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 근대사는 경기도의 어느 지역보다 더 걸출한 인물들로 빛나고 있다.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화서 이항로, 몽양 여운형이 그들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세기는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어느 시대 어느 삶인들 중요하지 안으랴만 특히 19세기는 이후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틀, 사회구성체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세기를 주체적으로 구성한 나라들은 근대시민국가로 발전해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제국주의로 무장된 외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우리의 19세기는 1800년 정조 임금의 서거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어리거나 현명하다 할 수 없는 군주들과 시대적 소명을 잃은 양반사대부들은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는 아래로부터 혁명적 에네르기(홍경래 난, 진주민란, 갑오농민전쟁)와 위로부터의 개혁(갑신정변)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20세기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세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격랑치던 19세기의 한 복판을 양근 땅 벽계에 태산처럼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가 버티고 서 있었다.
벽계(蘗溪)!
다산 정약용의 생가인 마재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오른쪽 강변으로 처음으로 맞닿는 물줄기가 벽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북한강으로 흐르는 한 지류에 불과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꼿꼿한 기상과 그 실천으로써 의병(義兵)투쟁의 정신적 근원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한말 나라의 어려움에 일신의 안위보다 민족과 올바름을 위해 분연히 싸웠던 의병들의 도도한 역사적 흐름이 이 곳 벽계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니, 그곳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벽계는 이미 조선 숙종 이후 사대부들의 은둔지의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숙종 이래 격화된 당쟁으로 고단한 현실을 떠나 자연을 벗삼으며 높고 맑은 정신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하여 북한강 주변의 풍치좋은 곳을 찾아 은둔하며 학문에 정진하게 되는데 벽계도 그런 선택받은 땅 가운데 하나였다.
숙종 때 안동 김씨의 대표적 사상가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벽계에 은둔하여 '벽계잡영(蘗溪雜詠)'을 읊었고, 마재에 터전을 두고 살던 다산 정약용 일가의 전장인 문암장(門巖莊)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화서 이항로의 벽진 이씨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무관하지 않았으니, 그가 이곳 벽계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서는 18세에 과거급제를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홀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30세 전후에 이미 고명한 학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니 전국 각지에서 벽계로 배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훗날 화서학파 혹은 화서문인들로 일컫는 이들은 의병투쟁의 혁혁한 공로자가 되는 사람들이었니, 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면암 최익현·의암 유인석·금계 이근원, 그리고 무인으로 하거 양헌수 등이 그들이며 우리 근대사를 그나마 볼품있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다.
'화서학파'라는 이름에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기상의 푸르름이 있다. 그 이름에는 거대한 외세에 맨 몸뚱이로 조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부여잡고 싸우는 결연하면서도 처연한 눈빛이 겹쳐진다. 화서의 사상은 이 양근 땅 벽계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춘천, 충청도 제천 등지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만주의 독립군이 되었으니 민족사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던 것이다. 양평 땅에 의병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진원지가 바로 양평 땅 지평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지평의 김백선·이춘영·안승우 등 3명의 의병장에 의해 창의된 지평의병은 이후 제천으로 이동하여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전국 최대 의진을 형성, 경기·강원·충청·경상도 산악지역을 석권하였다.
이때 참가한 지평의 포군 400명을 포함하여 양평 사람이 1천여명에 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었을 때도 지평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다시 거의하였으니, 이성서·박광천·이연년·이춘명·이재복 등이 그들이다.
화서의 벽계에 앞서 양평 땅은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이 있어 또 다른 사상적 중심지가 되었다. 대감마을은 여주군이 건너다 보이는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회와 개혁의 원리를 찾기 위하여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사람들이 은밀히 이곳을 찾곤 하였다.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었으되 새로운 개혁과 이념을 고민하며 천주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신앙운동으로 이끌고 있던 권철신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한국의 경우는 경이로움 그 자체라 일컫는다. 천주교 신앙이 외국의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시작된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 자발성이라는 측면에서 양근의 권철신
따라서 19세기를 주체적으로 구성한 나라들은 근대시민국가로 발전해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제국주의로 무장된 외세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우리의 19세기는 1800년 정조 임금의 서거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어리거나 현명하다 할 수 없는 군주들과 시대적 소명을 잃은 양반사대부들은 새로운 시대를 소망하는 아래로부터 혁명적 에네르기(홍경래 난, 진주민란, 갑오농민전쟁)와 위로부터의 개혁(갑신정변)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20세기를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세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격랑치던 19세기의 한 복판을 양근 땅 벽계에 태산처럼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가 버티고 서 있었다.
벽계(蘗溪)!
다산 정약용의 생가인 마재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오른쪽 강변으로 처음으로 맞닿는 물줄기가 벽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북한강으로 흐르는 한 지류에 불과하지만 한국 근대사에서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꼿꼿한 기상과 그 실천으로써 의병(義兵)투쟁의 정신적 근원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한말 나라의 어려움에 일신의 안위보다 민족과 올바름을 위해 분연히 싸웠던 의병들의 도도한 역사적 흐름이 이 곳 벽계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니, 그곳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벽계는 이미 조선 숙종 이후 사대부들의 은둔지의 하나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숙종 이래 격화된 당쟁으로 고단한 현실을 떠나 자연을 벗삼으며 높고 맑은 정신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하여 북한강 주변의 풍치좋은 곳을 찾아 은둔하며 학문에 정진하게 되는데 벽계도 그런 선택받은 땅 가운데 하나였다.
숙종 때 안동 김씨의 대표적 사상가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벽계에 은둔하여 '벽계잡영(蘗溪雜詠)'을 읊었고, 마재에 터전을 두고 살던 다산 정약용 일가의 전장인 문암장(門巖莊)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화서 이항로의 벽진 이씨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무관하지 않았으니, 그가 이곳 벽계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서는 18세에 과거급제를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홀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30세 전후에 이미 고명한 학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니 전국 각지에서 벽계로 배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훗날 화서학파 혹은 화서문인들로 일컫는 이들은 의병투쟁의 혁혁한 공로자가 되는 사람들이었니, 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면암 최익현·의암 유인석·금계 이근원, 그리고 무인으로 하거 양헌수 등이 그들이며 우리 근대사를 그나마 볼품있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다.
'화서학파'라는 이름에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기상의 푸르름이 있다. 그 이름에는 거대한 외세에 맨 몸뚱이로 조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부여잡고 싸우는 결연하면서도 처연한 눈빛이 겹쳐진다. 화서의 사상은 이 양근 땅 벽계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춘천, 충청도 제천 등지로 들불처럼 번져나가 만주의 독립군이 되었으니 민족사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던 것이다. 양평 땅에 의병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진원지가 바로 양평 땅 지평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지평의 김백선·이춘영·안승우 등 3명의 의병장에 의해 창의된 지평의병은 이후 제천으로 이동하여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전국 최대 의진을 형성, 경기·강원·충청·경상도 산악지역을 석권하였다.
이때 참가한 지평의 포군 400명을 포함하여 양평 사람이 1천여명에 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었을 때도 지평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다시 거의하였으니, 이성서·박광천·이연년·이춘명·이재복 등이 그들이다.
화서의 벽계에 앞서 양평 땅은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이 있어 또 다른 사상적 중심지가 되었다. 대감마을은 여주군이 건너다 보이는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회와 개혁의 원리를 찾기 위하여 고민하던 남인 계열의 사람들이 은밀히 이곳을 찾곤 하였다.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었으되 새로운 개혁과 이념을 고민하며 천주학을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적 신앙운동으로 이끌고 있던 권철신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계 천주교회사에서 한국의 경우는 경이로움 그 자체라 일컫는다. 천주교 신앙이 외국의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시작된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 자발성이라는 측면에서 양근의 권철신
(출처: 경인일보 2003년 3월 24일)
출처 : 김중구의 리스크관리문화
글쓴이 : 리스크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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