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출퇴근 12년여 만에 꽤 '뜨악한' 장면을 목격했다. 엽기적인 그녀의 토악질? 눈 뜨고 못 보겠어 닭살 커플의 좌석 합체? 열혈 남자들의 피튀기는 주먹질? 볼 테면 보라지, 기본부터 색조까지 나몰라라 화장하는 여자? 아 답답해 도저히 못 참겠어, 콧구멍 휘휘 휘젓는 남자? 아니다. 바로 앞에서 내 가슴이 콩닥거렸던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통화 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 했더니
장소는 2호선 전철 안. 전철은 이제 막 합정역을 떠나 당산역에 당도하려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내 '옆자리녀'와 '그 옆자리녀'. 그러니까 우리는 나-옆자리녀-그옆자리녀 순으로 앉아 있었고, 모두 각자의 일에 열심이었다. 나는 책을 보고 있었고, '옆자리녀'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그 옆자리녀'는 열심히 리포트에 밑줄을 그어대며 열공모드에 빠져있었다. 이 무심한 질서(?)를 깬 건, 열공모드 '그 옆자리녀'였다.
"저, 통화 소리가 너무 잘 들려요."
"예?"
조용한 지하철 안, 그 말을 들은 '옆자리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얼핏 얼굴을 보니, 점차 굳어지는 것이 기분도 상한 듯했다. '옆자리녀'는 상대방에게 "잠깐만" 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상황을 목격한 나는 생각했다. '그 옆자리녀'의 용기에 대해. 전화 통화가 너무 잘 들린다는, 요즘 세상에 듣기 힘든 그 문제 제기에 대해. 모두 너무 잘 알지만, 쉽게 꺼내기 힘든 그 말의 무게에 대해.
상황이 이렇게 심심하게 끝났다면, 내 가슴이 그리 콩닥거렸을라구. '옆자리녀'는 지하철이 한 정거장을 더 지나도록 조용히 있다가, 이내 '그 옆자리녀'에게 칼칼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저기, 저(문에 기대어 통화하고 있는 분) 앞에도 크게 통화하는데, 저기도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해보세요."
"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그 옆자리녀'는 적잖이 당황했다. 얼핏 얼굴을 보니, 기가 막힌 듯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다들 나처럼 통화하는데 뭘 너만 그렇게 특별하게 구느냐'는 듯, 따지고 드는 '옆자리녀'의 대범함에 대해. 생각없이 감정을 못 이겨 튀어나오는 그 말의 가벼움에 대해.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니 제가 목소리를 크게 했어요? 뭐예요? 제 목소리가 크지도 않은데..."
"그래도 제 귀에는 다 들려요."
"그럼 제 옆자리에 앉지 마시던가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앉았나요?"
"전 뭐, 전화 올 줄 알았나요?"
이건 누가 들어도 '옆자리녀'의 억지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건지 '옆자리녀'는 내릴 정거장이 아닌 것 같은데, 내렸다.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 언쟁을 지켜보는 내내 내 가슴은 콩닥거렸다. 그런데 잠깐, 이게 정말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핸드폰 때문에 방해받은 자유시간 "돌리도"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멜 깁슨은 하루 아침에, 어떤 사고로 말미암아 여자의 마음을 꿰뚫는 남자로 변신한다. 알고 싶지 않은 여자의 마음까지 너무 잘 알게 돼서 후에 문제가 되긴 하지만. 요즘의 내가 그렇다. 너무 잘 들려서 아주 미치겠다.
지하철 안, 내 앞에 선 남자는 오늘 업무차 외부인과 점심을 먹을 예정이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여자(대학생으로 보인다)는 오늘 전공 쪽지 시험을 보는데, 그 뒤엔 맛난 것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 계획이다. 그 앞에 앉은 아저씨 역시 오늘 아침 뭘 먹었는지, 통화 내용은 들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알 수 있다. 아, 그 놈의 입냄새. 또 그 옆에 앉은 아줌마가 남편과 올해 결혼 몇 주년인지, 심지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노약자 좌석에 앉은, 귀가 잘 안들리는 듯한 할머니가 오늘 왜 서울 나들이를 하는지 나는 안다.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안다. 이 모든 게 다 휴대전화 때문이다.
그뿐인가. 점심시간 동료들과 좋다고 나눈 농담, 나는 어디서 들었나 생각해봤더니 지하철 내 옆자리녀에게서 들은 거다(어처구니가 없다). 출근시간의 달콤한 쪽잠도 핸드폰 통화족들에게 반납한 지 이미 오래다(그래서 이어폰을 꽂긴 하는데, 심지어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통화 소리란). 또 지하철에서의 쪽독서(사실 회사나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맘 먹고 책읽기란,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나는 불가능하다)도 불가능하다. 글을 읽던 동공이 어느 새 풀리고 남의 전화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의 놀라움이란. 강조하건대, 내가 일부러 들으려던 게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잠깐 동안의 명상(명상이라고 말하면 참으로 거창해서 민망하기도 하지만). 음악, 영상, 핸드폰 이 모든 게 다 귀찮고 그저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보며 오늘 한 일, 못한 일, 잘 한 일, 잘 못한 일들을 돌아보는 나만의 명상시간도 핸드폰 통화족들에게 방해받은 지도 이미 오래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게 핸드폰 때문이다. 2010년도 지하철 안 핸드폰 소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초월을 넘어선 일은 일상이 돼 버렸다. 그리하여 그 누구 하나 용기있게 "저, 통화 소리가 너무 잘 들려요"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런 '용자'를 주변에서 발견하기란 너무나 힘들다.
일본의 조용한 전철, 부럽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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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지하철 안. 일본은 손잡이 마다 핸드폰을 끄라는 경고문을 달아놨다. 이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일본인들은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용한 도쿄의 지하철이 사뭇 그립다. |
ⓒ 최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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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독도가 지들 땅이라고 우겨대는 통에 그들과 비교하는 것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럴 땐 살짝 일본이 부럽다.
지난해 일본에서의 일이다. 도쿄 시내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일본 방문이 처음이었던 나는 통역이자, 한국인 유학생 언니와 함께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기다리던 전철이 왔다.
그때 마침 유학생 언니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내가 별 생각없이 전철에 발을 들여놓라치자 유학생 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잡아 끌었다. 꼭 받아야 할 전화니, 전화 통화를 끝내고 타자며. 나중에 물었다.
"일본 지하철에서는 핸드폰으로 통화 못하나요?"
"못하는 건 아니지만, 거의 안 해요."
"네? 왜요? 우리랑 너무 다르네."
"일본 사람들은 그래요. 워낙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급한 전화가 오면 어떡해요?"
"통화하고 타면 되죠. 저도 이 문화에 적응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전철에서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아 금방 이렇게 말하고 끊는 사람들도 종종 있어요. '미안해요, 지금 전철안이니까 나중에 제가 전화할 게요'라고."
정말? 믿기지 않았다. 무슨 회의시간도 아니고, 전철에서. 그러나 그날 이후로 여러 번 전철을 타보았지만, 유학생 언니의 말이 맞는 듯, 지하철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없다. 상대방이 무안하리만큼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지만, 핸드폰으로 대화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몇 년 전 책 <당그니의 일본표류기>를 낸 김현근씨도 출판기념회에서 비슷한 이야길 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스미마셍"인데, 이는 '당신에게 피해를 끼쳐 죄송합니다'란 의미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면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이라는 다소 무서운 발상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탓에 김현근씨는 "항상 세세하게 다른 사람을 신경 써야 하고 꽉 짜여진 틀에서 생활하는 것이 종종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고 했지만, 때때로 나는 부럽다. 그렇게 '잘 짜여진' 그들의 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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