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현종실록] 5.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도심안 2009. 9. 27. 00:22

현종실록] 5.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 번째는 고려국왕의 거란 입조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증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공식 천명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률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홍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홍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 20척을 이끌고 구두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여 퇴각해야만 했다.

이렇듯 쉴새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에 다시 야률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며 야률행평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 해 4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냉담했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6년 야률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들이 고려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하자 이듬해에 소합탁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O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홍화진으로 나아가 소가죽을 꿰어 홍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홍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 그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성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은 정면으로 맞딱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 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해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되돌아간 소배압은 거란왕에 의해 징계를 당하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 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다 준 그는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내 쉬기도 했으며, 1O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