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대장금의 마을 난국정 물문바위의 옛모습

도심안 2009. 8. 11. 18:44

 

 대장금의 마을  난국정 물문바위의 옛모습

 

왕희지 제자 42인 난정(蘭亭)터가 지금은 난국정 72인으로

원나라 황제를 살려낸 어의 설경성과  허중민 정읍 장금산 고향

 

여기 동류수 흐르는 물에서 왕희지  42인 제자의 시짓는  난정(蘭亭)기 의미로 놀았다

 

 

 

강물가에서  두번이나 위로 옮겨 지은  기념비와 왕희지 제자 42인에서  공자 제자 72인으로 불어난 계원명단


 

오랜 가뭄으로  대장금 마을 옥정호가 가뭄으로 바닥을 보이고 있어서  대장금이 살던시대 강의 모습과 

난국정이 있던  물문바위 모습도 들어났다

 

이곳은 섬진강이 동쪽으로 흐르는 동류수 강변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신들이 놀다가는 절경과 명당터였다

물문바위라는 이름으로 옥정호 구땜 자리로서   중국 왕희지의 42인 제자가 ‘난정기’를 모방하여 바위에 ‘난정(蘭亭)’ 정자를 지었다

중국에서 회계산(會稽山) 북쪽 난정(蘭亭)이 있다고 하여  회문산이  난정 남쪽에 있는데 회계산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 된다

여기 도교적인  ‘난정(蘭亭)’ 42명 계원이름이 후에 조선시대 유교적인 공자의 제자72명의 이름으로 일제시대 구땜 위로 난국정(蘭菊亭) 신축하고 다시 60년 박정희시대 지금 위치로 신축했다 

유교의 충절  매란국죽에서 국화꽃이 첨가되었다

저 깊은 강물아래  옛 42인 선비의  놀이터의 흔적이 보일 듯하다

 강가 물문바위에 이런 위의 난정 (蘭亭)정자를 짓고 수천년 시를 지었던 유적

 

신라 고려 조선의 호족이 소유하고 왕족이 살면서 들이 강물가 바위에 난정 정자를 짓고 시를 짓고  궁중의 후궁 궁녀들이 계속하여 지연으로 올라갔다

특히 유자광은 명나라 식민지 추종자 인수대비와 정적으로 대립되어 연산군 때까지 민족세력으로 막강하고 군사력의 지방 조직이 막강했다

그러나 서얼이라하여 벼슬을 수라간과  가무예술의 담당 사옹관과 장악원정을  주로 맡았다

연산군 말기 연산군이 실성하여 신하를 마구 죽이는 시기에 수라간의 궁녀가 큰 수라상이 들기가 힘들다는 소원을 연산군에게 건의하였다가 형틀에 묶여 매맞고 죽을 뻔했다

그리고 중종반정 후에  유자광의 심복 홍경주 딸이 희빈으로 들어왔으니  대장금이 궁중에 들어온 것은 산내면 너디 홍씨촌 장금산 성황당 무녀 장금이가  유자광 세력으로 입궐함이 확실하다

유자광의 고모부 홍령이 여기 살았고 홍경주 형 홍경림의 후손이 이곳 홍씨들이다


공민왕이 집권하여  홍씨들이 사는 정읍 산내 장금산 너디 대장금 마을은 임실(구고)현과  태산(정읍.태산)현과 접경지역 정읍 산내면  장금산 장금리 마을이다

그런데 공민왕은 구고현 태산현 두곳을 군으로 승격시켜 준다


총열왕시대 송인의 세력을 충선왕이 숙청하고 차례로 이어서  홍씨의 세력을 숙청하여 이들은 정읍. 임실 순창  산간 연고지에

서 숨어살았다

                        의술의 고장   장금산 성황당에서  여기서 선비들의 시짓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 장금이라고

                         불렀고 중종임금이 대장금으로 이름을 하사했다

이중에서 송인의 아들 송안이 이성계 부하로 숨어들어가서  함경도에서 부터 지리산 황산전투와 공양왕때 최영장군과의 이성계 전투를 승리하게 된다 

왜구의 침입으로 홍규와 이성계가 고부, 태산,을 거처서  지리산에서  왜구토벌의 대승전을 이루니 조선창업 세력이 되었다

홍규의 손녀가 익산에서 살았던 권근의 조카 며느리가 되고  홍씨들은 특히 단종왕 시대 수양대군의 세력으로 단종내각에 참여한다


그후 유자광의 세력으로 연산군시대에 홍경주가 군부 벼슬을 맡아서 중종반정에 성공하여 유자광 몫으로 홍경주 딸이 중종임금 희빈 홍씨로 입궐한다


  유자광은 서자라서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일수가 없어서 심복 홍경주의 딸로 종종의 후궁 희빈이 되었다

유자광 고모부 홍령의 친족 홍경주와 그 장형 홍경림 의 후손이 이곳 태인현의 홍씨 집성촌이다

고려시대 귀족 홍씨 마을이기에 입구에는 홍살문(紅門)이 있었고  장금산 서낭당집이 있고 또 음악악공이 사는 ‘재인동(才人洞)마을이 있는  누평현 돌평현의 소재지였다

충선왕이 페지한 현으로 보인다


미인이였기에 중종이 가장 사랑하는 희빈 홍씨의 시녀 대장금은 왜 의술이 뛰어나서 중종의 전문 의원으로  실력을 발휘 했을까

그 이유는 죽어가는 원나라 황제의 병을 치료한 설경성과 충열왕시대 영의정 설공검이 순창쌍치면 쌍화점에서 살았다

그 이유는 그당시 최고의 권력자 송인의 집이 쌍화점 마을  삼장사 불교신앙과 국사봉 당산굿을 같이 신봉하는 이웃 마을이였다 

허중민등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궁중 어의들이 지속된 곳이다

대장금이 중종의 노환을 치료하는 시기에 수차례나 장금산  마을의 태인 순창사람 100세노인 만을  서울로 올라오게 전라관찰사에게 명령하였다

동의보감 이전, 세종때에 홍규의 외손자이며 유자광의 고모부 권채가 '향약집성방' 의학책을 민들었고

권채의 조카 유자광이 국악책 '악학괘범'을 만들었다

악학괘범은 유자광이  최초 한글로  정읍사 동동 기록하고 주자학파 성현은 아악만을 기록했다

한글과 조선민요를 반대하는 주자학파 성현이 유자광을 죽이라고 하였으나 경상도로 좌천된  성현을 유자광이 성종에게 간청하여 복권시키고 같이 악학괘범을 만들었다

중종의 후궁 희빈은 유자광의 힘으로 들어갔다

하필 장금산 사람 노인을 궁중에 불러 들인 내용이 궁금하다

대장금이 모신 임금은 중종이다. 대장금이 어디 사람이라는 기록은 실록에도 없다.


연산군시대 부터 중종시대까지는 정읍사람 유자광(옹동) 송세림 (칠보) 홍경주(산내)등등 태인현사람들이 궁중 수라간에서 의술 치료을 인선차출을 장악한다

고려시대부터 고찰해 보면 정읍출신 궁중여인들, 상궁, 왕비 등등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궁중 수라간 사건 자료를 보면 의문이 풀린다.

고려 충열왕시대, 세계를 통일한 원나라 황제가 중병으로 눕게 되자 전세계의 유럽.중동 등, 몽고의 모든 식민지 나라에서  치료의원을 소집하였는데, 유일하게 완치시킨 사람이 고려국 태인사람 설경성이었다. 그 여파로 정읍 송씨가 궁중 궁인궁녀 권력을 장악하였으니 그 의술은 근세까지 계승되었다.

그 의술의 능력으로 태인사람 궁녀 시무비의 몽고황제 딸인 제국대장공주(충열왕비) 독살사건이 기록상으로는 있었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에 이곳 정읍 옹동에 부처되어 와서 "향약집성방"이라는 의술책을 권채(권근의 조카)가 여기서 채집하여 출판한다.

 가뭄으로 낚시꾼들 만이  모여 들고 선비들이 노래한  이 바위는 언제나 시짓는 소리가 들리려나


 

"우선 중종실록 1524-1533 년간에 이런 글이 있고, 태인 사람들이 자주 오른다. 1524년(중종 19년)의 기록에 의하면,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全遞兒)를 대장금에게 주라" 고 되어 있다. 중종은 의녀들 중에서 대장금의 의술이 최고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33년(중종 28년). "내가 여러 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의녀(醫女) 대장금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고 되어 있다.

대장금의 신상에 관한 기록은 없다. 중종의 병이 완쾌하고 장금산(산내면 장금터널의 산) 남북의 두 100세 장수노인에게 수차레 상경을 명령한 것은 대장금의 인척에게 상을 내리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 건강상 이유로 상경하지 못하자 이들에게 후한 식량과 옷감등 재물을 주도록 전라관찰사에게 하명한 기록이 있다.

이는 대장금이 가족이거나 고향 이웃으로 의술에 전문적 기능인이 아닌가 한다.

1533년 7월 17일 (중종33년)에 대장금이 중종의 병을 치료하면서 태인현 산내면의 송효행씨 부인 김씨와 순창 의 마유량씨 부인 조씨가 100세 이상으로 전국최고 장수노인으로 알려져 중종이 수차례 두사람을 궁중으로 올려오게 하여 중종의 병, 노인병의 표본으로 관찰하고 치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장금이 자기의 고향에서 소문난 100세 이상 노인의 존재를 중종에 알린 때문일 것이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고구려 백제 신라 소리찾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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