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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 博爾濟吉特氏 1613~1688)
효장문황후는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보얼지지터)씨로 이름은 포목포태(布木布泰/부무부타이)이다. 만력 41년 2월 8일(1613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며, 청나라 태종(太宗) 애신각라(愛新覺羅) 황태극(皇太極/홍타이지)의 비이며,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조카이다. 몽고 과이심(科爾沁/커얼친)부[지금의 통료(通遼/퉁랴오)] 패륵(貝勒) 채상(寨桑)의 차녀로, 천명 10년(1625년) 노이합적(努爾哈赤/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인 황태극의 처가 되었다. 천총 3년 고륜옹목공주(固倫雍穆公主) 아도(雅圖)를 낳았고, 6년에 고륜숙혜공주(固倫淑慧公主) 아도(阿圖)를, 7년에 고륜단헌공주(固倫端獻公主) 숙철(淑哲)을 낳았다. 숭덕 원년(1636년), 황태극이 연호를 개정하고 황제를 칭하자, 영복궁 장비(永福宮 莊妃)에 봉해졌다. 숭덕 3년에 황태극의 9번째 아들인 복림(福臨)을 낳았다. 복림이 즉위한 후[연호는 순치(順治)], 황태후가 되었다. 8년 2월에 존호를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고 올렸다. 그리고 8년에 다시 존호를 소성자수공간황태후(昭聖慈壽恭簡皇太后)라고 올렸다. 13년 12월에는 소성자수공간안의장경황태후(昭聖慈壽恭簡安懿章慶皇太后)가 더해졌다. - 중국 위키 백과 효장문황후
장비는 몽고 과이심부 사람으로, 이름은 박이제길특 포목포태이다. 일설에는 장비의 아명이 대옥아(大玉兒)라고도 한다. 1626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황태극에게 시집와, 측실복진이 되었다. 당시 황태극은 장비의 고모인 철철哲哲(효단문황후)과 언니인 해란주海蘭珠(민혜공화원비敏惠恭和元妃)와도 혼인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황태극이 황제를 칭하자, 1636년, 영복궁 장비에 봉해졌다. 사실 그녀는 그닥 총애받는 비는 아니었다. 황태극의 총애는 언니인 해란주에게 있었다. 만약 대복진인 철철이 해란주의 고모가 아니었으면, 해란주가 대복진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고모인 철철이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장비 자신도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해란주는 장비보다 6개월 먼저 임신하여 1637년, 아들(황태극의 8황자)을 낳자, 황태극의 총애는 극에 달하였으나, 1638년, 해란주의 아들이 급작스럽게 죽어버렸다. 황태극은 크게 상심하였고, 해란주의 아들이 죽은 이틀 뒤에 태어난 장비의 아들 복림은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해란주의 상심은 말이 아니었고, 1641년, 해란주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해란주가 죽자, 황태극도 크게 상심하였고, 결국 1643년, 황태극도 붕어했다. 다음 황위에 오른 것은 장비의 아들인 복림(연호는 순치)이었다. 복림의 나이는 고작 다섯 살이었고, 청나라의 관습 상 황태후인 그녀는 아들의 섭정을 할 수 없었다. 복림의 섭정왕은 황태극의 배다른 동생인 도르곤이었다. 도르곤은 중원에 입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하였고, 어린 황제의 섭정인 그의 권력은 가이 위협적인 것이었다. 효장황태후가 된 장비는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도르곤과의 혼인을 결심한다.(야사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도르곤은 복림이 12살이 되던 1650년에 젊은 나이로 죽게 되었고, 복림은 원만하게 친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661년, 복림은 사랑하던 동악비의 죽음 앞에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혹은 천연두로 죽었다고 한다.) 1662년, 태황태후가 된 장비는 복림의 3황자인 현엽(연호는 강희)을 즉위시켰다. 6살이었던 현엽의 섭정은 4명의 고명대신인 색니, 오배, 소극살합, 알필륭이었다. 그 중 색니가 일찌기 세상을 뜨고, 오배와 알필륭이 당을 지어 소극살합을 제거해 버렸다. 그 위기의 순간에서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현엽이 오배를 제거했다는 것은 아마 그녀의 훌륭한 교육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청나라의 대 위기 속에서 알게 모르게 크게 작용했던 장비는 강희 26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유체는 황태극의 곁에 묻히지 못했다. 현엽은 조모의 유체를 끝내 매장하지 못했고, 그 아들인 윤진이 옹정황제로 즉위하면서 장비는 소서릉(昭西陵)에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그녀가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차마 황태극의 곁에 매장할 수 없어서 현엽이 계속 매장을 보류했다고 한다. 그녀의 무덤은 아들 복림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장비에 관한 전설은 많은 데 그 중 하나는 명나라의 신하인 홍승주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황태극은 당시 포로로 잡은 홍승주를 청나라에 귀화시키기 위해 애를 썼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애첩인 장비를 시켜 미인계로 그를 꼬셨다고 한다. 장비는 성심성의껏 홍승주를 설득했고 그녀에 의해 설득당한 홍승주는 청나라의 동량이 되었다.
그리고 '태후 하가'의 전설이 있다. 황태극의 이복 동생인 도르곤(태조 누르하치의 14남)은 어린 복림의 섭정왕이었다. 그는 능력 있는 장수이자, 정치가였다. 황태극 사후, 어린 복림을 위해 중원을 장악했던 그는, 점점 세력이 커져 황권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장비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도르곤과 혼인했다고 한다.(둘이 서로 사랑했다고도 하고, 도르곤의 강제였다고도 한다.) 1450년 도르곤이 죽자, 그 다음 해인 1451년 복림은 도르곤의 반역 증거를 잡아, 그의 모든 직책을 삭탈해버렸다. 도르곤의 친형인 아제격은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고, 도르곤의 묘는 훼상되었다. 도르곤의 처첩은 다른 왕족들의 노비로 보내지게 된다.(그 중에서는 조선에서 온 의순공주(효종의 양녀)도 있었다) 그리고 일설에는 도르곤과 장비가 서로 사랑하여, 복림이 황태극이 아닌 도르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태후 하가'의 전설의 근거는 도르곤이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고 불렸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도르곤은 맨처음에는 '황숙皇叔섭정왕'이라 불리다가 어느 순간부턴가 '황부섭정왕'이라고 불렸는데, 그 까닭이 도르곤이 효장황태후와 혼인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도르곤이 죽은 뒤, 그의 죄명 중 하나가 내궁을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내궁을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은 황태후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궁궐 깊숙히 있는 황태후의 처소인 자녕궁慈寧宮을 드나들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는 아직까지는 없다. 아마도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이가 삭제했을 지도 모른다. [출처] 청나라 초기 발전에 기여한 장비|작성자 보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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