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문제 "순순히 타이르니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 17년 동안 풍년이 들고 군대가 넉넉하자 고구려를 침략할 야욕으로 국서(외교문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모욕적이고 위협과 야유로 차있었다.
"짐(수나라 문제)이 하늘의 명을 받아 온 천하를 다스리면서 고구려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긴 것은 백성을 잘 다스려서 사람으로서 그 천성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使節)을 보내 조공하였으나 비록 번부(藩附 티베트 지방)라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 고구려왕은 이미 짐의 신하로 짐의 덕을 배워야 함에도 말갈족을 핍박하고 거란족을 등용치 아니하고 신첩(臣妾)으로 만들고 짐에게 조공하는 일을 막다니 이 어찌도 해가 심한가, 작년에는 몰래 병사를 늘리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구려가 영토가 좁고 백성이 소수이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속관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짐의 충신이니 어찌 속관을 두랴. 고구려 왕은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요수(遼水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강)가 넓다한들 장강(長江 양자강)과 비교할 것이며, 고구려 병사가 많다한들 진(陳)나라 병사만도 못하다. 짐이 마음만 먹으면 한 명의 장군을 보내어 힘 드리지 않고 고구려를 멸할 수 있지만 순순히 타이르니 고구려 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붓으로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해야"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몹시 노하며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답할 글을 의논하였으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와 같은 모욕적이고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글이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왕이 쾌히 따르며 강이식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예(濊:수나라 역사책에서는 말갈) 군사 1만 명으로 먼저 요서(遼西)를 침공하여 수나라 병사를 유인하며, 글안병 수천 명으로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 사이에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姜以式 3글자도 보이지 아니한 것은 수나라 역사책만 뽑아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운해(大東韻海)라는 책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 때에는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병마원수(兵馬元帥)라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살수전쟁에서는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병마원수라 하면 몰라도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아 강이식은 병마원수라함이 옳다.
[임유관 대첩]
이듬해(598년) 고구려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으로 유인하기 위해 거짓 패하니 수나라 문제가 30만 명 대군을 동원하여 한왕(漢王) 양량(楊諒)으로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평양을치려한다고 소문을 내었으나 실은 군량미를 실은 배를 이끌고 요해로 들어와 30만 양량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어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바다 가운데로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바다에 나아가 주라후를 맞아 양선을 완전 격파한 다음 군사에게 성벽을 지키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수나라 병사들은 양식이 바닥이 나 굶어죽고 6월에 장마를 맞아 질병으로 사망자가 낭자하여 퇴군하자 강이식이 이를 임유관 상류에서 추격하여 수나라 병사를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고 개선하였다.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해 다시는
출병치 않아
<수나라 역사책>에서는 [양량의 군사는 장마철에 질병을 만났고, 주라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군량미를 보급 받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퇴각할 때 사망자가 10중에 9라 하여 자연의 불가항력에 의해 패한 것이요 고구려 군사에 의해 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체면을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이니 임유관 전쟁은 물론이요 살수전쟁의 기록도 이 같은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것이 많다.
여하간 임유관 전쟁 이후에 수나라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출병치 않았다. 두 나라가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 무역을 재개하여 10여 년 동안 양국 사이에 싸움이 없었다.
604년에 수나라 문제가 죽고 양제(煬帝)가 즉위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어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였다. 607년 양제는 마침 돌궐에 와 있던 고구려의 사신에게 "고구려의 왕이 입조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침입한다는 뜻)할 것이다"라고 야유했다. 612년 11월 동양 역사이래 일찍이 없던 1,133,800명의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양제는 살수대전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로써 양대 전쟁인 [임유관], [살수] 전쟁에서 패한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시조님의 사적이 실려 있다
국내에서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역사책에서는 [임유관]에서고구려 군사가 수나라 30만 대병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은 기록하면서도 마땅히 그 전쟁에서 고구려 군사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수나라가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가 만히 있을 고구려가 아니다. 필시 이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고구려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있었을 터인데 이 부분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서만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 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 장군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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