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무릉도원기 정읍.산외 ,도원부곡(桃園部曲) 중국 사신맞이터

도심안 2009. 7. 29. 22:03

 

 무릉도원기  정읍.산외 ,도원부곡(桃園部曲) 중국 사신맞이터 

 

무릉도원을 지은 도연명 씨 도성기가 쌍화점 고려가요 중심 리더였다

도원부곡  무릉도원 굴속에서 밖 마을이 굴속 세계를 연상한다

 

태인허씨 후손 이자겸이 통치하며 송나라에서 대거 망명한  부족을  태인허씨 소유땅 에서 살다가

최충헌의 손자 최항과  김준 임유무와 그 일당을 제거 함으로써 무신정권은 100여년 만에 끝나게 되었으며, 홍규와  정읍 송씨 송송래와 송분, 송인이 합세하여 고려 충열왕이 임금이 되어 공민왕때까지 平和의 時代로 宋氏, 林氏, 洪氏, 蔡氏, 등이 산외 인근 지역에서 살았고 정치의 실세에서 도성기 가 궁중가무의 리더로 무릉도원기를 쓴 도연명과  같은 성씨로

정읍송씨와 같이  태인허씨 손 이자겸 연유로 이곳 무릉도원에서 그시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비은 원나라 세조(홀필렬)의 딸 제국대장공주. 비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 조인규의 딸 등이 있었다.

충선왕이 엄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자 충열왕 세력    궁인 태인 시씨 무비세력 집단 환관 도성기· 최세연 등 40여 명을 죽여 야했다. 그러나 이후의 충렬왕은 시무비 가 없어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1298년 왕자가 구테타 형태 정변으로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자 충선왕 왕위는 다시 부왕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따라서 충선왕 정치는 불과 4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개혁대상인 정읍송씨 송인의 세력 권문세족들의 집요한 저항 때문에 세자는 원나라로 쫓겨났다. 이 때  송인(정읍 칠보) 왕유소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 전을 그 후사로 삼으려 했다.

그 후에 총선왕이 송인과 송영방 서흥후전 등을 모두 죽인다


여기서 등장하는 도성기는  무릉도원기를 지은  중국 도연명(陶然明) 의 후손으로 고려시대 태인허씨 족 이자겸이 왕권정치시대 송나라가 원나라에 밀려서 망명하는 송나라 호족이 이자겸과 친분으로 이자겸이 자기소유의 땅에서 송씨 시씨등과 같이 정읍에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월남 난민처럼    가무도공등 노예를 소지하고 온 송나라 부호 망명족이  이전부터 중국에서 연고가 있는  이자겸(태인허씨) 땅  정읍 강진 부안등지에서 고려자기를 만들고 이자겸 왕족 만의 소유물로 발전했다

이시기에 태인 송씨 통치시대에  태인시씨 시무비는 충열왕의 애첩으로 총애를 받은 세력인데 그 중심에 도성기 환관이 리더하고 있었다

고려궁중에서 백제가요 정읍사 가무로 뛰어난 미녀 시무비는  중국 도연명 가문의 도성기의 교육지도에서 새로 유행된다

중국 삼국지 위나라를 사마의가 통일한 진나라가 동진으로 페망할 즈음에 역시 백제의 군사들이 오호16국(五胡16國)으로  절강성과 강소성 점령한 역사 기록이 있다


그리고 당나라 당현종이 안록산에 쫒기어 포위된 촉땅으로 태인허씨 허기가 찾아갔고 그 인연으로 당나라는 망하기 까지 신라의 가야족 백제족들이 참전군으로 활약하고 귀국한다 

보이는 저 무릉도원 마을의 삼진날 봄잔치 계절의  복사꽃풍경이였다

 

  태인허씨 허기. 장보고. 김원웅 최치원. 등 군사들이 귀국하여 중국의 천국전설  도연명 무릉도원기(武陵桃原記) 이야기 위치를 한국에서 찾아보려 하였고  동정호를 서해로 보고 동진강(돈지) 이름이 동정호와 유사하고 중국사신 들이  동진강을 따라  태산(칠보면)태수 최치원과 호족   허씨가 중국 활동인으로서 잘아는  무릉도원의 동굴을  산외면 용머리 용굴로 비유하여 관광을 시킨 것으로 가능하다

동진강의 맑은 물 동쪽으로 올라가서 그 끝 지점에서 산외 용머리 동굴이 있고  그 동굴에서 밖을 내다보면  마을이 보이는데 그마을 이름이 지금도  무릉.도원(武陵.桃原)이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서도  동진강 가의 산외면이   도전부곡(桃田部谷) 대곡부곡 등으로 되어있다

중국 땅의 동정호나 장가계의 무릉도원으로 지칭해서 부르는 곳에는  산외면 용굴속 같은 전설 같은 곳이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 서해로 망명한 어부가 동진강을 따라 올라오니 용굴이 있는 것은 너무나 전설과 같아서 어쩌면 삼국시대 중국사신이 백제나 신라에 와서 이곳 용굴을 보고 덧붙여 지어낸 중국에서 백제이야기 일수도 있고

중국 동진시대 백제가 점령한 중국에서 동진강 산외면 용굴 전설이야기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진다

용굴안에는 삼국시대 홍도(紅陶) 도자기 파편이 나왔다

나는 1973년 산외중학교 박요순 마을학생등 4명과 전등을 켜고 굴 안에 들어가서 발굴당시 보았다 

홍도(紅陶)는 복숭아 천도 복송아로  복숭아는 하늘의 태양으로 여기는 천신의 과일로 여겼다

굴속에 마을을 굴밖에 만들고 무릉도원 마을인데 옛부터 이 마을에는 하늘에서 신이 가마를 타고 내려 왔다하여 가마바위 또는 상여바위가 무릉((武陵)마을 동산마루에 있다

동진강 상류 끝에 이런구멍이 굴속이 있고  깊게 들어간 피난처로 그 유물이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중국사신이 경주로 가는 길이여서 태산태수 최치원 이곳에서 사신접대가  이루어젔고 시짓는 먹을 만드는 이름 먹방산도 있다

먹골. 먹산 먹방골은  옛날 큰학당 학교  근처 지역에 있었다 

이런 무릉도원의 시를 그대로 모방한 상춘곡 시를  서울과 용인에서 살았던 정극인이 이곳에 와서 살면서 그 상춘곡(賞春曲) 시에 ‘무릉이 여기구나’ 라고 하였다

전국과 전라도를 보아도 정극인이 도연명의 시를 모방하였다기 보다는 전설 무릉도원에서 자기가 도연명 같이 귀거래사(歸去來辭) 시를 짓고 사는 신선임을 강조했다

1973 정씨 총친회장 정극인의 후손 (전순천교육장)이 필자를 찾아와서 불우헌집 책도 주시고 정극인의 생애를 이야기 해주셨다

산외중학교 교가에서도 ‘복사꽃 흘러간 상춘곡 고향’으로 개교부터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백제가요 정읍사 노래가  허사문 이자겸...  고려가요 쌍화점이  산내면 송씨..

도성기 도연명 후손 귀화 성씨... 정극인의 상춘곡등  시조 ‘태산이 높다하되...’가  태인 이일제 이항..  등 모든 한글 시는  이곳에서  출발하였다

그 근본은 중국사신의 접대잔치 가무 시를  무릉도원 앞에서 짓는 곳이 이곳과 정읍 삼산동 음성향에서 주로 이루어 젔다

특히 악학괘범을 지은 유자광 세력시대 정극인이 득세하였고 유자광은 칠보 송씨가  큰어머니 이므로 이곳 송씨 집에서 어머니가  살았던 것으로 보면 용굴을 무릉도원으로  대대로 노래하며 국비로 국운을 건 사신맞이 예술잔치는 언제나 국가최고 가무 기능인이 거주하여

무릉도원의 실체  시냇가에서 유상곡수 술잔돌리기 왕희지 놀이 최치원등 중국문화 직수입 가무잔치로 무릉도원은  산외면으로 지칭되는 고증의 자료를 제시 한다

이 용두 마을에는  내가 가르친 산외중학교 학급 박요순 학생의 집이 었었다


 

사신들의 가무잔치가 이제는  산외 한우소고기 명산지인데  중국관광객이 요구하여 산내면(난국정.너디) 대장금 출생지 마을 까지 구경하고 대장금을 만난듯 만족했다는 산외면장의 경험 이야기도 들었다

주민들의 향토역사 문화의  연구가 시급하다 생각 한다

 

도연명 의 귀거래사와 무릉도원기의 기록중국자료 이다

 

(365~427)은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그루 심어두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다.

 시조 태산가 저자  이일제 선생의 태인 마을이 오류리 마을이름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중국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시상(柴桑)출생이고, 

 도연명의 고향 이름 시상(柴桑)은 태인시씨 시(柴)와 같다 

   그러므로 도연명과 태인시씨는 같은 고향사람이였는지 청년학생의 더깊은 연구를 바란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A.D 377-397년), 무릉(武陵)에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를 따라 가다가 어디쯤인지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배는 어느새 복숭아 꽃이 강 양켠으로 흐드러진 곳을 지나고 있었다. 수백보의 꽤 긴 거리를 그렇게 배는 흘러갔는데, 잡목은 보이지 않고 향기 드높은 꽃들이 선연히 아름답게 피어 있었으며 꽃잎들은 분분히 날리며 떨어지고 있어 어부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앞이 궁금하여 계속 나아가니 숲이 끝나는 곳에 수원(水源)이 있었고 그곳에 산이 하나 막아섰다. 거기에 작은 동굴이 있었는데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배를 버리고 동굴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구멍이 아주 좁아 사람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하더니, 몇 십 발자국 나서자 시야가 훤하게 트여왔다.

너른 들판에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름진 전답이며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나 대나무 등속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의 (즉 진시황 이전의) 토지구획 그대로 개와 닭 소리가 한가로이 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가며 경작하고 있었는데 남녀가 입은 옷이 모두 이국풍이었다. 기름도 바르지 않고 장식도 없는 머리를 하고, 한결같이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모습들이었다.

어부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니 집으로 초대해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낯선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돌아 모두들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다. 자기네들은 옛적 선조들이 진(秦) 통일기의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왔는데, 그 이후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 바람에 외부와 격절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대체 어느 시대냐고 묻기도 했다. 진(秦) 이후 한(漢)이 선 것도, 한(漢) 이후 위진(魏晉)시대가 온 것도 알지 못했다. 어부가 아는 대로 일일이 대꾸해주자 모두들 놀라며 탄식했다. 사람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 술과 음식을 내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머문 후, 어부는 이제 가봐야 겠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가운데 누군가가 “바깥 세상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부는 동굴을 나서서 배에 올라, 방향을 잡아 나가면서 곳곳에 표식을 해 두었다. 고을로 돌아와 태수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더니, 태수는 사람을 보내 오던 길을 되짚어 표식을 더듬어 나가게 했으나 다시 그 길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뜻이 높은 은자(隱者)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가려 했으나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후로는 그곳을 다시 찾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 이태백은 여산을 5번이나 찾았고 도연명은 이곳에서 은거하며 '도화원기'를 짓고 '귀거래사'를 읊기도 했다

중국에도 없는 전설지인데 산외 용국은 이 무릉도원기의 굴입구가 한사람들어갈정도크기 라는 말은 정확한 이곳을 말한 표현이다 

중국의 동진시대 국난으로 5호16국이 난립하는 시대  백제족이  점령한 절강 강서지역을 통치했다

동진강과 용굴이 중국의 무릉도원기 전설을 만들고  최치원의  군산 귀신이야기가 중국의 쌍분묘이야기가 되였는지 알수가 업수나

일본의 학생처럼 철저하게 연구하는 정읍 애향 학도들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고구려 백제 신라 소리찾기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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