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은 대조영 후손 남원태씨
발해 걸사비우는 허국 (許國) 태인허씨 땅 장금산에 세워
고려 최이정권 대씨부인과 서자 최항의 다툼에 숙청 대(大)를 태(太)로 고처 분산
의술의 향약집성방 고향 장금산에서 태어난 대장금
대장금은 발해 대조영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시대 귀화한 황해도 협계 정착한 대씨 였다
성균관 교육 군력 김부식이 로마교육 이의방군사력에 세력에 무너지고
고려는 정중부난은 이의방 구테타 허승 경대승 이의민 시대를 지나고 최충헌 최이 무신시대에 이른다
고려 고종(高宗1236) 23년 때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즉 로마교육 전투 의학과목 으로 고종23에 출판 되었는데 이해가 정중부난 주모자 이의방 추앙하는 최이 (최우)세력시대 해였다
이시대에 대씨부인이 최이의 부인이였다 태산학당 이의방이 정중부에 살해되 그 부하들이 대장금 마을 군사들로 있다가 최충헌 부인 송씨에 이어서 최이 부인이 대씨부인으로 정읍 로마학교식 학당교육 무사들이 전투 구급의약책이 강화도에서 최초로 복간되고 세종때에 이마을 사람 권채가 향약집성방 그리고 향약월례 채취를 만들었다
그걸로 보아 이의방 무신세력 삼벌초가 출판한 전투 구급의료 책이 대장금 마을 출신 대씨부인 삼벌초가 분명하다
태인 허씨 종족 이의방의 고향 금구현을 군으로 승격하였으니 이시대가 대장금 대씨 최이의 후처 대씨부인(大氏夫人) 세력시대 최이의 서자 최항이 세력을 잇자 대씨부인 축출한다
최항이 계모 대씨를 몰아내는 역사에서 대씨 들이 대(大)자에 점을 찍어 태(太)씨 성으로 된다
그래서 현재 정읍지역 호족 송씨 홍씨 임씨 김씨 유씨 이곳 출신이 최의를 죽이고 이어서
송군비 임연 김준 삼벌초군의 실력자 들이 세력을 이어 지자 송송레 송인이 이들을 제거하고 원나라와 황족과 혼인하고 화친하자
송씨 허씨에 반대세력 이곳 세력이 삼벌초 중심세력이엿다
이곳은 허기장군이 돌궐족 터키군에 주둔하다가 당나라 당현종이 그곳으로 망명하여 구해준 세력으로 로마학교 로마식 빨강기와로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름 용장사 빨강기와는 삼벌초군은 진도‘용장산성’ 제주도성, 오끼나와 궁전이 일치하고 있다
로마식 교육으로 이곳 호족의 별도 학당 교육 전투 웅변 음악 의학 4교육교목을 대대로 교육받아
교과서 鄕藥救急方이 고려에서 조선초기 까지 사용
세종대왕이 의학 책을 한국인이 쉽게 배우게 만들려고 한자 이두문을 사용하엿는데
그 글자에서 天乙根 하늘 뿌리 冬乙沙伊 겨을 사리 등
“乙 ”를 인도 구자라트 제국 “ㄹ”와 몽고어 글자 발음을 이용하여 돌궐군 진영에서 사용하였던 허기(이기) 장군의 안록산 토벌후 데려온 노에와 몽고군의 항복군을 수용한 글자로
보이며 또 서역지역 원산지 였던 과일인 감. 차. 석류가 수입 원산지로서 조선시대 태인현 진상품으로 감나무 진상골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했다
고려시대 공민왕 때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경도에서 살면서 대씨 부족을 만나고 또 발해족 여진족 퉁두란과 같이 왜군 아지발도를 남원 지리산 에서 격퇴하여 남원에 땅을 하사 그곳 정착했다
진주사람 유혜손 장군도 여기 지리산서 참전 유자광의 진주유씨들이 함께 정착 살았다
세종대왕이 대씨 태씨를 태씨로 통일 시켰다고도 전한다
세종대왕은 국방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투에 따른 구급치료약초 중국이름을 조선 이름으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이두문이 인도 몽고 터어키 글자로 쉽게 표기하는 것을 발견하고
수양대군이 인도 구자라트글자 ‘ㄹ’자를 ‘乙’ 자로 사용하는 등 한글 이두글자 자료를 누나 정의공주에게 자료를 주고 만들게하였고 수양대군이 조선음악을 수집하려고 정읍에서 노비 허오에게 음악을 배우고 그 자료를 후에 유자광이 정리하여 악학괘범 음악책을 만들었다
세종이 대장금 마을 사람 권채의 향약집성방 책 집필 보조자 윤회 .박윤근. 유호통에게 향약의학책을 만들다가 이곳에서 희귀한 문자를 발견 보완하여 세종의 장녀 정의부인과 수양대군이 한글을 비밀리에 만들었다
권채는 세종대왕의 빈객 권우 아들로서 사가독서 집현전을 시작하였고
그 권채의 집현전 응교 책임을 수양대군이 이어서 한글을 비밀리 만들고 세종 26년 처음 발표에 즉각 반대하는 최만리의 반론에
최만리를 누구도 말못하고 오직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외치고 최만리 세력을 축출시키고 한글이 창제 되었다
문종이 죽자 수양대군은 여기서 친해진 송인수 누이와 딸을 제수씨 단종 왕비로 들이고
이곳 정읍 인맥으로 수양대군 천하로 단종내각을 만들고 이어서 단총을 페위하고 세조 자기가 등극하자 최만리 반대세력. 사륙신이 금성대군을 내세우려고 암살하려다 발각되었다
함경도에서 태어난 남원 태씨 영화배우 태현실
여기서 단종왕비 송씨의 추종세력으로 보이는 태명례가 함경도로 가서 남원 태씨로 살고 그 후손 중에서 월남하여 영화배우가 된 태현실이 있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시대 유자광의 세력 보호로 분산된 태씨들이 남원에 모여 들었고 이들이
홍길동이 살고 있는 유자광 고모부 마을 정읍 산내면 장금산에 사는 대장금을 연산군시대 궁중 보건과 요리사로 담당자 사옹원장 유자광이 들여와서 수라상의 무거워 둘로 나누자는 대장금 건의를 하다가 유자광이 아래와 같이 국문으로 죽을 뻔하였다
연산 10년(1504) 1월 1일 2번째 기사
음식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중종 10년에 대장금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중종10년
또 의녀(醫女)인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
중종왕 희빈 홍씨의 중종의 여자 의원 요리사로서 중종이 건강 장수하고 그런 이유에서 태씨 장금이가 중종 어명으로 태시 성을 본성 대조영의 대씨 왕족으로 대장금으로 하사되어 발해왕족 성으로 환원된 듯하다
대씨가 300명이나 전라도에 지금도 산다
대장금은 대씨에서 태씨로 변성하여 친족이 살았는데 중종시대 대장금 출세시대 같은 성씨 태두남이 예전에 없는 갑자기 득세를 하다가
중종 사후에 태두남이 사라진 이유로 보아 남원 태씨 대장금과 배경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두남이 갑자기
1513년(중종8)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정랑과 개령현감·경상도도사·사예·사도시첨정·전라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장령· 남원부사· 선산부사, 직강·사섬시정(司贍寺正)·집의 등을 지냈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양진의 장례를 정성껏 보살폈다가 미움을 받아 성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직중 51세로 죽었다.
대장금은 여자로서 대단한 요리와 한의학에 뛰어난 지식은 한국최초 의학책이 태인허씨계 이의방 고향 금구현는 태인 (태산) 속현으로
이의방 추모 최씨정권시대 대씨부인이 득세한 시절 최초로 갑자기 나타난 은고려 12세기 중엽 大藏都監에서 간행된 우리나라의 옛 醫藥書이다.
여기서 대씨부인과 대장금이 같은 성씨이며 고려鄕藥救急方에서 부터 권채의 향약집성방 허준의 동의보감 까지 모두 태인 허씨 호족마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태인허씨 시조 허사문 아들 이허겸 후손 이의방이고 최씨정권의 삼벌초 군장들이 송군비 부하였고 허준 역시 동의보감이 권채의 향약집성방 鄕藥救急方을 개선한 책이다
안동권씨는 고려초에 안동전투로 공신이였으나 정종 광종이 숙청하여 경상도 청도군 공암면 권능산 양천허씨 외가집에서 권씨 2대 독자 권인행이 사실상 시조로 허씨의 세력으로 이후부터 활동한 역사이다
그리고 고려말 홍건적 칩입에서 이의방 동생 이한 후손 이성계와 권희. 이지란이 만나서 최영세력을 이겨서 넘기고
건국하는데 여기의 3인은 사실상 태인 허기장군 태인허씨 허씨 가문 혈족으로 맺어진 비밀로 보아야 한다
권채는 익산에 귀양온 권근의 동생 권우가 대장금 마을 홍씨에 혼인 권채가 태어나 태인허씨 친족으로 그런 이유에서 의학서적이 권씨. 허씨. 집필한 서적 많다
한국의학의 발상지 진시황제의 5두마차 유적이 있는대장금 마을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등에서 태재익씨등 태씨들이 살았는데 옥정호 수몰민으로 산외면 종산리 등 타지로 이사를 갔다고 진상골 노인 박주석(71)이 말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학생농악단 산외중학생 태기화 학생이 대장금 태현실 처럼 (산외중학교 농악단. 칠보고교. 원광대) 자색이 수려하니 대장금의 이미지로 여겨도 무방하지 않을 까
대장금 마을에 살다가 수몰민으로 산외면 동곡마을 (전봉준의 외손주딸이 사는마을)에 살고 동학군 음악 농악 설장구 파트였다
대조영 걸사비우 허기장군 고려 삼벌초군 최우 최이 시대에서 동학군까지 그리고 지금 농악으로 민족수호와 음악정통을 잇고 있어 대장금은 그역사속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대장금 동족 태기화의 산외중 농악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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