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⑮ ‘조선 성자’ 방애인
어느 날 길가에서 사람들이 정신병자인 한 노파를 에워싼 채 놀리고 있었다. 놀림을 받는 노파는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때 어여쁜 한 처녀가 눈물을 글썽인 채 그 노파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노파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노파를 희롱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구경꾼들도 처녀가 마치 어머니인 듯 노파의 손을 잡고 데려가는 모습을 보곤 감격의 눈물에 젖었다. 노파 앞에 나타난 천사는 방애인(1909~33)이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전주서문교회 역사자료실엔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이란 책자의 다양한 개정판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 3대 담임이었던 배은희 목사가 지은 책이다. 강순명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든 창시자로서 그 자신도 성인의 풍모를 지녔던 배 목사가 감히 ‘조선 성자’라고 일컬었던 이는 이 교회 안팎에서 봉사활동을 벌이다 겨우 스물네 살로 생을 마감한 처녀였다.
|
» 서문교회 역사자료실을 지키고 있는 박보석 집사가 지금까지 출간된 <방애인 소전>을 소개하고 있다. |
| |
|
|
서문교회를 떠나 완산구 효자동의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에 들어서니, 직영하는 어린이집에선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놀며 재잘대고, 사무실에선 동남아시아 출신 새터민들의 고충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이곳에선 5년 전부터 ‘방 선생 본받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올해부터는 ‘방애인 기념상’까지 제정했다. 이명자 사무총장은 “전주와이더블유시에이 초기 활동가인 방애인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말했다.
애인은 황해도 황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열여덟 살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전주에 왔다. 당시로선 으스댈만한 신여성이었지만 그는 겸손하고 성실했다. 그는 3년 만에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서문교회 1천여명의 교인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애인은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듯 눈물로 아쉬워하니 두렵기 짝이 없다”면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성심을 다해 봉사할 결심을 했다. 그의 뜻대로 2년 뒤인 31년 9월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인은 2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애인은 황주에서 살던 30년 1월10일치 일기에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들었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라고 했고, 11일엔 “나는 어디로서인지 세 번 손뼉 치는 소리를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라고 했다.
성령 체험후 기쁨에 넘쳐
어렵고 힘든 사람 위해 헌신
고아원 열고 야학봉사
24살때 열병으로 생 마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