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애인 선생의 모범 | ||||
방애인 선생은 주일 오전에는 완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서문밖교회의 확장주일학교인 뒷골·전룡리·바구말의 유년주일학교를 지도하였다. 그녀는 기전여학교 학생 몇 명을 데리고 세 곳을 돌며 함께 지도하였고 밤에는 기전여학교 기숙사생들을 인솔하고 서문밖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여 배 목사의 강설을 들으며 신앙 지도를 받게 하였다. 평일에는 학교의 수업을 마친 후 거리로 나와서 걸인 수용소와 빈민들을 돌보며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자기 주머니를 털어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가식없이 돌보았다. 1932년의 큰 수재를 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이재민 수용소에 자주 들러 구휼에 힘썼다. 이렇게 구제의 삶을 실천하다가 그녀는 드디어 고아원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고, 당시 그녀의 신앙 상담자였던 배은희 목사의 지도를 받아 전주서문밖예배당 근처에 전주고아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고아원 사업은 서문밖교회 부인조력회, 전주 여자기독청년회, 전주 신흥학교 기독학생회 및 사회 유지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후원을 받았다. 이 젊은 여성이 고아들을 위해 건물을 마련하고 수리와 운영을 감당해낸 것이다. 성품이 강성인 배은희 목사도 그녀의 열성에 감복하였고 교회 차원에서 그 사업을 적극 후원하였다. 특히 전주 신흥학교 기독청년회에서는 매년 겨울에 ‘동정메달’이라는 사랑의 배지를 만들어 토요일 오후에 전교생이 나서서 각 기관과 각 가정을 방문하며 판매하였고, 판매 수익금은 전주고아원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무뚝뚝한 남학생들의 사랑 실천 운동은 여러 사람에게 정신적 교훈이 되었다. 이로써 그녀가 젊은 미혼 여성임에도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방애인 선생’이라고 깍듯이 선생 칭호를 붙여 불렀다. 그녀의 별명은 참으로 많았다. 금식기도를 비롯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였기에 ‘기도의 사람’이라 하였고, 굶주린 걸인을 먹이고 치료받게 하여 ‘걸인과 병자의 친구’라 하였으며, 가난한 자를 긍휼로 돌보아 주었기에 ‘가난한 자의 천사’라고 불렸다. 배 목사는 그녀를 칭송하여 ‘거리의 성자’라고까지 불렀다. 방애인 선생은 1933년 6월 30일 방학식을 마치고 고향 황주에 가서,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받아야 함에도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전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고향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인도에 열성을 쏟다가 몸져 눕고 말았다. 그러나 개학날이 다가오자 강한 책임감으로 전주 학교로 일단 복귀하였으나 예수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세는 더욱 위중해져 9월 16일 묘령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의 사랑의 실천에 감화를 받은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와 서문밖교회 여성 교인들, 그리고 전주 여자기독청년회원들, 교계와 사회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이들이 애도하며 소복 차림으로 장례의 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녀에게 감화를 받은 배은희 목사는 『방애인 소전』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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