든 집들은 서쪽이었다. 처음 朝鮮王 準은 위만(衛滿) 魏滿을 위하는 곳에서 파하였다. 그리하여 이내 장수와 수천 명의 무리들과 함께 바다같은 넓은 땅으로 들어갔다.

馬韓을 공격하여 격파한 후 자립으로 韓의 王이 되었으나 準의 이후 멸하고 끊어져 버렸다. 그후 馬韓 사람들은 自立으로 辰韓의 王이 되었다.

後漢 광무제 건무(光武帝 建武.AD.25~56년) 중 韓人 염사인(廉斯人)이었던 소마시(蘇馬諟) 등은 樂浪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 나아갔다. 소마시(蘇馬諟)는 제왕으로부터 봉작을 받아 漢나라의 염사라는 곳에 邑의 임군으로 되었다. 그 당시 使臣이 속해있는 곳은 樂浪郡이다. 그후 四時로 朝鮮國이었던 樂浪郡의 조정에 배알하였다.

後漢 영제(靈帝.AD.168~172년)말 韓나라와 예맥(濊貊) 등이 함께 일어나 郡과 縣을 능히 다스릴 수 없었다. 이때 百姓들은 고통과 어려움에 봉착하여 많은 사람들이 韓나라로 흘러들어 왔다.

後漢 헌제(獻帝.AD.189년) 건안(建安.AD.196~220년) 중 공손강(公孫康)은 둔유(屯有)를 분할하여 염현(鹽縣)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둔유(屯有)와 유염(有鹽)은 漢나라의 遼東郡에 속하게 하였다. 이곳은 모든 東夷들이 어우러져 있는 지역이다. 이 남쪽으로는 황폐한 땅으로서 帶方郡에서 다스리고 있었다. 공손모(公孫摸)와 장창(張敞) 등이 유민들을 거두고 모아 군사를 일으켜 韓나라와 濊貊을 정벌하므로 옛부터 살던 백성들은 점점 흩어져 나갔다. 그후 倭와 韓나라는 하는 수없이 帶方郡에 속하였다.

魏나라 경초(景初.AD237~239년) 명제(明帝.AD227~233년) 때 밀사를 帶方郡 太守인 유흔(劉昕)을 파견하였다. 樂浪太守 선우(鮮于)에 이어 월(越)과 해(海) 즉 넓은 땅 두 곳에 郡을 정했다. 여러 韓나라의 지혜있는 臣下들은 고을과 임군의 옥새와 관복을 겸하여 하사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고을의 장은 그 풍속대로 좋은 옷과 상투건의 수건을 하였다. 아래 벼슬을 가진 집은 제후왕이 있는 조정에 나아가 배알할 때 모두 임시나마 옷과 머리수건을 하고 자기들은 관복을 입었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상투건의 수건만 둘렀다. 부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수풀처럼 배열했으며 본래 樂浪은 총괄적으로 다스리는 朝鮮의 나라였다. 그리하여 辰韓이 나누어져 여덟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樂浪이라 했다.

晋나라 무제(武帝.AD.265~274년)인 司馬炎時 함영중(咸寧中.AD.275~280년)은 馬韓王을 뵙기 위해 조정을 찾아왔다. 그 후 들은 바 없었으며 三韓은 百濟와 新羅에 합병되어 사라지게 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本文에서 朝鮮王 준(準)에 대하여 言及해 보고자 한다. 朝鮮王 準은 箕子朝鮮 41代 마지막 왕이었던 哀王이다. 燕나라 때 노관(盧綰)의 반란으로 山西省 太原에 있던 箕子朝鮮은 南으로 넓은 바다와 같은 땅으로 도망가 살았다. 그곳은 秦나라가 망한 후 빈땅과 같은 곳이었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西安이다. 이때 箕子朝鮮 마지막 王이었던 哀王이 세운 나라가 馬韓이다. 馬韓王이 된 哀王이 바로 준(準)이다. 그 후 康王, 安王, 惠王, 明王, 孝王, 襄王, 元王으로 이어진다고 箕子通紀인 箕子朝鮮聖蹟史에는 記錄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事實을 發見할 수 있다. 朝鮮王準이 亡命하여 세운 나라인 馬韓을 記錄하는 過程에서 都邑을 平壤으로 定하게 된다. 馬韓王인 準 이후 漢나라로 改稱하면서 漢高祖 유방(劉邦.BC.206~195년)으로 記錄되는 것이다. 漢나라로 國號가 바뀌게 되는 것은 馬韓王 8代인 元王이다.

哀王 다음은 康王이다. 康王은 後日 漢나라 2代인 혜제(惠帝.BC.194~188년)로 바뀌게 된다. 惠帝가 바로 朝鮮王滿이다.

現在의 歷史 記錄에는 漢나라 惠帝의 이름이 영(盈)으로 되어있다. 盈은 가득찰 영자이며 滿자도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漢나라 惠帝는 王滿인 셈이다. 馬韓王인 康王이 죽은 후의 휘호는 惠帝라고 箕子通紀에는 記錄되어 있다. 또한 司馬遷이 쓴 史記를 山東大學에서 史記辭典으로 出刊한 책에는 朝鮮王滿은 漢나라 2代 王을 惠帝로 밝히고 있다.

馬韓王의 6代인 孝王은 죽은 후의 휘호가 武帝라고 밝히고 있다. 무제(武帝.BC.140~135년)는 漢武帝이다. 바로 康王인 王滿의 손자는 孝王이며 孝王은 漢武帝로서 朝鮮王 우거(右渠)임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다면 漢高祖 劉邦은 箕子朝鮮 마지막 王인 哀王임을 否認할 수 없다.

馬韓王의 7代 王은 襄王이다. 襄王이 죽은 후의 휘호는 宣帝다. 宣帝의 뒤를 이은 왕이 元王이다. 元王은 漢나라 원제(元帝.BC.48~44년)로서 죽은 후의 휘호 역시 宣帝라고 記錄하고 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馬韓王으로 出發했으나 元王인 元帝 때 와서 비로소 漢나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보아야한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처음에는 馬韓으로 始作되었으나 元帝 때 이르러 나라이름을 漢나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漢나라는 馬韓으로부터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箕子朝鮮聖蹟史 本文에서 襄王이 죽은 후의 휘호는 섭선제(燮宣帝)로 되어있고 元王이 죽은 후의 휘호는 훈선제(勳宣帝)로 되어잇는 것이 다른 것을 보면 이상하다. 또한 馬韓의 哀王 다음으로 康王의 죽은 후의 휘호는 漢나라 2代 王인 卓惠帝로 되어있고 3代 王은 安王으로서 죽은 후의 휘호는 감혜제(龕惠帝)로 되어있다. 이러한 現象은 惠帝는 王子가 없어 母后가 王位를 계승하여 執權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本文으로 돌아가 대방군(帶方郡)의 位置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796쪽에 있는 帶方郡에 대해 本文을 싣고 解說해 보기로 한다.


漢置帶方郡, 後漢末公孫康割樂浪郡南部爲帶方郡地, 以帶水爲名, 晉因之, 後沒於高麗, 卽今朝鮮京畿道及忠淸北道之地, 故治在今平壤西南, 帶水乃今之漢江也, 自高句驪倂樂浪後, 帶方遂爲高句驪, 百濟競爭之地, 後魏復置帶方縣於此라고 되어있고 帶水, 在貴州遵義縣西北, 寰宇記, 源出帶水故縣西大山, 東至癈胡刀縣注湘江으로 되어있다.


漢나라 때 帶方郡을 두었다. 後漢末 公孫康은 나누어 樂浪郡 南部는 帶方郡의 地域이다. 帶水의 이름이다. 진(晋.AD.265~420년)나라로 인해 생겼지만 후에 高驪 즉 高句麗에 의해 몰락했다. 즉 그곳은 朝鮮의 京畿道와 忠淸北道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京畿와 忠淸北道는 한반도가 아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427쪽에 京畿道는 西京 즉 지금의 西安에서 다스렸으며 섬서성(陝西省) 中部의 地域이라고 되어있다. 반면 忠淸北道의 位置는 地名辭典 463쪽 忠州편에 四川省이라 했으므로 忠淸北道라면 四川省 北部를 말한다. 다시말해 四川省과 陝西省 그리고 甘肅省으로 이어져 있는 四川省 北部 地方이다. 특히 忠淸道라고 한다면 古代에는 四川省과 貴州省 그리고 陝西省 南部로 연결된 貴州省 地方을 일컫는 곳이 忠淸, 淸州라 했다.

漢字地名이 한반도로 流入된 것은 高麗 8代 헌종(憲宗.AD.1028~1049년) 원년(元年)에 걸안(契丹) 軍이 대거 침입해 왔다. 이때부터 고려 조정에서는 변방에 있던 한반도에 漢字의 이름을 定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도 있지만 옛날에는 한반도에 순우리말 식의 마을이름으로 되어있어 漢字로 行政을 다스리던 時期였기에 彊域을 확실히 해두고자 한 뜻에서였다. 그 당시부터 경기도 일대는 양광도(楊廣道)라 命名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八道에 漢字地名을 完全히 定하게 된 것은 高麗 27代 충숙왕(忠肅王.AD.1332년) 때이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순우리말 식의 땅이름으로 되어있었는데 例를 든다면 딱섬․새섬․볼깅이․대섬․뚝섬․밤섬․모래내․샘골․밤골․대곳․서지골․밤재 등의 地名으로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高麗 8代 憲宗 이후부터 契丹의 侵入과 高麗 23代 고종(高宗.AD.1232~1277년) 때 蒙古軍의 侵略으로 因해 高麗는 完全히 초토화되다시피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한반도를 行政的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漢字의 地名을 整理해 둘 必要性을 느꼈기 때문이다.

高麗史나 高麗史節要를 보면 23代 高宗 때의 地名은 107곳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도 90곳은 古代부터 現在까지 한반도에는 地名이 없고 다만 17곳만 大陸과 한반도와 같은 땅이름이 있을 뿐이다. 高麗 23代 高宗 元年이면 AD.1232년이므로 2004년을 기준해 보았을 때 지금으로부터 불과 772년 전에는 한반도에 漢字의 地名이 없었고 순우리말 토박이 땅이름으로 되어 있었다는 事實이다.

고로 朝鮮의 京畿道라면 섬서성(陝西省) 中部地方이며 忠淸北道라고 하면 四川省 北部와 貴州省 北部 그리고 陝西省 南部地域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帶方郡에 속하는 帶水는 그당시 漢江이라 했으므로 지금의 西安 南에서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으로 흐르는 江이 漢江이다. 漢江은 즉 漢水이다.

帶方郡은 湖北省 北部와 섬서성 남부에 있는 安康縣 地方을 말한다. 그후 帶方郡은 지금의 洛陽에 樂浪郡과 함께 倂合하여 洛陽을 帶方郡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시 本文으로 돌아가 풀어보기로 한다. 帶水는 이내 지금에 와서 漢江 즉 漢水이다. 이곳은 高句驪와 樂浪에 병합된 후 帶方郡은 드디어 高句麗를 위하게되자 百濟와 경쟁의 땅이 되었다. 후위(後魏.AD.386~581년) 때 다시 帶方縣이 되었다고 했다.

帶水편을 보면 귀주성(貴州省) 준의현(遵義縣) 西北이라 했고, 환우기(寰宇記)에는 帶水의 원 물줄기는 고현(故縣)의 서쪽인 大山이며 東으로 이르러 큰물이 끊어졌다. 다시 호도현(胡刀縣)으로 이어져 상강(湘江)이 된다고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적고 있다.

本文에서 옛날 다스리고 있던 곳은 平壤의 西南이라 했다. 韓半島를 보면 지금의 平壤의 西쪽은 바다이다. 물론 南쪽은 黃海道․京畿道가 있지만 西쪽은 바다이므로 현재의 平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로 옛날의 平壤인 平壤城은 지금의 西安의 서쪽임을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辰韓과 卞韓은 馬韓으로부터 成長하여 방대한 彊域으로 形成되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三韓의 發生은 河北省 固安縣에서 韓나라로 出發했으나 箕子朝鮮의 後孫들은 馬韓을 세운 뒤 엄청난 天子國으로 發展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後漢書 東夷傳편 韓나라의 記錄을 보면 馬韓과 辰韓, 弁辰의 三韓은 78個國으로 中國大陸의 八割 이상의 强大國으로 成長하게 된 것은 韓나라로부터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要) 「海東繹史」 三韓편과 「上古史의 새發見」 三韓편
진실 (2006-10-22 13:29:30)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던 모든 역사가 의도적으로 조작됐다고 봤을때
(중국인이나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가)
저기서 중요한건 마한이나 번한 진한에 주체세력이 누구냐가 중요한게
아니죠..왜?

저들은 위에서 보여 지는거처럼 말이 서로 통했고(사투리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풍속도 비슷한 같은 종족중에도 매우 가까운종족이고

저들이 진나라와 한나라를 건국했다는게 중요하죠..이글을 펌하면서 가장놀라운건
진나라와 한나라 건국자뿐아니라 건국세력 자체가 삼한에 세력중에 있었다는거죠

나머지 문제는 작은문제라고 봅니다...놀라운 일이죠..저게 사실이라면
이문규 (2006-10-22 14:16:22)  
세잎...

마한이 고구려라는 것은 처음들어 봅니다

라고 하셨는데 마한이 고구려다라 기록한 사서가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아래 원문과 해석본 제시하죠

이 글은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기록된 글입니다.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 · 卞韓 · 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 ·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 · 越 北撓幽燕 · 齊 · 魯 爲中國巨蠹.

“복문 동해지외유삼국, 기명마한 · 변한 · 진한.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 진한즉신라야. 고려 · 백제 전성지시 강병백만 남침오 · 월 북요유연 · 제 · 노 위중국거두.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 월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의 연과 제, 노나라를 휘어 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마한이 고구려라 분명히 기록하고 있죠.
구신 (2006-10-27 17:11:26)  
세잎님은 눈으로 역사를 하시는 분인지라 사서 기록에 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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