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태인현 고현내면(정읍시 칠보면) 도강김씨의 연원은 김회련(金懷鍊)이 왕자에 난에 희생되어 배위인 예천이씨께서 어린 아들 김덕방(金德芳)를 데리고 고현내면에 피신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족보와 구전으로 전해온다
김회련의 생졸년과 활동은 구체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수 없지만 남아있는 기록으로 추정하여 부인과 어린 아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추정해본다. 1412년 실록 기록으로 보아 김회련은 전형적인 목민관 이어서 왕자에 난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이며,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혼돈에 시대에서 김회련이 부인 예천이씨와 아들에 안전한 삶을 위한 준비된 낙향이었을 것이다.
김회련 단비와 부인 묘(옹동면 화장동)
(사진출처: 도강김씨 동정공파 기탁유물과 조선시대 문중문화) 정읍시립박물관
(1) 김회련이 1395년 2월 2일 공주목사겸 관내 권농방어사에 임명된 왕지가 보존되어 온다.
(2) 김회련(金懷鍊)은 1395(태조4년) 윤9월에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받았다.
(3) 1397년 1월 27일 해주목사(海州牧使) 겸(兼) 권농병마단련사(勸農兵馬團鍊使) 염장관(鹽場官)
(4) 1차 왕자에 난 1398년 8월 25일(음)
김회련은 1397년 1월 25일 해주목사로 부임하여 재직 중이었기에 1398년 8월 25일 일어난 왕자에 난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 보인다.
(5) 1398년에 김회련이 해주목사였다는 동국여지승람 기록
객관 동헌(客觀東軒)
홍무 무인년(태조7년-1398년)에 목사 김회련(金懷鍊)공이 지은 것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서 무너져 있었다. 공이 통판 우찬(禹贊)공과 의논하고, 중신(重新)할 계획을 조정에 보고하여 허락을 얻은 다 음, 옛터를 쓰되 그 규모를 더 크게 하니, 건물이 높직하고 단청이 찬란하였다. 8월 초순에 시작하여 10월에 가서 준공 하니,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하였다.(1416년 서거정의 중수기)
공사기간(1398년 8월 초순~10월)
(6) 2차 왕자에 난
정종 2년인 1,400년에 정안대군(이방원)과 회안대군(이방간) 대립으로 회안대군이 제거 되었다.
(7) 태종 12년 임진(1412) 12월10일(신유) 김회련(金懷鍊)의 기록은?
태종 12년 임진(1412,영락 10) 12월10일(신유)
사헌부 건의로 과전을 받고도 외방에 거처한 조익수ㆍ강후 등의 토지를 회수하다. 헌사에서 또 아뢰었다.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조익수(曹益修), 전 부윤(府尹) 강후(康候)ㆍ이은(李殷), 검교 한성(檢校漢城)조윤(趙倫)ㆍ이흥림(李興霖)ㆍ김회련(金懷鍊) 등은 관직이 2품인데, 과전(科田)을 받고도 경성(京城)에 살지 않고 물러가 외방(外方)에 거처하니, 청컨대, 죄를 가하게 하소서.” 단지 과전만 거두게 하였다.
【원전】 1 집 657 면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조익수(曹益修),
전 부윤(府尹) 강후(康候)
전 부윤(府尹) 이은(李殷) (1348~?) 영천이씨로 하륜에 사위이고 1418년에 74세 퇴임 묘는 경주 월산에 있다
검교 한성(檢校漢城)조윤(趙倫)
검교 한성 이흥림(李興霖)
검교 한성 김회련(金懷鍊)
1412년에 김회련은 검교한성(檢校漢城)으로 검교직은 실직이 아닌 산직으로 실질적인 권한이나 임무가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공신으로써 한양에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전을 빼앗기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뜻이다.
(8) 여흥민씨에 기록된 사위 김덕방과 여산송씨 족보
씨족원류 여흥민씨편(474p)
김회련의 아들 김덕방은 처가집인 여흥민씨 족보로 보면 한명회, 송현수(정순왕후 아버지)와 6촌 인척 관계였으며. 민중립과 민중리는 형제이고 민의생은 민대생 민소생과 4촌 관계이다.
씨족원류 여흥민씨 족보를 보면 먼저 딸 5명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아들 민자온을 기록하였는데, 이와 같이 족보를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던 시기의 기록이며, 1700년대 이후에 대부분에 족보는 남자 우선으로 기록하였다.
여흥민씨 5명에 사위들을 보면 2명이 정치적으로 휘말려 곤란 죽음을 당하였고, 두분은 평안한 삶을 살았으며, 박환은 아직 전거를 찾지 못했다. 이로 보아 혼란한 시기에 김덕방은 정치적으로 큰 뜻을 품지 않은것이 오히려 가문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킨것으로 볼수있다.
씨족원류 여산송씨편(지신공파 360p)
정민공 송현수가 세조와 친구 관계였으니 송현수에 生年은 1417이니 비슷할것으로 추정하며 김덕방의 生年을 1396년으로 추정하해보면 송현수보다 대략 20살 정도 많았을 것이다. 태인현 고현내면(칠보면)에 있었던 두 분에 집은 한 마을이라 할 정도로 가까이 있어 서로 잘 알고 있었을것으로 생각된다. (송계생->송계성/宋繼性임)
(9) 경주정씨 양경공파 파조 정희계(鄭熙啓)
정희계(鄭熙啓) 1348(고려 충목왕 4)~1396(조선 태조 5) 개국공신
純忠奮義佐命開國一等功臣 叅贊門下府事八衛上將軍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군
정희계의 子 정길상(鄭吉祥) 1367~1420
정길상의 子정지례(鄭之禮) 1398~1465 (김덕방의 손아랫 동서이다)
1996년 양경공파 파보
정지례(1398~1465) 홍무 戊寅년 2월 2일생~성화 乙酉 7월 12卒
정부인 여흥민씨(1400~1478) 庚辰8월 12일생~戊戌(1478) 2월 7卒(卒年 간기 착오로 보임)
1996년 양경공파 파보
(10) 1398년에 김덕방(金德芳)에 나이는 2살 전후로 추정한다.
족보 기록과 구전을 살펴보면 왕자에 난 때 어린 아들을 업고 피신하였다 했는데 이는 직접적인 피해보다는 간접적으로 정치적 위험을 직감하고 화를 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덕방은 성장 후 여흥민씨 민의생의 따님과 혼인하는데. 김덕방의 손아랫 동서인 경주정씨 정지례(1398~1465)를 기준으로 평균적으로 추정해서 김덕방에 생년은1396년 전후로 추정해본다.김덕방의 부인은 민의생의 둘째 딸이고, 정지례의 부인은 민의생의 셋째 딸로 생졸년이 1400~1478년이다.
김덕방의 부인은 둘째 딸이고 아래 동생이 1400년에 태어났으므로, 언니는 평균적 나이를 감안하여 언니의 나이를 1398년 전후는 정확해보인다.(정지례의 부인 졸년 간기가 달라서 구보 확인이 필요함)
따라서 김덕방의 생년은 1396년 전후이며 여흥민씨 부인의 나이는 1398년 전후로 본다면 무리는 없을 듯하다
(11) 김회련과 민의생의 관계
김회련의 생졸년은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교지 기록인 1395년에 공주목사 1397년에 해주목사였는데, 민의생은 1379년에 태어나서 1396년 나이17살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따라서 민의생이 태어날 때 김회련은 목사였으니 나이는 대략 25살 전후로 많았을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김회련은 민의생 아버지인 판도판서 민중리와 교우 관계거나. 양주에 가까운 곳에 살아 민의생(閔義生1379~1444)이 김회련에게 학문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추측을 하게 된 근거는 김회련과 민의생이 사돈 관계로 김회련에 아들 김덕방에 장인이 민의생이다.
사돈 관계를 맺은 시점은 김회련 死後인지 前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살아계셔서 혼인을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돈관계를 맺은 배경에는 김회련이 낙향하여 양주에 살았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며, 김덕방도 칠보에서 한양 도성 가까이 계시는 양주에 아버지를 찾아뵈었을 것이다.
김덕방의 초배위는 탐진최씨이나 早死하여 다시 민의생 따님과 결혼하여 당시의 결혼 풍속인 남귀여가혼 제도에 따라 장가를 가서 장인 집인 민의생의 집에가서 살다가 아이를 낳고 칠보면에 내려왔을 것이다. 만약 김회련이 왕자에 난 때 희생되었다면 당시 당상관이었던 민의생이 역모로 몰려 몰락한 집안과 사돈을 맺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12) 김회련의 묘는 양주 도봉산에 있었다.
김회련에 묘는 양주 도봉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도봉산은 연산조(1494~1506) 때 사냥터로 지정 되어 모두 이전 되었을 것이다. 소식을 접하지 못해 이전하지 못한 묘는 관청에서 봉분을 없앴을 것이다. 사냥터는 30~40리에서 시간이 지나 도성 100리까지 확장되어 도성에서 포천까지 확장되었다. 사냥터는 금표에 비석이 세워져 출입이 금지된 것과 또 멀리 살아서 후손들이 자주 찾아가지 못하여 실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덕방의 고손인 좌랑공파 김약묵이 1557년 5월 19일 양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병환으로 急逝하여 충민공에 묘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후손들은 조선말에 충민공 묘소를 찾으려고 도봉산을 탐사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충민공 묘가 있던 도봉산을 잊지 않으려고 사당을 짓고 이름을 도봉사로 짓고 충민공을 모시고 있다.
도봉사(道峯祠)
(13) 예천이씨에 본관 문제
충민공의 부인되시는 예천이씨 할머니에 본관은 현존 200여 가구로 옛 기록을 찾기 힘들며 중종 조에 청안이씨(도안이씨)에서 분관된 것으로 청안이씨 또한 시조 공이 고려 말기분이며 기록이 상세 하지 못하여 찾는 것이 쉽지가 않다.
(14) 충민공은 어떻게 태인현 고현내면으로 가족을 낙향 시켰을까?
김회련은 전주목사를 지냈지만 고현내면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에 고현내면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1416년까지사용해온 태산군 군내방이 지명이고 조선시대 1416년 이후 태산현 고현내면이 되었다. 김회련은 누군가에 자문을 받아서 고현내면에 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인과 늦게 얻은 아들이 새로운 안전한 지역에 가서 적응하는데 보호하여 줄 힘이 필요한 것인데 그게 여흥민씨와 여산송씨 가문이었다.
김회련과 민의생에 부친인 민중리와 친한 벗이거나, 김회련과 민의생이 학문적 사제지간에 관계이거나, 관직에 상급자일수 있지만 나이를 떠나 사돈관계를 맺을 정도로 신뢰하던 사이였다. 김회련은 1차 왕자의 난 때에 해주목사로 재직중이었기에 직접적으로 움직일수는 없었고 인편을 통하여 민씨 가문에 낙향할곳을 부탁하였을 것이다.
1398년 즈음 김회련은 민의생보다 25살 전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 근거는 충민공이 1395년에 공주목사였고, 민의생은 조선왕조실록 졸기를 보면 1379년에 태어나서 1396년 17살에 문과급제를 하였으니 민중리에게 부탁하여 사위 송계양이 추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송계양(?~1437)은 민중리의 사위이며 민의생의 바로 윗 매형이다, 송계양의 조부인 수은공(송교)이 태인현 산내면에 낙향한 분이다. 송계양은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고현내면(칠보면)을 추천하였을 것이다.
씨족원류 여산송씨편
당시 태산군 군내방(郡內坊), 조선시대 지명으로는 태인현 고현내면 가양리에는 송계양의 친형인 송계성(1369~1438)이 살고 있었기에 예천이씨는 여산송씨의 도움으로 고현내면 가양리에 앞마을 남전(삼리)마을에 정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회련과 민의생이 사돈관계를 맺은 시점은 예천이씨와 김덕방이 칠보면으로 낙향 후 대략 15~20년 후일 것이다.
(15) 1500년 무렵 도감김씨의 경제적 역량
김덕방의 曾孫孫 婦인 김희윤처 영광정씨 분재기를 보면 김희윤은 당시 노비를 100여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였고 땅도 상당량 소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장파, 중파, 계파로 재산이 분배된 이후에 장파(파조 김희윤) 김약허의 분재기로 김약허는 자식이 없이 30살이 넘어 급서(急逝)하었기에 그 재산은 분배기 내용대로 형님인 김약회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 분재기로 김희윤에 재산을 추정해볼수 있으며, 동생2명 재산까지 합하면 아버지 김윤손에 재산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며, 노비로만 본다면 적어도 200명 이상될듯보인다. 이는 낙향할때 보다는 3대에 걸쳐 증식했을 것이고 결혼하면서 처가잡에서 유산으로 받은것도 많았을 것이다. 당시 유산 분배 방식은 평균적으로분배하던 시기였다.
도강김씨 김희윤 처 영광정씨 1524년 分財記
위와 같이 살편본바 예천이씨께서 홀로 급하게 피신한 것 보다는 충민공(김회련)께서 사전에 민의생을 통하여 민의생의 매형인 송계양이 고현내면에 터를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상당량에 재산과 적지 않은 노비들과 함께 낙향하였고 여산송씨 송계생, 송계양이 정착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필자는 어릴적 도강김씨 판관공파(중파) 외가에서 자란 관계로 구전을 몇 번 들었는데 이 구전이 오랜 세월의 전해지다 보니 말하는 사람마다 약간에 차이는 있는 듯 하다. 만약 충민공 김회련이 1412년 한성부 좌윤 재임시 사냥을 하다 올아오는 길에 화를 입었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것으로 차후에 살펴볼 예정이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1412년 검교한성직은 조선초기 관료의 자리가 부족해서 예우 차원에서 주는 명예직으로 권한이 없다. 실제 한성부 좌윤이었다면 도성안에 살면서 직무를 하였을 것이나, 명예직이기에 도성 밖에 살았던 것으로 아마 양주가 선대부터 살던 세거지 였을 것이다. 1412년 무렵 충민공이 알수 없는 이유나 역모 사건에 연류 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면 일가족이 처벌 받는 중하게 다스리기 때문에 후손이 도망가서 산다하여도 가족이 산간 벽지에 숨어 세상에 드러 내놓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추정은 도강김씨 가문에 다른 인물이 이방원과 대립된 관계여서 충민공께서는 공신이라 피하지 않고 부인과 어린 아들만 화를 피하려고 낙향을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도강김씨 족보를 보면, 나말 여초에 도강김씨 일문인 사직공파(김을경) 후손이 강진으로 전공조사공파(金鎰) 후손이 강진으로 병사공파(金乙祥) 후손이 인천으로 낙향을 하는데, 이는 선대에 고려 충신일 가능성과 이방원과 대립적인 정치관계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충민공 김회련은 누대에 양주에 살아온 집과 조상묘 관리 또는 공신이어서 낙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도강김씨 충민공 이전에 소목 및 방주가 상세하지 못한 이유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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