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이 여자 아시는 분? |
2005/10/31 오후 9:26:31 |
조회:1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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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이 여자를 아시는 분? 아, 생각났다. 나훈아 ‘18세 순이’와 송대관 ‘우리 순이’. 우디 앨런 아내 순이. 현기영 단편 <순이 삼촌> 순이와 김동환 서사시 ‘국경의 밤’ 순이. 이 순이는 배고프고 못 배우던 시절, 순진하고 순정 많은,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순이다. 그땐 몰랐으나 돌아보니 첫사랑 같은, 중년 남성들이 떠올리는 고향의 순이다.
그 순이가 돌아왔다. ‘명랑소녀 성공기’ 양순이, ‘굳세어라 금순아’ 금순이, ‘내 이름은 김삼순’ 삼순이 그리고 ‘장밋빛 인생’ 맹순이. 고졸 이상으로 학력이 올라간 순이는 볼품없는 노처녀, 남편 없는 애 엄마, 궁상맞은 주부가 되어 억척 같이 살아온 상처투성이 여자로 돌아왔다. 요즘 이 순이는 여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으며 시청률 수위를 다투는 티브이 드라마들의 인기 짱 주인공이 되어 있다.
비결이 뭘까. 가방끈이 짧아서, 외모가 떨어져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서 순이가 된 순이. 늘 불안하고 어딘지 허술하고 뭔가 비어 있는 여자 캐릭터다. 고학력 시대의 첨단 소비 사회를 앞서가는 여성 이미지와 얼마나 동떨어졌나. 촌스럽고 쪽팔리다. 해서 완벽한 가면을 쓰고 빈틈없이 사느라 고단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에 돌아와 순이를 보고는 “그래 나야 나!” 하고 가면을 벗어던지며 숨통을 튼다는 역설.
또 있다. 순이 인생에 드리운 억세게 슬픈 여자의 운명. 딱히 가진 것도 믿는 구석도 없는 여자가 겨우 인생 좀 풀린다 싶으면 꼭 남자에게 배반당한다. 최고 버전은 결혼 10주년 날 남편 입에서 지긋지긋하다며 이혼 요구받는 맹순이. ‘나는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자기 모멸의 패닉. 이 비참한 기분을 맛보았거나 상상해본 여성이라면 순이 앞에서 온몸 세포가 쭈뼛 설 터. 그런 여성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들은 그럴 듯은 해도 왠지 헛헛하다. 같은 사정을 들어 여성들이 ‘루루공주’ 김정은과 ‘웨딩’ 장나라의 판타지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 허전함을 달래려고 가설을 세워본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이 늘수록 여성 내면의 자아 성장에 대한 갈증도 마구 커지고 있어서라고. 학력과 외모와 교양과 명품 따위는 어지간히 갖추고 살 수 있는데 그럴수록 가슴 안쪽이 자꾸 허-해진다면.
한마디로 성공은 되는데 성장은 안 되는 거다. 남성이 먼저 겪은 몸살이라 짐작이 간다. 근대 역사상 여자의 이름으로 내려가 본 맨 밑바닥 순이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닐지. 그러고 보니 금순이, 삼순이, 맹순이는 벼랑에 몰린 여성이 맨손으로 고통을 음미하며 기어서라도 다시 올라서는 가열찬 반전의 유쾌한 성장기다. 이런 성장 체험에 목마른 여성들 덕에 순이가 인기 정상을 달리는지 모른다.
성장은 성숙을 동반하는 법. 어린 아들, 조급한 남친, 속좁은 남편, 못난 아버지를 돌보는 순이 아닌가. 성숙의 꽃이 돌봄이라면, 남성들은 성공에 눈이 팔려 일찌감치 내다버린 그것을 여성들은 순이를 통해 찾고 있는 셈이다. 성공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이 시대, 우리는 순이의 너그러움, 호의, 선함을 갈구하는지 모른다. 성공과 함께 나락에 빠진 남성들과 지금 열심히 성공하고 있는 여성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순이, 이 여자를 아시는 분?
- 김종휘 / 문화평론가
출처 : 한겨레 날짜 : 2005년 9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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