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에서 채시라까지 유물 로 그 계승 역사를 추적한다
대장금은 미의녀, 진시황제 불로초 의녀 궁녀 서시 유적 허왕보굴 오두마차
진시왕제 서시 부족마을 허기장군이 양귀비 궁중 가무악공을 노획해와서 국악의 발상지 정읍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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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신이 3000년간 유일하게 이어진 왕래한 사신맞이 가무향연 음성서 정읍 음성향 교통지도 그림
최고의 중국 악공까지 집단수용 훈련한 노래 그것이 정읍사노래이며 모든 한국민요가 이 노래를 모방하여
고유한류 토탬소리 이다
단군, 진시황제 처럼 허기장군이 나온다는 전설의 '허옥보굴'
진시황제 오두마차와 아래 돌로 만든 허기장군 모시기 위한 돌 오두마차를 비교
위의 진시황제 마차를 모방한 칠보면 시산리 '허왕보굴' 허기 장군 굴 앞에 대기한 돌 오두마차
씨름장사대회 선출된 장사사 허장군을 모시는 전설이 일본시조 천조대신 모셔내는 '천석굴' 신화와
같고 478년 일본서기 기록에 대산성반란 사건이라고 대산군 이곳이름으로 사실기럭이 있다
왜 진시황제 오두마차가 여기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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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불로초를 구하러온 3000궁녀 '서시'의 정착지, 그리고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며느리 '견비' 는 견씨 견훤이 당나라 참전군으로 받은 성씨로 보이며..... , 고려 충열왕이 사랑한 애첩가수 무비 태인 시씨, 단종왕비 정순왕후, 중종의 후궁 희빈을 따라 간 대장금, 태인 소녀거지로 숙종왕비가 된 최상궁이 영조의 모친이 되어 이어지니 미인의 꾸밈 문화 수준이 중국망명귀족 미녀족이 집단 거주지였다
남이장군도 역모가 발각되자 애첩을 끼고 담을 넘다가 잡혔다 (예종1년실록 참조)
초나라 항우도 애첩 미부인과 도망하다 자살햇고, 당현종도 양귀비를 데리고 도망가다 태인 허씨 허기장군을 만나서 살아 났다
이 처럼 호걸들은 최후에는 부모형제보다 미인애첩을 데리고 바다건너 중국망명족이 이어사는 정읍 음성향과 부안변산등 연관을 살펴본다
미인도를 그린 신윤복 고종황제 초상화를 그린 채영신의 증손녀 탈랜트 채시라 까지 시대를 빛낸 미인이 줄을 잇고 있는 역사가 있다
삼한 이전부터 중국대륙에서 대황제 왕족 귀족이 정치몰락이 닥치면 도망치는 곳이 한반도 이다
중국사신이나 상인행열이 삼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한번도 중단없이 매일 지나 는 전국 유일한 곳이 정읍이다
그리고 인도 간지스강 처럼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산내면 만경대에서 갈담까지 동류수 물이 흐른다
남방계 왕권이 백제 서울을 공주와 금마를 버리고 부여를 선택한 이유가 동류수(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강변터)
이기 때문이다
인도 중국의 신앙지 성역으로 여기는 이곳 산내면 옥정호 동류수에서 중국사신을 접대하고 가무향연 악공을 양성하고 긴 역사
에서 중국의 귀족은 나라가 위태로울때 이곳에서 사신으로 왕래하며 알고지낸 수령에게 금은 보화를 잔뜩 지고와서 변복하고 숨어 살기 알맞는 곳이 철옹성 요새지 산내면 지역이다
1971년 전국 대입예비고사에서 전국1위 성적이 대장금 탄생지 너디 마을 임방현의 딸이 차지 했었다
당나라 양귀비 미녀시대 현종황제는 위기에서 ' 내 땅만 남기고 참전국이 미녀 보물은 다 가져가라' 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가야망국으로 청도에서 온 태인허씨가 당나라 안록산 난에 참전하여 승전 했다
허씨 허기장군이 당나라 잘난 미녀 가무악공 도공을 데리고 왔다
그 증거로 소형 가야 토기를 부안 채석강 성황당 대형 도자기로 만들다가 고려청자기로 발전하여 그 그릇은 왕족 세력 태인 허씨 이자겸 개인 소유로서 이자겸의 땅 정읍과 강진 그리고 이자겸의 외손녀 공예태후 묘에서 주로 출토 되었다
고려시대 송나라가 망 할때에 척씨, 채씨, 두씨, 송씨, 등등의 중국 왕.귀족들이 망명하여 이자겸의 땅 변산 인천 정읍 강진등에서 안전하게 정착시키고 그들 군사세력으로 강력한 집권하였다
척씨는 척준경으로 이자겸의 군부세력이 되었고 채씨는 정중부난에서 채륜으로 금산사 이의방 태인 허승 부안 김광립등 알고보면 모두 이자겸 세력이 김부식 김돈중세력을 척결한 구테타였다
그러나 채씨들이 변성하고 도주하여 살앗으나 오랜세월지나면 자기 땅을 찾고 고향으로 정착한다
신윤복의 호는 시산이다 보통 평민은 호를 지명으로 붙여서 '시산리 양반 '하듯이 불려젔으너 그림이 뛰어나서 화원이 되어 혜원이라는 호가 붙여젓다
그리고 그의 성씨가 한양 신씨라고 하는데 그 한양 신씨는 지금 한명도 없이 모두 본래 신씨 성으로 복귀했다
고령신씨 태인 현감 신잠이 역모죄로 천인이 되어 그 당시에는 신잠의 친족은 강등되어 고령 신씨 족보에서 삭제하였다
그러다가 복권되면 많은 돈을 내고 다시 족보에 올려지게 된다
정읍 설장구 신기남이 고령신씨로 대개 복권을 못하여 살다가 일제시대 호적정리에서 고령신씨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채시라의 증조부가 시산 신윤복의 미인도를 많이 보고 그림의 고장에서 여러 선배의 그림을 모방 묘사하여 필체도 유사하다
군산 태인 신태인에서 살다가 서울로 간것으로 알고있다
화가 신사임당 아들 이율곡을 연산군과 중종시대 도화서에서 근무한 현감의 아들이 권덕여가 벼슬출세 시켰다
그림에 익숙한 가문의 인물이 이처럼 태인현감을 희망하는 이유가 예술의 전통 계승 으로 근거가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예술로 중국사신을 매혹시켜야 안전하기에 신라 고려 조선 모두 국가예산을 투자 했다
그러한 동양 최고의 중국미녀 왕궁이 망명시대는 반드시 이곳 정읍에 연관된 역사와 유적이 존재한다
그 역사와 고증자료로서 예술과 미인이 출처를 고찰하고자 한다
백제 금동향로가 익산 미륵사에서 만들어 젔다고 전북예총 진동규씨는 주장한다
당나라 시대 가무악공들의 음악 연주 모습
송대관은 충열왕시대 쌍화점 , 송인의 후손으로 지금의 가요왕
중국으로 보내는 무속 국쇠당 (매죽리) 토우 호랑이를 만들어 사용한 출토 유물
가야국 이서고국 태인 허씨 땅 호거산 지룡산성이 견훤이 탄생하였다는 지네 전설을
충열왕 허왕후 시대 광주에서 살던 일연이 이곳 운문사에서 삼국유사에 견훤설화를 썻다
정읍 칠보발전소는 호랑이 모양 향단 (호랑이 단)이름 신앙으로 호랑이가 74년 까지
목격한 바 있다
태인허씨 시조 허사문의 탄생지 인접 산외면 지네(공동)마을이 99칸 명당 가옥이 있다
이 마을이 '광주북촌' 견훤의 마을 견씨부인 악공 가무 부족의 허기장군을 따라온 망명족 거주지로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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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허씨(태인허씨) 시조는 시산부원군 시산정 이정숙이 모두 이곳 시산리 이름으로 중국사신맞이 향연터
미인도 시산 신윤복이 그림쟁이로 설장구 신기남 친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채시라 증조부 채영신이 화원 이전 아마추어 시대 그린 시산 성황당 마을 그림
채시라의 증조부 채용신이 그린 무성서원 김관 초상화 그림
국립 전주박물관 에서 탈랜트 채시라 증조부가 정읍에서 그린 채용신 그림설명표
애국기록화가 채용신의 후기 능숙한 솜씨 작품 고종황제 어진
위의 김관 초상화와 마을 그림은 미숙한 아마추어 어린 시절 태인에서 그렸으나 후에 서울에서 능숙한 솜씨 작품으로 고종황제 어진 을 그린 차이가 보인다
채시라 증조부 채용신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묘사에 주력한 점, 많은 필선을 사용하여
1905년 일본이 서울치안군을 장악하여 관직을 마치고 고향땅 태인 익산·변산· 고부·나주·남원 등지를 다니면서 칠보면 김기술 김영상 독립군과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그려 남기는 데 몰두하였다. 1941년 전라북도 정읍 태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동학군 독립군의 태인과 고부를 정읍현에 합하여 없애버렸다
일본측 역적의 고장이라고 해서엿다
채용신은 그래서 주로 칠보면과 태인에서 호남선 철도가 나서 신태인으로 와서 살았다
신태인은 그 당시 호남 최고의 곡창지 철도로 호남여관에서 성산호주 명창이 살았다
궁중에서 가무악공 기생을 담당하는 전문가 혜민서 주관자 홍범식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는 기간에 애국자 행적을 기록하는 그림을 그렸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이하응(李昰應)·최익현(崔益鉉)·김영상(金永相)·전우(田愚)·황현(黃玹)·최치원(崔致遠) 등의 초상과 동학군 등 여인상도 그렸다.
태인현감 신잠이 화가로서 정치를 잘하여 이처럼 사당을 세워 군민이 노래로 기도하는 성황당
이 그림의 냇물이 아래의 만경대 냇물로 이어지고 있다
태인 현감신잠이 그림 그린 매죽리 만경대 냇가에서 시산 신윤복이 여인 목욕도를 그렸다
고려 충열왕시대 학당을 이곳에 세워 시화 학문 무술 가무를 가르친 '학당' 기와글씨
백제가요 정읍사 주인공 '장사꾼'이 아니라 중국'장사'현에 있는 당 현종을 걱정하는 당 악공들의 정읍 음성향,
반등산 ,선운산,에서 충성가가로 불린노래가 정읍사
당현종 피난지 장사현에서 허기가 데려온 악사들이 살던 고창 장사고분 유물들
양귀비처럼 이런 화려한 금신발을 신고 노래하여 정읍사 노래가 보렴 육자배기 농부가 아리랑으로
변천되어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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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아산 장사고분출토물 사치스런 양귀비 같은 귀족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읍에서 귀족 부인의 부장품으로 출토 된 유물
허기장군이 당나라에서 잡아온 도공이 적은 가야고배 제사 그릇을 당나라 식으로 크게 만든 부안 출토물 비교 사진
검정소형그릇 가야인 그릇과 허기장군이 잡아온 도공의 만든 옆에 대형그릇 적품 으로 발전 고려청자기로 되었다
가야국이 망하고 가야족이 백제로 가서 독립군이 된 태인허씨 허기(許奇)가 서해상에서 해적으로 유랑하는 시기였였는데 양자강으로 숨어 들어가서 당현종을 장사현 장가계 요새지에서 게릴라전으로 안록산 군대를 격퇴하였고 여기에 따라간 군사가 이곳 장사현 장량 가문에서 사성을 받아 장보고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장사현은 진시황제 때 대도시로서 잔 시황제가 타고 다닌 5두마차가 태인허씨 시조 탄생굴 허궁실 마을 ‘허왕보굴’ 앞에 만들어저 있고 백제가요 정읍사의 장사꾼도 '장사현'에 간 것을 장사꾼으로 폄하한 글로 지금 가르친다
장가계 장사현 이름 그대로 ‘장사현’은 고창군 무장현 이름 장사고산성도 남아 있고 김수로왕 토탬 거북을 상징하는 고인돌 마을이며 그 무장면 장사땅 고분에서 금관 금신발등 이 대량 출토되고 있다
이자겸의 땅 정읍사 노래 정읍 삼산동 음성향 고려 음성서 사신맞이 터 삼신산 연못
정읍 삼산동 음성마을 삼신산 3섬은 거북 종교신앙으로 김수로왕 이 우임금 부친 곤이 세발자라 비내리는 기우제 신으로
모신 토탬신당이다
태인 피향정 남원강한루 연못의 섬이 거북이며 태인 피향정이 허장군 굴 밑에 원래 있엇는데 태종이 태인으로 옮겼다
신라 경덕왕때 아찬으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가서 공을 세워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李氏)의 성을 사성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허기허기(許奇)데 당나라 시기에는 이기로 사용했으나 당나라가 망하자 귀국하여 본성 허씨로도 사용하여 후손 허사문이 견훤 또는 왕건을 돕다가 왕건의 사위가 되어 태인 허씨 시조가 되었다
당나라 반적 토벌군 최치원의 쌍분기 사랑소설등 유물이 잇는 최치원 박물관,
귀국하여 그 교육이 태산학당(무성서원)에서 송세림이 고금소총 소설을 지어
연산군시대 출판했다
이 허기장군 호족 지역 여기서 모인후 4년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웟다
당나라 율수현위 이름으로 율수제였는데 유자광이 국비로 크게 성황산에 지어 옮기고
백제시대 대시산군이 지금 시산리로 부른다 태인 허씨를 시산허씨라고 고려시대 불렀다
이곳 수려한 경치 태산 학당에서 시와 가무를 가르친 중국사신 가무잔치와 허씨 송씨 고려 궁중세력 자 고향으로
정읍사 노래 예술의 근본이 되었다
민족문화 예술 발상지 정읍에서 전통문화 행사는 백제가요 정읍사, 쌍화점, 대장금은 어디에도 없고 먹고 쓰기 만하는 소비행사 현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지금은 칠보중학교 졸업생 학생들이 40대가 되어 쌍화점 단종왕비와 대장금과 채시라 이야기를 하며 자부한다
권희덕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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