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은 최치원 학당(學堂) 서울대학교 발원지
새만금 어장세금으로 운영한 태산학당에서 한글도 창조
새만금 관광지 인파 몰려도 긴 바다길 황무지로 안다
역사를 알고 무궁한 문화 한민족을 찾아 구경하자
어문골 고려기와에 학당이란 글자가 있는 칠보면 서낭산 학당 유적지에서 출토
학당이란 이름은 전국 어디에도 없고 삼국시대와 신라시대에도 유적이나 자료가 전혀 없는데 오로지 태산군(정읍)의 신라.고려시대 학교 이름이였다
그것이 몽고대국의 침입을 정읍의 송군비장군이 입암산에서 대파시키고 몽고와 화친으로 세력이 고려원종의 왕권으로 돌아온 해에 처음 등장한다
즉 정읍의 송씨 세력이 막강할 시기인 원종2년이다
학당은 서양의 그리스 아테네 로마교육제도 같이 전투 웅변 음악 의술을 주로 가르치는 교육 신라의 화랑도 군사와 같다
신라는 항가리 불가리아와 친교하여 유럽군사교육인 노래와 전투를 배운 로마교육으로 진흥왕때부터 강군이 되어 신라 화랑도가 삼국통일과 당나라까지 축출했다
친백제계 가야족 태인허씨 허세신이 백제로 망명하였으나 백제가 망하여 흑치상지 장군을 따라 당나라로 가서 측천무후의 군사로 이용되었다
서부 촉나라지역 사천성은 돌궐족 방어 군사로 터어키 인도 몽고 말갈 군사를 방어하고 항복지역을 지배하는 백제인 당나라장수로 살았다
그래서 인도 구자라트글자, 몽고글자, 터어키 글자,등 여러가지 문자와 언어를 배우고 접촉한다
그리고 나서 당나라 현종이 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고 여기서 허기 장군은 터어키 군사로 지원하다가 안록산 난을 진압하고 당나라 당현종의 성씨 이씨 성을 하사 받고 당나라에서 신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만들었다
그후에도 참전군 세력이 장보고로 이어서 또 875년 최치원은 당나라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율수현위 군사전투 임무였다
여기서 천재 두뇌 최치원은 황소의 반란군 격퇴 지원군으로 적군의 말과 문자를 척척 해석하였다고 최치원전이 전한다
정중부난의 주역 장군들, 고려청자기, 충열왕시대 일본정벌, 최무선의 진포대첩 500 왜적선 침몰, 등이 이곳 최치원 계보 호족 학당교육으로
이루어 젔다
교육의 수준에 그결과가있다
성균관 향교는 전투 음악 웅변 의술이 없고 예절 도덕 뿐이기에 임진난에도 성균관 출신 장군 김성일. 신립. 배설.등 뺑소니 전술 뿐이였다
그 말과 문자가 한글의 기초문자 자료가 되어 최치원 태산학당에서 모든 한글책의 출판이 되고 한글반포 이전에도 한글문자 를 사용 했다
최치원은 고군산(군산시) 군수 문창태수의 아들이였다 그래서 최치원이 문창후 라고 왕건이 벼슬을 내렸다
고려초까지도 새만금의 호족으로 지배하고 고려 우왕 말기 이성계와 왜적선을 격퇴한 최무선장군도 최치원의 후손으로서 이방원이 부왕 이성계 세력을 모두 숙청하는 시기에 경상도 영천으로 피난하여 영천최씨로 알고 있다
정중부 무신의 반란에도 이곳 호족 이의방, 두경승, 채륜, 김광립, 허승, 이고, 송여신 등이 새만금 부안 옥구 정읍 전주의 호족들이였다
최충헌이 집권하여 이의방 의고향 금구를 군으로 승격 시켜준것을 보아도 최충헌도 이의방의 부장으로 부인이 정읍 송씨로서 후날 송씨 송군비장군이 강화도에서 새만금 해상군으로 출전 으로 몽고 7차 침입군을 입암산 고향땅에서 격퇴하였다
정읍 칠보면 허기장군 지역에서 888년 태산태수로 호족을 규합하고 허기의 후손 허사문 장보고 장군의 후손 장정필과 회동하고
후백제가 일어 났다
이곳 새만금은 최치원 호족의 땅으로 이곳의 어장세금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학당의 운영비로 충당했다
후백제의 교육제도 학당이 후백제가 망하고 왕건의 사위 허사문이 이곳 정읍족통치에서 사병교육학교로 사용하다가 허사문의 후손
현종왕비 3인시대부터 이자겸의 통치시대를 이어 고려 수도 개경의 귀족과 호족에게 군사 가무등을 학당교육 훈련시키다가
총열왕시대 정읍 송씨, 허씨, 세력이 원나라 황실과 결혼하고 고려왕궁이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돌아 온 고려 원종시대 유교 성균관에서 고려'학당'이 대학교육으로 등장 한다
조선 개국으로 다시 서울로 조선태종때에 그대로 고려왕궁과 함께 옮겨왔다
그러나 명나라의 간섭으로 유교종속국으로 되면서 학당은 무술 웅변 의술 전투 과목이 없는 성균관의 예비학습 교육으로 서울에만 존재햇다
조선시대는 유교국가로 되어 성균관이 학당의 상위로 올라가고 현재 고등학교 급 형태로 알려진 이름이다
서울에 동서남북, 4부학당으로 다시 설치되었고 임오군란에 알랜선교사가 민영익을 서양의술(西洋醫術)로 살려내어 신교육 효과를 본 이후부터는 의학교육을 시킨 남부학당에서 신교육이 계승된 전통으로 서울의대의 전신이다.
학당은 석가,예수 공자등등 신앙체가 전혀 없다. 신앙목적이 전혀 없는 가무. 의학. 군사훈련등 독서삼품과 교육같은 지방호족의 교육시설이 신라 화랑교육과 비슷한 특징이다. 그러니까 고종황제가 서구열강의 자문을 받아 학당시설을 이들에게 하사하여 기독교의 이화학당. 배재학당으로 서구종교 학교가 되었다 공자를 모시는 목적하의 성균관은 신앙이 있어서 학당의 우리나라의 정통적 계승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시대부터 그러했는지 구한말까지 이들 서울의 4부학당의 운영비가 대부분 전북 부안.고창.옥구등 서해안의 어장세로 유지하였다 는 것이다
최치원의 고향이 선유도라하고 고려시대 이도, 이허겸, 이자연 이자겸등 궁중세력가의 집성지가 정읍지방의 태인허씨 후손이기에 충분한 연고가 있을 것으로 본다
새만금 고군산(문창)태수아들 최치원 무성서원에 남아있는 초상화
그 학당의 위치는 상춘곡 시인 정극인의 묘역인 칠보면 무성리 학당골(향도골)이였는데 그 학당 옆 마을은 먹의 생산지로 “먹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신라시대 당나라에 수출품으로 신라먹이 유명하였다니 당나라 사신의 연향지인 이곳이 유력하다
신라시대 최치원의 생사당으로 모시는 곳으로 전하는 이곳이 고려시대에는 학당이란 이름으로 호족의 교육시설이 조선 예종시대 정극인이 적극적인 미신타파의 세력으로 위축되었다 하였다
상춘곡 정극인 벼슬시대는 유자광 세력시대
이 해의 최고 궁중 권력 세력가 유자광이 고모부 권채의 묘가 세종대왕의 영능으로 지정되자
이곳에 권채의 묘를 하 사받아 권씨의 제각으로 사용하고 최치원의 사당인 학당은 서낭산으로 이전 더 크게 신축하여 이전하고 정극인에게 운영토록 하였다
이곳을 일제시대 일본이 일본천왕 신사당 성역으로 개조하였다 (지금의 향토관 태산선비 문화터)
해방되어 다시 복원하지 않고 새도가문들이 자기조상 서원으로 난립 학당 흔적은 사라지고 출토 기와에 학당의 글자가 보일 뿐이다
4부학당 중에서 군사 의술을 다룬 남부학당 (현재 남학동 26-30번지로 경성제대 의예과 치과의 자리)에 일제(日帝)가 한국역사를 철저하게 살펴서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통제 할 명분을 합리화 된 이론을 갖추고 설립한 것으로 본다.
백제시대 독서삼품과 교육으로 지방호족 교육시설이 백제 페망 후에 부흥군에서 당나라 참전군으로 '학당교육'으로 은페 되어 있다가 신라말기 최치원에 의하여 빛을 보게되고 고려시대 몽고의 7차 침공에 송군비장군 대승으로 몽고와 화친한 계기가 된다 그리고 삼벌초 무신정권에서 왕권을 고려 원종에게 돌려준 정읍사람 송송례, 그리고 송분 부자의 정권 장악의 시대에 고려사절요 원종왕 조에 "학당"이라는 학당의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이 때만 하드라도 고려의 최고의 학부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 채택의 과정에서 성균관 하부기관으로 소속되었다. 그러나 경당과 학당교육 수료자는 국토를 수 .당. 몽고대국의 침공 국토를 지켰고 . 한성부 4부학당교육은 성균관보다 전통과 국토 수호의 역사가 훌륭하다.
문화에 앞선 일본이 조선의 중심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고종황제가 하사해 버린 이화 배제학당외에 학당을 포함하여 경성제국대학으로 만들었다 서울대는 민족계통의 기능교육을 일제가 제국대학으로 새 장식을 하였으나 근본은 한성학당(漢城學堂)의 남부학당이다.
일본은 성균관이나 향교보다 백제전통에 유래가 있는 '학당'이란 무종교 순수학교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남부학당 치과대학 위치를 근거로 고려학당을 이어받은 한민족 학교로 합당한 교육이념으로 구성해야 할것이다
화랑도는 군사교육은 로마제국 교육으로 음악과전투를 배우는 교육이 풍류도 라고 했다
화랑도의 뜻이다
최치원이 당에서 서양 돌궐족 인도구자라트 군사 문화를 보고 돌아와서 무능한 전투력을 한탄하고 새만금 고향땅 에서 막대한 세금으로 구한말까지 서울학당 운영비로 사용한 유일한 학교 전투 음악 의술 웅변교육 학교였다
그래서 웅변은 정읍 적벽가 화령도(관운장. 조조) 판소리가 되었고 의술 최고의 책 '향약집성방'이 이곳 사람 권채가 만들고 동의보감 역시 이곳 허씨의 연고로 만들어진다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 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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