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의 지세는 경기산하 동쪽을 지키는 관문(關門)이다. 관문의 수문장(守門將)은 단연 용문산(龍門山)의 위용(偉容)으로 충분할 것이다.
남한강을 앞자락으로 하여 여주, 광주 일원의 산자락을 어루만지며 그 곳을 아울렀고 북한강을 옆으로 끼고 강원도를 관통하는 백두대간과 어깨를 나란히 경기산하의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경기오악(京畿五岳:송악, 감악, 운악, 북악, 관악)에 버금가는 장관이요, 요새라 할 것이다.
용문산의 산자락이 미치는 곳, 동북으로 강원도 홍천군, 횡성군, 원주시이고 동남으로 여주군, 광주시, 서북으로 서울시 남양주시, 가평군이니 이보다 더 절묘한 지세가 있을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남한강을 가슴으로 품으면서 강건너 땅 여주, 광주를 생활권으로 강상면(江上面), 강하면(江下面)을 관내에 두고 현재의 광주시 남종면은 과거의 관할 지역이었으니 남한강을 통합한 역사의 고장이다.
그러기 때문에 태초 이래로 흘렀던 남한강변은 민족사가 잉태된 생활무대의 농경문화 흔적을 곳곳에 남겨놓고 있다. '왼쪽은 용문산을 의지하고 오른쪽으로는 호수를 베고 눕다'. 좌거 용문우침호(左據龍門右枕湖), 동접원주남린여흥북지홍천(東接原主南隣驪興北至洪川)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고 있는 양평군의 형승이다. 이적(李迹)은 양근군을 가리켜 좌편으로는 용문에 의지하고 우편으로는 호수를 베개하였다 하였고, 최항(崔恒)은 '지평현(지금의 지제면 지역)의 지세를 동으로 원주를 접하고 남으로 여주를 이웃하며, 북으로 홍천(洪川)에 닿았다고 하였다'.
양평군의 중앙에서 사방을 제압하는 용문산(1천157m)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다. 용문산에는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 하듯 산자수려한 계곡마다 역사의 현장을 품고 있다. 옥천면 계곡의 함왕성지(咸王城址)와 사나사(舍那寺), 용문면의 세심정(洗心亭)과 운계서원(雲溪書院), 서종면의 벽계구곡과 노산정사(蘆山精舍)가 그것이다. 사나사는 고려시대의 고승 보우(普愚) 원증국사(圓證國師)의 묘탑(墓塔)이 있는 곳이다. 고려말기의 유명한 승려로 양평군에서 태어나 13세에 양주군 회암사(檜岩寺)에서 출가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선과에 급제하였으나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불도에 정진하였고 삼각산 중흥사 동봉에 절을 지어 태고사(太古寺)라 하였다. 용문산 소설암(小雪庵)에서 수도하던 중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고 후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비문(碑文)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는데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辯)의 저자이자 조선왕조 건국의 경세가로서 철저하게 불교를 배척, 유교(儒敎) 지상국가를 건설하려던 유가(儒家)다. 그가 마음으로 감복한 불교계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용문면 덕촌리 세심정에 발길이 머문 답사반의 여정이다. 눈빛이 달라지는 사진 기자,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셔터소리에서 답사반 일행은 비로소 명인(名人)의 고향에서 그의 생애를 접하는 순간이었다. 세심정(洗心亭)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조욱(趙昱)선생의 시음(詩音)이 들리는 듯하다.
용문선생으로 추앙받았던 선생의 생애를 상상하며 용문산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기묘 명현 조광조 김식의 문하로 의리의 학문을 숭상하여 석학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욱 선생, 관직에서 물러나 용문산 계곡 덕촌리에 은거할 때 마을앞에 연당(蓮堂)을 만들고 벽계수를 굽어보는 야트막한 언덕위에 정자를 짓고 제액을 세심정(洗心亭)이라 했다.
스스로의 당호(堂號)도 세심당(洗心堂)이라 하고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성리학의 대가로 시문과 서화에도 능했으며 서경덕, 이황, 김안국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우하였다. 운계서원에 제향된 양평 명현의 고향, 덕촌리에 봄볕이 따사롭다.
두물머리, 이적이 말한 양근군의 오른쪽이 팔당댐으로 하여 호수로 변하였으니 절묘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이곳에서 합수(合水)하여 양수리(兩水里)가 된 곳이다. 이 곳에서 북한강을 끼고 20여리를 가면 문호리 벽계구곡의 절경과 만나게 된다.
이곳 역시 양평을 이야기할 때 빼놓아서는 아니될 역사의 인물 이항노(李恒老)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노산정사(蘆山精舍)가 있기 때문이다. 갈대가 많아서 '노문리'란 지명이 생겼다는 이 곳은 주자(朱子)의 무이구곡, 우암(尤庵)의 화양구곡, 율곡(栗谷)의 화담구곡에 버금가는 화서(華西)의 벽계구곡(檗溪九曲)이 산굽이를 감아돌아 선계의 경지가 선연하다.
명현의 고향임을 상징하는 노문리의 벽계구곡은 요소요소에 제월대(霽月臺) 자라소, 묘고봉(妙高峰), 명옥정(鳴玉亭), 일주암(一柱岩) 등 이른바 노산8경이 수입리에서 노문리에 이르는 산줄기와 물흐름이 갈지자(之)로 굽이 굽이 펼쳐져 산수의 묘미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마치 아흡폭의 산수화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아무튼 노문리는 격동의 시대 한말에 이곳에 노산정사를 짓고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출처: 다시보는 경기산하 경인일보 2003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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