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독자기고-조선왕조실록과 정읍

도심안 2020. 6. 22. 23:46

독자기고-조선왕조실록과 정읍

이준화l승인2010.10.02l수정2010.10.0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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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정읍신문



김재영(문학박사/정주고등학교 교사)



은봉암〔隱寂庵〕에 옮겨진 실록은 뒤에 더 깊숙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졌으며, 용굴암으로 이안했던 태조 어진 역시 비래암으로 옮겼다. 은봉암과 비래암은 현재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은봉암은 용굴 아래쪽에 있는 금선폭포 부근의 금선암으로, 비래암은 용굴 오르기 전 오른편으로 올라가는 쪽에 있었던 암자 터로 추측된다. 은봉암은 1920년대에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옮겨진 실록은 370일 동안 내장산에 보존되었다. 그 동안 손, 안이 수직한 일수는 53일, 안의가 혼자 수직한 일수는 174일, 손홍록이 수직한 일수는 143일이었다. 어진 보전의 책임이 있는 참봉(參奉)들의 경우, 한 사람도 수직하지 않은 날이 151일이나 된다.
수직한 장소는 은봉암이 아닌 태조의 어진을 모신 용굴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어진이 실록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참봉들의 임무가 어용의 보존이었기 때문이다.
두 유생들은 아산으로 실록이 옮겨질 때도 식량과 말을 마련하여 배행했다. 1595년(선조28)에 실록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다음 해에 어용을 강화도로 옮겼다. 안의는 이 때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졸(卒)하였다. 1597년 9월 실록과 어용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왜란 이후에는 5대 사고로 정비되었다.

실록 피난의 일등공신(안의와 손홍록)

안의는 본관이 탐진(耽津)이고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다. 태인현감 안기(安起)의 현손(玄孫)이고 태인현 동촌면 백천리(현 옹동면 척천리)에서 출생했다. 이일재 문하에서 수업을 했으며 학식이 고명(高明)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곡 300석, 목화 1천근 등을 거두어 선조가 있는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보냈다.
손홍록은 본관이 밀양(密陽), 자는 경안(景安), 호는 한계(寒溪), 숙로의 아들이다. 태인 고현내면(현 칠보면 시산리)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물재 안의와 더불어 이일재 문하에서 수업을 했다. 임란 당시 안의와 함께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와 도계운장(繼運將)이 되어 사방에 격문을 띄워 의곡과 재물을 모아 행재소와 의병장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건장한 노비 8명을 선발하여 의병부대에 보내 대신 싸우게 했다. 또한 강서 행재소에 찾아가 전라도 지방의 부흥책인 ‘중흥6책’을 상소했다. 선조로부터 두 번이나 별제(別提)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난이 평정된 후 향리인 태인현(현 칠보면)으로 돌아와 조용히 선비로서 생활하다 광해군 2년(1610) 12월 25일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손홍록(태인 고현내면 삼리 출생, 현 칠보면 시산리 삼리마을)의 묘는 현재 칠보면 반곡리에 있고 1676년 안의와 함께 남천사(藍川祠/ 칠보면 삼리)에 배향되었다.

역사적 의의

임진왜란 당시 전국의 4대사고 중 춘추관과 충주, 성주사고가 모두 불탔으나 유독 전주사고만이 불에 타지 않고 보존되었다. 이에 태인 출신 유생 안의와 손홍록이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용과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이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실록은 바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 두 유생들에 의해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 이후(광해군)에는 이를 모본으로 춘추관,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적상산 등 5대 사고로 다시 정비되었다. 이 같이 시내에 위치하고 있던 실록이 임란 후 산으로 간 것은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두 유생이 실록을 내장산으로 피난시킨 데서 얻은 힌트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보존된 실록은 1997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정읍시민들의 자긍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소실되었을 것이다. 사재를 털어 목숨을 담보로 실록을 보존했던 이들의 공적에 비하면 오늘날 사우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정읍시민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인식 또한 너무 부족하다. 두 분의 공로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용굴은 현재 철제난간에 의지하여 오르게끔 되어 있다. 한 때 어진이 보관되어 있던 용굴은 이제 오가는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장소로만 이용되고 있을 뿐 그 옛날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이 같은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어떻게 보존하고 알려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직지심경’이 간행된 청주에서는 단 하나의 문화콘텐츠를 가지고 ‘고인쇄박물관’을 지어 지역의 경제와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우리도 문화와 관광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유․무형의 문화적 자산을 활용할 것인지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은봉암과 비래암의 위치를 고증해서 복원하고 용굴과 남천사, 물재와 한계의 묘소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실록을 운반하면서 역사기록의 소중함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선다면 더 좋을 것이다. 시민들의 인식재고를 위한 시의 각별한 관심과 관련 유적지의 보존과 홍보, 복원 등이 절실한 때이다.

*덧글: 용굴은 사단법인 한국여행작가협회에서 펴 낸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111』에 선정되었다. 코스는 내장산 탐방안내소-전망대(케이블카)-용굴-내장사-일주문에 이르는 길이 다. 산행을 겸한 현장답사를 직접 해보시길 권장한다.


이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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