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을 들여다보면 북한강을 낀 서종면과 양서면의 서북지역, 남한강변의 양평읍 및 강상·강하지역, 그리고 내륙의 옛 지평현 소속 5개면이 각기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인다.
앞의 두 지역은 과거 양근현 지역으로서 내륙의 지평현 지역과 구분되며, 다시 양근 지역은 북한강변과 남한강변으로 구분된다. 1908년 10월14일 칙령 제69호로 양근과 지평 두 현이 행정적으로 합쳐졌지만 이후에도 두 개의 향교, 즉 양근향교와 지평향교가 공존하고 있고 문화원 활동이 면 단위로도 이루어지는 등 두 개 지역이 여전히 대등한 관계 속에 양평(兩平)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로 볼 때 동북쪽은 산간지역이 많고 농사기술도 강원도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반면 서남쪽은 강 유역으로서 밭보다 논이 많고 그 아래 경기도 평야지대의 영향을 받아왔다. 즉 현 두 개를 합쳐 만든 양평의 지역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생산 기반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북지역에 해당하는 서종면과 양서면 중 서종면은 과거 양주목에 포함된 바 있듯이 강 건너 양주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서면 부용리와 목왕리 일대는 골짜기를 따라 팔정승골, 구정곡(九政谷), 구정승골, 구정골, 구정벼랑, 구정베루 등의 다양한 이름처럼 9정승 3판사가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구정골이 포함되어 있는 산맥은 치악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용문산을 거쳐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끝자락으로 정기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양근의 양(楊), 즉 버드나무는 '주역(周易)'에 의하면 양기에 민감하여 지나치면 마른다고 하였으니(楊者, 陽氣易感之物, 陽過則枯矣) 음기 가득한 두 물이 만나는 이 곳의 정기는 마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승을 배출한 명당과 정승이 묻힌 명당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9명의 정승이 누구인지 확실한 답이 없다. 예컨대 여기에 포함된다는 정창손(鄭昌孫·1402~1487) 묘는 1960년대에 서울 암사동에서, 민희(閔熙·1614~1687) 묘는 1984년에 서종면 노루고개에서 이장한 것이다.
민암(1636~1694) 묘가 있는 부용리 화개산은 구정골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므로 구정골은 그 자체로 아홉 정승을 찾는 것보다는 아홉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그만큼 많은 정승이 묻힌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양근과 지평이 합쳐지기 전의 양근현 읍치는 지금의 군청소재지인 양평읍 양근리와 일치하지만 영조 23년, 즉 1747년에 이 곳으로 이읍(移邑)하기 전까지는 지금의 옥천면 옥천리에 향교와 함께 있었다. 이읍한 이후 그전의 읍치인 옥천은 고읍(古邑)이 되었다.
옥천 읍치에 거주하며 양근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양근(楊根) 함씨(咸氏)를 들 수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양근군에 관한 기사에도 양근에는 토성(土姓)이 넷으로 함(咸)·탁(卓)·부(傅)·경(耿)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근'과 '함' 두 글자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시 '주역'을 들먹이면 함은 감(感), 즉 느낌인데 굳이 함이라고 한 것은 그 의미가 포괄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咸 感也 不曰感者 咸有皆義). 만물의 느낌 중에는 남녀간의 교감만한 것이 없다는데 이수(二水), 즉 두 물이 산자락 끝을 에워싸는 '양근' 그곳은 가히 '함'으로 표현될 만하다.
옥천면 용천리에 있는 사나사에는 함씨각(咸氏閣)이 있어 이 절이 어느 때부턴가 함씨 원찰(願刹)의 성격을 띠었음을 추측케 한다. 이에 더해 사나사로 올라가는 길에는 함왕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함왕혈(咸王穴)이 있고, 사나사에서 더 올라가면 용문산 중간 산 정상에 함왕성터가 있다.
함씨 중시조(中始祖)에 해당하는 고려 태조 공신 광평시랑(廣評侍郞) 함규(咸規)는 고려 12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함유일(咸有一)의 5대조로 평산 신씨 중시조인 신숭겸 등처럼 해당지역의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셔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인데 아직 관련문헌이 나타나지 않아 추측만 할 뿐이다.
사나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 서있는 불양비(佛養碑)의 당상계비문은 앞서 언급한 바 1747년에 있었던 양근 읍치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다.
비신 높이 150㎝, 너비 65㎝, 두께 20㎝(개석은 높이 60㎝, 너비 100㎝, 두께 60㎝) 크기의 불양비 사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비 앞면 비양(碑陽)의 비문은 모두 12행으로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고 더러 떨어져 나간 부분이나 총알자국은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그 내용은 이렇다. 양근군에 사는 나이 많은 주민들 중에 납속(納粟)으로 당상(堂上)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는 당상계를 조직하여 영세불공(永世佛供)을 위해 사나사에 논밭을 시주하고 비를 세운다는 것이다.
비의 건립시기는 영조 51년(1775년)이어서 시기적으로는 이읍 후 28년이 지났지만 이읍에 따른 재정부담을 고려할 때 이들이 집단적으로 납속직을 받게된 동기는 아마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영조 때 간행된 '
(출처: 경인일보 2003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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