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알타이 문화와 신라의 흉노족 김알지 왕조

도심안 2009. 5. 15. 05:41

무덤양식과 금관양식으로 분석하는 신라 김알지 왕조의 실체

 

알타이는 산의 이름이다. 알타이산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산맥 이름이 알타이 산맥이고, 그 북쪽의 고원지대가 알타이 지방이다. 알타이라는 말은 금(Gol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타이 산맥 중에 해발 4974m의 만년설을 머리에 쓴 友誼峰(우의봉·중국식 이름) 밑에 마을이 있었다.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이었는데, 이름도 아르타이(阿勒泰)이다.

 

김알지 왕조의 무덤인 황남대총에서는 장신구, 무기, 청기, 토기 등 57,000 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리 제품은 로마 유리 계통으로, 고대 로마 문화권 국가와의 무역관계를 시사한다. 금관과 유리그릇, 철기, 토기 등 57,000 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고신라의 문화를 파악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북분에는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매우 많은 반면에, 예리한 도구나 무기류는 매우 적다. 이러한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남분이 먼저 축조된 남편의 무덤이고 북분은 나중에 축조된 부인의 무덤임을 알 수가 있다.

 

[자료]황남대총 유물















 
 
   
 

북방유목민족의 특징인 적석목곽분양식의 황남대총은 흉노족 김알지 왕조의 무덤이다. 출토된 흉노석상이나 시베리아 스키타이(흉노)족의 특징인 금관이 이를 증명한다.

 

신라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 김알지 후손인 신라 문무왕은 비문에 흉노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 흉노의 휴도왕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휴도왕의 아들 김알제는 한나라에 잡혀간 황태자인데,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흉노의 왕중 가장끝까지 용맹하게 저항한 사람이 휴도왕이다.

 

김알지 조상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나라 의 최대 고민은 북서쪽의 흉노였다. 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민족인 한족의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치 세금이라도 걷듯이 쳐들어 와서 애써 농사지은 곡물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무제는 흉노 정벌을 결심하는 데, 무제의 외조카이기도 했던 곽거병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 전쟁에 나 섰던 인물이다. 곽거병은 무릉박물관에 말을 타고 흉노를 짓밟는 석상이 있 을 정도로 흉노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흉노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준 최초의 인물이기에 무릉박물관을 그의 묘자리에 세운 것이다.


우리에게 곽거병은 ‘한서’ ‘곽거병전’에 나오는대로 “휴도왕이 하늘 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몰수(收休屠祭天金人)”하고 휴도왕의 태자 김 일제를 한나라로 끌고온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나라와 결사항전을 주 장하던 휴도왕은 항복을 꿈꾸던 혼사왕에게 살해당하고, 김일제는 어머니 알 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왔다. 김일제는 흉노의 태자에 서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방치되다시피 잡초가 우거진 김일제의 묘 입구는 사과밭이 가로막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서 묘비가 보이지 않기에 사과나무를 조심스레 제치며 들어가니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 ‘무릉배장묘(茂陵陪葬墓 )’란 금색 글자 아래 ‘김일제(金日제) 묘’란 검은색 글자가 선명했다.

 

흉노 임금 휴도왕의 장자이자 김알지의 조상인 김일제가 이 머나먼 이역땅 에 누워 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머나먼 하서주랑의 언지산 근처에서 체포되어 마부가 되었다가, 무제를 암살에서 구한 공로로 투후( 侯)로 봉해 졌던 굴곡심했던 그의 무덤은 ‘전국문물중점보호단위’라는 금빛 표석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는 조선 정조 20년(1796) 경주에서 밭을 갈 던 한 농부가 문무왕 비문을 발견함으로써 단서가 열렸다. 비문은 발견 당 시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마모되어 있었으나 ‘투후지윤( 侯之胤)’, 즉 “문무왕은 투후의 자손이다”라는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다행히 경 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비문을 탁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그 내용의 일부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를 연결시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은 실학자 유득공(柳得 恭)인데, 그는 ‘고예당필기(古藝堂筆記)’ 권6에서 “김일제의 김(金)이 계림 (鷄林)의 김인가”라고 질문하면서도 “전문을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증거하지 못하겠다”라고 신중을 기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금석문의 대가라는 추 사 김정희는 이 탁본을 베이징까지 가져갔으나 그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 錄)’에는 정작 이 비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 금석문 학자에게까지 버림받은 문무왕비문은 잡석처럼 굴러다니다 가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일부가 동강난 채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서기 8년 왕망(王 莽:C 45∼AD 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사건과 관련이 있 다. ‘한서’ ‘김일제전’은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 다(當母南 卽莽母)”라고 적고 있는데, 김당은 김일제의 차남 건의 손자로서 투후의 지위를 이은 인물이다. ‘한서’의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당과 왕망 은 동복형제가 된다. 이 때문에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은 왕망의 성이 왕씨 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가 왕망이 흉노 후예라는 사 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왕망에 대한 ‘한서’의 기록은 일관성이 부족하고 앞뒤 내용도 서로 모순된다.‘한서’에 따르면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과 동복형제 도 되고,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으로, 당의 이모 부도 되는 등 의문투성이인 것이다.

 

왕망이 실제 김씨인지 왕씨인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왕망의 신제국때 김씨들이 중추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러나 왕망의 신제국이 14년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멸망하면서 왕 씨는 물론 김씨들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후한 광무제를 비롯한 유씨들 이 왕망과 그 지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후한과 맞서 싸우던 김씨들은 불리해지자 장안을 떠나 도주할 수밖에 없었 다. 그중 일부가 한반도 남단까지 이동해 경주 김씨와 가락 김씨를 세운다 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이다.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 (貨泉)이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와 한반도 남단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게 출토되는 것은 이런 이주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문무왕 비문에 나오는 성한왕(星漢王)이 누구인지도 주목된다. 金當(김당) 이 이은 김일제의 투후 지위는 당의 아들 金星(김성)이 잇는데, 마지막 투 후였던 星(성)이 바로 성한왕이고, 그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김알지라는 견해가 있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바로 성한왕, 즉 김일제의 5 세손인 김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에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흉노의 관습과 유독 금을 좋아했던 신 라 왕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유일했던 투후라는 봉호와 문무왕비문의 투후 지윤( 侯之胤)이라는 구절, 그리고 ‘한서’의 김성(金星)과 문무왕비문의 성 한왕(星漢王)은 이 무릉에 배장되어 있는 김일제가 한반도의 김씨들과 떼려 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경주에서 발굴된 천마총 등 이 흉노족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으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고고학 유물이다.

 

김일제 묘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산처럼 솟은 무제릉, 고조 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는 이래저래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머나먼 시안의 한 교외에서 필자는 고조선을 멸망시켰던 한 무제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일제 사이에서 질긴 인연의 끈을 느꼈다. 불교신자 라면 미생전(未生前)에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일단 신라vs흉노와의 공통점 ;칭호 풍습, 관제 ;3씨 귀족성제; 여왕; 유물이 거의 같다.

 

신라 金씨의 조상인 김알지의 이름도 알타이 계통 사람이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알지-알치-알티로 어원 추적이 가능하므로 김알지의 이름은 알타이 출신 金씨라는 뜻으로 Gold-Gold라는 뜻이 중복된 흥미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김알지가 알타이 계통의 인물이라는 것은 그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곳이 鷄林(계림)으로 알타이적인 영웅탄생에 나무(神木)와 직결되어 있고, 그의 후손들의 무덤인 경주의 신라 왕족들의 積石木槨(적석목곽) 형식의 무덤들은 북방 기마민족들의 매장 전통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김알지는 계림에서 발견된 상자 속에서 동자의 모습으로 발견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자 속에서 동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난생신화의 구조이다. 나무, 즉 神木에서 주인공이 태어난다는 내용은 분명히 기마민족인 알타이적 천손신화인데, 정작 태어나는 순간은 남방 농경민족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으로 분장되어 있다.
 
  왜 그럴까?
 
  기마민족이면 떳떳하게 기마민족식 (알타이 민족의 신화인 하느님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天孫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왜 구차하게 농경인들의 난생신화의 주인공처럼 탄생하였다고 꾸며져 있을까? 여기에 초창기 신라의 통치계층 인구들의 말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주지방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인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는 경주 지역의 수많은 고인돌이 증명하고 있다. 그 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수의 기마민족이 이민 왔다.
 
  신라인들은 삼국지 위지 東夷傳(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辰韓(진한)족이다. 중국 서북쪽의 秦(진)나라에서 노역을 피하기 위하여 이민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다수의 토착 농경인들 위에 통치자로 군림하기에는 인구가 모자랐다. 하는 수 없이 여러 代(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드디어 미추왕(麻立干) 때 처음으로 金氏系 인물이 최고통치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때 소수의 기마민족 출신 金氏系 인물이 다수의 농경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농경인들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라고 분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궤짝 속에서 동자로 발견된 주인공이 북방계 토템인 신령스러운 나무, 즉 계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꾸몄을 가능성이 짙다.
 
  현대에 와서도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평소 믿지도 않던 불교의 부처님 點眼式(점안식)에도 참석하고, 한 번도 가 보지 않던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들의 손을 붙잡는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치권으로 부상하려는 사람들이 별의별 변신방법을 다 동원하는 현상은 똑같다.
 
  알타이 고분에서 미라로 발견된 동양계 여인의 盛裝한 모습에서 올린 머리에 장식된 순금제 새들이 있다. 이 새들도 주인공의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였던 영혼의 새들로서 여주인공의 혼을 天上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이마 부분에 커다란 새의 날개 한 쌍(鳥翼形 裝飾)이 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고대인의 영혼관이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아서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알타이에 발굴되어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어 솟대에도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음을 보여 준 사실이다.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은 여성용이었는데,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역사 속의 새는 아마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일 것이다.
 
  신라 왕족들의 무덤 형식은 積石墓(적석묘·Cairn)로서 기마민족의 전통이다. 통나무집에다 시신과 부장품을 집어넣고 막돌로 둥글게 덮는 모양이다. 그 문화를 스키타이-알타이式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의 제작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金씨계 인물들이다.
 
  金씨계의 조상은 김알지이다. 그는 계림에서 발견한 상자 속에 있던 어린아이였다. 같은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도 하늘에서 날아온 말이 놓고 간 알(卵)에서 탄생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의 신화체계는 하늘에서 成人(성인)으로 내려와 통치자가 되는 고조선의 桓雄(환웅)이나 부여의 解慕漱(해모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알이나 상자(櫃)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으로 구별된다. 전자를 天孫(천손)신화라 부르고 후자를 卵生(난생)신화라고 부른다. 아시아에서 천손신화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알타이, 몽골족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농경민족인 대만의 빠이완족, 타이족, 자바족, 인도의 문다족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뚜렷하다. 즉 천손신화는 北아시아의 기마 유목민족들의 신화이고 난생신화는 南아시아의 농경민족들의 신화이다.
 
  漢字로 금(金)이라는 뜻은 「쇠(鐵)」의 뜻과 「순금」의 의미도 있지만 역사에 등장한 신라 김알지로 시작되는 「김」은 순금의 뜻이다.
 
  따로 이야기하겠지만 김(金)이라는 말의 뜻이 기마민족의 언어인 알타이어로 「금(Gold)」이라는 뜻이다. 멀리 터키어에서부터 퉁구스어, 브리야트어, 몽골어에 이르기까지 알트, 알튼, 알타이 등이 모두 알타이어족의 공통적인 의미로 금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라 金氏族들은 일단 알타이 문화지역 출신이라는 심증은 충분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명언이다. 한국 토착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으로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고, 北아시아인들의 敬天(경천)사상을 상징하는 솟대(Totem Pole)가 있다. 한국에 수만 개나 남아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중에 나타난 南아시아 지역의 벼농사 기술자들 사회의 매장풍속이다. 반면에 솟대는 알타이, 야쿠티아, 바이칼, 몽골 지역 사람들의 神鳥思想(신조사상)이 그 뿌리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인의 경제방식은 南아시아적인 농경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北아시아적인 敬天사상이 지배해 왔다.
 
  솟대 위에 앉은 새는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향하여 祈福(기복) 행위를 할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이다. 그래서 端午祭(단오제) 때 솟대를 세우고 솟대 위에 새를 깎아 앉힌다. 새가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神鳥사상이 퍼져 있는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카자흐족, 퉁구스족, 위구르족, 브리야트족, 몽골족, 한국, 일본의 민속이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반드시 새가 등장한다.

 

 

 

그림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말에 달려 있는 曲玉(곡옥)이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신라미술품 연구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다.

신라 왕족들이 왜 曲玉 장식을 좋아했는지, 왜 曲玉이 동물의 태아 때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맹수의 발톱 모양이니까 유능한 사냥꾼의 장식이라고 그럴듯한 해석을 하였고, 또 다른 이는 초승달 모양이므로 月神(월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적도 있다. 어느 의견도 1970년에 나온 S. 루덴코의 파지리크 보고서를 보지 못하고 내린 추측들이었다.
 
  한국고대사에서 曲玉은 신라, 가야에서만 유행하였다. 고구려, 백제에서는 인기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曲玉의 의미를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데, 한국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었으므로 비교연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추측성 의견들만 난무하였었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보고서의 그림으로는 그 색깔이 코발트색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에서 내가 본 실물은 신라의 曲玉과 같은 색인 초록색에 가까웠다.

 

曲玉의 의미는 지루한 추적 끝에 生命(생명)의 상징이라고 결론이 났다. 그리스에서는 이런 모양의 장식을 가지(Egg Plant)라고 부르고, 씨(種)를 잘 퍼뜨리는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에서 왕으로 등장한 사람의 친부모의 금관에서만 曲玉이 달려 있는 현상도 曲玉의 의미가 多産(다산)과 관계 있는 것으로 쉽게 이해된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곡옥으로 장식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파지리크가 있는 알타이 지역의 원주민인 몽골로이드(Mongoloid)가 아닌 이란-아랍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2500년 전 알타이 지역을 방문한 아랍계 기사는 누구인가? 혹시 黑海(흑해)지역에서 맹주 노릇을 하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은 아닐까.
 
  그리스와 교역하며 화려한 그리스 문화에 눈이 부셔 엄청난 생필품을 주고 그리스의 금·은·옥 제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던 바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후에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가 만난 용맹하고 민첩한 스키타이족이었다면 그 사람의 말에 장신구로 달려 있는 曲玉은 그리스에서 처음 디자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 동쪽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시크(Issyk) 호수가 있다. 중국의 天山山脈(천산산맥)의 한 자락이 남북으로 달리는 끝자락에 스키타이 마지막 시기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고도가 높아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이시크澔로 들어간다. 스키타이 왕족들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땅에다 조상을 모셨다.
 
  이시크는 알타이 남쪽 天山산맥의 서쪽 끝자락에 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의 영역이고, 옛날에 스키타이족의 마지막 활동 무대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BC 8세기부터 BC 3세기 사이에 꽃피웠는데 이시크 시기는 BC 3세기에 해당된다. 알타이산의 북쪽 고원인 파지리크 문화보다 약 3세기 늦은 시기이다. 이시크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쿠르간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 몇 개를 러시아系 카자흐인 고고학자 아키세브 교수가 발굴하였다.
 
  유물로는 순금 장식으로 덮은 갑옷을 입은 청년 戰士(전사)가 발견되어 「황금인간」이란 별명이 생겼다. 이 황금인간은 최근 프랑스 과학자들에 의하여 17세 전후의 여성으로 판명되어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마민족 사회에서 최고 통치자급의 의상과 유물을 갖고 있던 사람이 여성이라면 이 여성의 생전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유목민들에게는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하룻밤 빌려 주는 풍습이 있다.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 남자는 부인을 텐트 속에 남겨 둔 채 집을 나가는 풍습이다. 인류학 용어로 貸妻婚(대처혼)이다. 어느 날 카자흐족 마을에 중국인 畵家(화가) 한 사람이 오게 되었다. 그 마을의 絶景(절경)인 깊은 계곡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자 카자흐족 남편은 손님 대접을 잘 하려는 풍습대로 텐트 속에 손님과 자기 부인을 남겨 둔 채 집을 나갔다. 남겨진 두 남녀는 좁은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두 남녀의 잠자리 사이에는 베개를 하나 놓아 도덕적인 경계를 삼았다. 아무도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며칠이 흘렀다.
 
  하루는 벼랑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님에게 여인이 間食(간식)인 양젖을 가져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여인이 쓰고 있던 실크 스카프가 그만 바람에 날려 깊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유목민에게 실크는 비싼 보석을 주고 중국에서 수입한 귀중품이다. 실크로드라는 경제용어가 있으니 알 만한 일이다.
 
  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에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십 길의 벼랑을 기어 내려가 스카프를 주워다 여인에게 주었다. 그 순간 여인이 기이한 소리로 절규하는 게 아닌가.
 
  『싸랑! 싸랑!』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쥐어 준 스카프를 다시 골짜기 밑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싸랑. 그 의미는 「무정한 바보」라고 한다. 손님은 자기에게 싸랑이라고 소리친 카자흐 여인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출처 : 한국사랑
글쓴이 : 무궁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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