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장로교 새문안교회 - 1887년 첫 예배...조직갖춘 최초의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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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교회로서, 감리교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정동제일교회를 꼽는 이들이 많지만, 장로와 집사 등을 갖춘
조직교회로는 새문안교회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첫 예배를 드린 후 1백여 년의 한국 교회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아니라 한국 역사에도 적지않은 기여를
해왔다. 교육과 복지 분야에서 많은 일 들을 해왔고, 독립운동가 등 각 분야에서 민족지도자를 대거 배출하여 근대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편집자 주 ◇신문로
새문안교회=서울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서대문방향으로 두개의 육교가 있고, 그 사이 큰길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교회 건물이 위치해 있다.
신문로 1가 42번지. 지금 새문안교회는 옛 교회를 헐고 197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교회는 1907년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며 실제
새문안교회의 처음 위치는 큰길 건너편에 있는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 자리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그 곳에 집을 얻어 안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집 사랑채가 바로 교회가 시작된 곳이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한옥교회를 열었고 이 교회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교회가 된 것이다. 위치 때문에
교회이름이 처음에는'장로교 정동교회'라 하기도 했다. '새문안교회'라는
오늘의 명칭은 1894년 예배당을 서대문 안쪽 대로변으로 옮긴후 붙여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정동예배당'혹은 '정동교회'란 명칭과 함께
'서대문교회'(West Gate Church), '새문안교회'(Saemoonan Church)가 혼용되어 쓰이다 1907년 이후 현재의 위치로
교회를 옮긴후부터 '새문안교회'로 불렸으며, 일제시대에는 한문으로 '신문내교회'(新門內敎會)로 또 한번 교회명칭이 바뀌기도 했다. 새문안이라는
말의 유래는 조선시대 도성 4대문의 하나였던 서대문(西大門.敦義門)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데, 그 위치가 여러번 바뀜에 따라 속칭 '새문'이라
하던 것을 한자(漢字)로 '신문(新門)'이라 이름하게 됐고, 그 안에 교회가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미국장로교의
한국전래=1876년 일본에 개항한 조선은 1880년대 들어 서구열강들에게 연이어 문을 열었다. 미국은 1882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고
이때부터 미국내 개신교단들이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결과 1885년 미국 북감리회선교사 아펜젤러와 미국 북장로회선교사 언더우드가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하게 됐다. 의료선교사로
미리 와있던 알렌의 뒤를 이어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인천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 일을
도왔으나 한국말을 조금 배우고부터는 길에 나가 노방전도에 힘썼다. 당시 한국정부는 기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얼마동안 미국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에서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 관리들은 선교활동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해주자 이에 선교사들은 점차 거리전도를
본격화하게 되었다.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1887년 9월 27일 저녁 서상륜이 전도한 서울신자 등 14명이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 목사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
모였다. 그 중 한 명이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두사람은 장로로 선출되었다. 처음
교회를 구성한 14명중 13명은 서상륜이 인도한 소래지방에서 온 교인들이었으며,이 날이 새문안교회의 출발이 된
것이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장로 안수식이 열렸다. 또 이 교회에서는 한국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1887년 크리스마스에 성찬식이 거행됐다.
그 후 새문안교회는 계속 번창하여 창립 1년뒤에는 교인 수가 5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중 11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04년 10월
송순면 장로 장립과 더불어 당회가 조직되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됐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공동체적 의미의 교회는 황해도 소래교회를 첫번째로 꼽기도 하지만 당회를 구성한 조직을 갖춘 교회로는 새문안교회가
처음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에 힘썼으며 여러 곳에 지교회(支敎會)를 설립했다. 새문안교회는
1910년대에 홍제동, 한강, 교북동, 김포, 행주, 동막, 파주 등 7개소에 예배처를 갖고 있었으며 이 곳들은 후에 모두 독립교회로
발전했다. ◇한국사회속의
새문안교회=언더우드는 1886년 5월 자기집에 영국 고아학교 형태의 한국 최초 고아원인 '예수교학당'을 열고 학비와 옷, 음식을 제공하면서
한글성경을 가르쳤다. 원생 1명으로 시작한 이 고아원은 두달만에 원생이 1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에 언더우드는 교회당 창립을 서두르게 됐다.
고아원 명칭은 후에 '구세학당'으로 바뀌고 다시 1901년 연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신학교'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895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새문안교회 신도들은 의료선교사를 도와 진료소에서 간호와 구호활동을 벌였다. 지난 1세기 동안 새문안교회의 선교와
전도의 방향이 소외된 이웃을 위했던 이유는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특수선교로 시작한 교회의 창립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역사속
새문안교회=새문안교회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사에 큰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대거 배출했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경을 헤매던 어린 김규식을 키워
독립운동가로 만들었으며, 대표적인 구국계몽운동가로 활약한 도산 안창호를 비롯 한글학자 최현배와 음악가 홍난파를 배출하기도
했다. 또
교회사적으로는 최초의 유아세례자인 서병호와 일제치하에서 20년간 강단을 지킨 차재명을 비롯해 새문안 창립자
언더우드의 2세와 3세로 새문안을 섬긴 원한경과 원일한 등 수많은 종교인과 교육자들을
배출했다. 이처럼
새문안은 지난 1백여년간 우리나라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 근대사의 시발점인 1876년 개항과
동시에 수용된 기독교가 한국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처럼 새문안교회는 역사의 흐름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또
새문안교회는 독립협회의 구국계몽운동에 나섰으며 온 나라가 참여했던 3.1 만세운동, 그리고 최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인권운동에도 교회 젊은이들이 앞장서는 등 민족교회로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창립
115주년=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라는 창립배경을 가진 새문안교회는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 사회복지재단을 두고 소년소녀 가장을 도우며 17개
사회기관을 지원하고 있다. 또 동작이수복지관, 성남은행나무어린이집, 새문안어린이집, 이수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1895년 여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구호활동을 벌였던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 의료선교부를 두어 국내 무의촌과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활발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 새문안교회는 창립 115주년을 맞아 경축음악회를 열고있다. 9월 1일 '새문안 솔리스트
음악회'로 시작하여 채리티앙상블 '창립 115주년 축하의 밤'으로 이어진 음악회는 오는 10월 6일 새온 성가대 구노의 '장엄미사'까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일요일에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도
새문안교회는 현재 역사자료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115년 역사를 담고있는 자료를 모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며,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 완공될 예정이다. 종교신문/우상규기자 carrot@sgt.co.kr <사진>최초의
새문안교회(언더우드목사 사랑채). 1887년 9월 27일 밤, 정동에 있던 한 한옥에 14명의 한국인과 언더우드목사, 로스목사가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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