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역사 통일=플러스코리아]안재세 전문위원=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 (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파도를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뼈대가정비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8. 고구려와 북조(北朝 ; 북위·북제·북주)
북위
척발씨는 시조 모립(毛立)이 단석괴 사후 20여년만에 부족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후, 고구려 고국양제 3년(2719년,서386)경에 이르러 척발규가 북위를 건국했다. 그는 건국 3년만에 북쪽으로 고막해 의 네 부락을 공격해서 가축 10여만두를 약탈했고, 서쪽으로 해여(解如)부락을 격파해서 많은 남녀를 사로 잡고 가축 수십만두를 약탈했으며, 5년째에는 다시 서쪽 녹훈(鹿渾)지방의 고차 원흘부(高車袁紇部)를 습격 해서 또다시 수많은 남녀포로와 가축 20만여두를 탈취했으며, 6년째에는 하남을 공략해서 수많은 보배와 명마 30만두 및 소와 양 40만두를 약탈했다.
그와 같은 약탈을 통해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한 척발규는 건국 11년만에 칭제건원하고, 후연의 모용보를 굴복시키고자 40만 대군을 몰아서 마읍(馬邑)을 공격했다. 그러나 모용보가 대군을 이끌고 야습을 하자 북위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그 틈을 타서 광개토대제는 북위의 도읍인 업( )을 급습했다. 이에 북위는 도읍을 버리고 요산(堯山)으로 달아났고, 광개토대제는 고구려인 46만명을 업에 이주시켜 고구려의 세력 을 지나지방에 뿌리박았다.
30여년후 북위의 세 번째 왕인 태무왕이 북연을 공격했는데, 곤경에 처한 북연왕 풍문통(馮文通)은 고구려의 장수대제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고구려 원병은 북위군을 격파하고 북연을 도와줬으나 북위와도 화호정책을 추진했다. 북위의 다섯 번째 왕 헌문왕(獻文王)이 열세살에 즉위하자 모친인 문명 대비 풍씨(文明大妃 馮氏)가 수렴청정하면서 장수대제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헌문왕이 23살에 암살당함으로써 성사되지 못하고, 헌문왕의 장남인 효문왕(孝文王)이 네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다시 고구려 황실과의 혼담이 오갔다. 그 결과 효문왕이 8살 때 13살의 고씨부인을 왕 비로 맞아 들였다. 결혼 5년 후에 장수대제가 재위 79년만에 승하하자, 효문왕은 근친으로서 상복을 입 고 애도하였다. 어린 효문왕을 대신해서 집권한 풍대비는 선비족을 한족화시키려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효문왕 부부는 사이가 좋았으나, 고씨부인은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후 낙양으로 가다가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후 효문왕이 재위 28년만인 32살 때(2832년,서499) 죽자, 고씨 소생인 선무왕(宣武王)이 17살로 뒤를 이었는데, 그 또한 외삼촌인 고언(高偃)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선무왕의 왕비인 고씨는 첫 아들을 낳았 으나 일찍 죽었고, 딸(건덕공주) 하나를 더 낳았다. 그런데 위나라 왕실에 여승을 자처하는 호녀(胡女)가 드나들면서 선무왕의 총애를 받자, 고씨는 쫓겨나서 여승이 되었고 호녀가 왕비로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호녀(=영후,靈后)는 6살인 건덕공주를 살해한 후 자신이 낳은 자식 후( )로 재위 16년만에 죽은 선무왕의 대를 잇게 했다. 후는 6살로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숙종(肅宗) 효명왕이며, 호녀는 스스로 영태후라 하고 섭정을 시작했다. 태후의 문란한 성생활이 10년여년간 계속되자 그것을 비난한 19살의 효명왕마저 살해한 호녀는 마침내 왕실에서 쫓겨나서 다시 중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물에빠져죽고 말았다.
효명왕 사후에는 팽성왕 협( )의 아들 자유(子攸)가 효장왕(孝莊王)이 되어 척발씨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효장왕은 4년만에 고관(高觀)에 의해 폐위당하고 효무왕이 대를 이었으나, 고구려 안원제 5년(2868년,서535) 에 우문태가 효무왕을 살해함으로써 척발씨의 북위는 완전히 망했다. 그 후 위는 동서로 갈렸고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북주를 건설했으나 45년만인 고구려 평원제 23년(서581)에 양견에 의하여 토멸당했다.
북제(北齊)와 북주(北周)
2856년(서523)에 내몽골지역인 옥야(沃野)·회삭(懷朔)·무천(武川)·무명(撫冥)·유현(柔玄) 및 화북지역의 회황(懷荒) 등 6개 진지의 병사들이 봉기했다. 그 후 화북·산동·산서·감숙 등지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 혼란을 이용하여 변방의 군인집단이 북위의 정국을 관장하였다. 2867년(서534)에 북위는 동부와 서부의 두 정권으로 분열되었는데, 동위의 실권은 대장 고환(高歡)의 수중에 들어갔고 서위의 실권은 대장 우문태 (宇文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선비족 우문부(宇文部) 출신이었다. 2883년(서550)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 은 칭제하고 나라 이름을 북제(北齋)로 고쳤다. 2890년(서557)에는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도 나라이름 을 북주(北周)로 고쳤다. 동위와 북제는 둘 다 도읍을 업( )에 정했고 서위와 북주는 둘 다 도읍을 장안에 정했는데, 동위와 북제는 낙양으로부터 동쪽지역을 차지하였고 서위와 북주는 낙양으로부터 서쪽지역을 차지했으며, 낙양은 동위와 북주에 속하였다.
북위의 분열은 남북조의 균형적인 국면을 깨뜨려서 남북조는 이때부터 후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양(梁)나라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나 그럴 만한 필수적 조건이 되지 못하였다. 서기 547년에 황하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동위의 대장 후경(候景)은 고환의 아들 고징(高澄)과 뜻이 맞지 않아 양나라에 투항하였다. 양무제왕은 그를 이용하여 동위를 공격할 생각으로 응원부대를 파견하였으나 동위의 반격을 받아 크게 깨지고 말았다. 후경은 이 틈을 타서 남하하여 이듬해에 건강(남경지방)을 점령하고 대성 (臺城)을 포위했는데 양무제왕은 대성에서 식량이 떨어져 굶어 죽었다. 건강과 오군(吳郡)·오흥(吳興)·회계 (會稽) 등 강남에서 가장 잘살았던 지방들은 후경에 의하여 많은 학살과 파괴를 당하여 동진 이후 모아둔 재물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2885년(서552)에 진패선(陳 先)이 후경의 군대를 깨부수고 건강을 수복하고, 2888년 (서555)에 소방지(蕭方智)를 양경제(梁敬帝)로 등극시켰다. 그 후 2890년(서557)에 진패선은 양경제왕을 몰아 내고 진(陳)조를 수립한 후 진무제(陳武帝)왕이 되었다.
진나라는 양나라 말년에 크게 깨진 후 수립되었기 때문에 우선 사회경제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진조는 남조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서 그 영토는 송·제·양 때보다 줄어 북부영토는 장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크게 줄어 들었다. 서기 555년 이후 양나라에서 분열되어 나간 소찰(蕭察)이 차지하고 있던 강릉(江陵)과 그 부근의 지역 들마저도 진나라는 수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은 북제·북주의 침입에 대항할 수 있는 역량만은 가지고 있었 으며 2906년(서573)에 진은 북주와 연합하여 북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양과 진은 북조(北朝)의 분열을 틈타 큰일을 할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북조의 동위·서위·북제· 북주는 국력에서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북주는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었으며 국력이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북제는 고양이 권력을 잡은 후부터 갈수록 잔인한 폭군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통치집단 내부에서조차 단 결하지 못했다. 2910년(서577)에 북주 무제(北周 武帝)왕이 북제를 멸망시킴으로써 북방은 다시 통일되었다. 2911년(서578)에 북주 무제왕이 죽었는데 그 뒤를 이은 선제(宣帝)왕은 부패하고 어리석은 군주였다. 그 후 그의 아들 정제(靜帝)왕은 겨우 8살에 즉위하였는데 정권은 외척인 양견(楊堅)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견은 정제 왕으로부터 양위받아 칭제하고 수(隋)왕조를 건립했다. 양견은 후에 수문제(隋文帝)로 불리웠다. 2914년(서581) 에 양견이 남방의 진을 멸망시키고 남과 북의 대립을 매듭지음으로써 지나지방은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9. 열국시대의 말엽과 수·당의 출현 및 왜열도의 변천
단기 2914년(서581), 지나지방의 북쪽에서는 고구려를 침공하려다가 산서 북방의 유림관(楡林關)에서 고구려 의 온달장군에게 크게 깨져 국력이 약화된 북주(北周)를 물리치고, 선비족의 일파인 우문씨의 수나라가 대신 들어앉았다. 수나라의 문제왕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지나지방의 군소국가들에 대한 통합정책이 추진된 결과, 이들은 하나의 강력한 무력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북방지역에는 또 하나의 강한 유목민족의 나라인 돌궐 (투르크)의 세력이 팽창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외교활동과 함께 군사적인 경계활동을 했으나, 수나라는 지나지방에 진출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이 천하의 패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를 위하여 수나라는 장강지역의 진나라를 공격, 병탄하는 여세를 몰아서 인근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백제의 세력을 공격하여 자신의 세력권에 넣고야 말았다. 방심하고 있던 백제는 이에 크게 놀라 신흥국인 수나라와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했으므로, 수나라의 목표는 이번에는 고구려로 향했다.
방심하고 있던 백제의 세력을 장강연안과 지나지방 남동쪽 연안지방에서 대부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수문제 왕은 기고만장하여 곧바로 고구려를 원정하겠다고 설쳐대었다. 그러나 일종의 도적떼나 다름없는 야만스러운 수나라의 수십만대군은 그 엄청난 숫자에도 불구하고 문명국인 고구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고, 단기 2931년 (서598)의 제1차 침략전에서 강이식장군이 영도하는 고구려군에 크게 깨져 고구려 영토의 문턱인 임유관(臨楡關) 도 넘지 못한 채 쫓겨갔다. 고구려는 수문제의 침략행위에 대하여 엄중문책을 했으므로, 처지가 곤란해진 수문제 왕은 마치 하나라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깨진 후에 그랬던 것처럼, 자포자기적인 주색잡기에 스스로 빠져들어서 전혀 무기력한 것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양광도 역시 야만인답게 이러한 그의 아버지 를 죽이고 멋대로 왕위를 찬탈하고 말았다.
새로 수나라의 왕이 된 양광은 그러한 패륜적 성격이 한 나라의 왕은 커녕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가당치않은 자였지만, 모든 반대자들을 포악하게 탄압하고서 스스로의 운명을 재촉하는 고구려 침략전쟁을 다시 일으켰다. 양광은 수나라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남·북 수천리에 이르는 운하공사에 착수하였다. 진시황을 닮아보기로 마음먹었던 듯한 양광은 이미 빼앗아 놓았던 백제영토에 남아 있던 백제의 유민들 또한 짐승처럼 몰아대어 이 큰 공사에 모조리 동원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 공사에 끌려나가면 다시는 살아서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야만적인 학대와 중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산을 허물고, 없던 물길을 만들어 내는 험하고도 힘든 작업에 헤아릴 수 없는 양민들이 죽어가야만 했으며, 동원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치는 자들 또한 허다하였다. 그들은 곧장 비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게 되어 이들 또한 오히려 양민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는 등, 진시황이 지나지방을 통일한 후 괴로움을 당했던 지나지방의 한많은 옛 역사가 되살아났다. 그러한 터무니없는 공사의 목적은 오로지 고구려원정을 성공시키려는 데 있었 던만큼, 우여곡절 끝에 운하공사가 대강 마무리되자 양광은 곧바로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유능한 고구려의 임금 영양황제는 이미 수나라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친 경험을 살려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영양황제는 도읍을 미리 장안성(영고탑부근)으로 옮겨 수양제의 저돌적인 공격에 대비했다. 양광은 군졸과 보급인원을 합쳐서 약 200여만명이라는 세계전사상에 전무후무한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했다. 12개의 큰 부대로 나누어 침략을 시도했던 이 대규모 도적떼들이 출발했던 곳은 고구려의 턱밑에 해당하는 산동북부와 하북지역이었다. 터무니없이 많은 침략군의 공격에 직면한 고구려는 주저없이 초토화 전술을 채택했다.
수나라 침략군은 고구려의 작전도 모르고 무려 천여리에 뻗친 큰 부대를 고구려땅 깊숙이까지 진공시켰다. 그러나 길게 뻗친 침략군의 병참선은 오히려 고구려 유격부대들의 좋은 공격목표가 되었으므로 침략군은 고구려 복병들의 신출귀몰하는 공격을 받고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단국강토를 약탈 하려는 무지막지한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침략군은 숫자만 믿고 계속 고구려의 작전지구 속으로 말려들어 왔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을지문덕 장군은 기묘한 계책을 써서 이들 침략군을 살수에서 몰살시켜 버렸고, 겨우 살아 남은 불과 수천여명의 침략군 병사들은 돌아서 달아나 버렸다.
을지문덕 장군은 침략군과 직접 격돌할 때 발생할 지도 모르는 아군의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천문지리를 이용한 수공법을 사용한 것이며, 그것은 오랜 홍익인간의 전통아래서만 탄생이 가능했던 문명 인류다운 대국적인 전략이었던 것이다. 군신(軍神)으로 불리워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을지문덕 장군은 곧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서 고구려의 대군을 물아 오랑캐들을 응징해 들어가서 산서의 요충인 태원성을 위협하 였으며, 수나라가 야금야금 밀고 들어왔던 지나 하북지방의 옛 강토를 도로찾았다. 이리하여 수양제는 목숨만 구걸한 끝에 간신히 숨을 돌릴 시간을 벌었는데, 그는 숨을 돌리자마자 다시 고구려
침략을 서둘렀다. 이러한 무리한 수양제의 욕심때문에 지나지방 민중은 도탄에 빠졌으며,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결과를 자초했고, 여러 간웅들의 쟁패 끝에 당나라가 일어나서 2951년에 수나라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입국초기에 고구려에 대해서 뚜렷한 적대행위를 보이지는 않은 채 수나라가 잃었던 민심을 되찾는 데 힘을 기울이는 듯 했다. 그러나 수나라 양제보다도 더욱 욕심이 많았던 교활한 당나라 왕자 이세민은, 정권다툼 질의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부친인 당고조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임금이 된 후에, 그 당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정예한 군사들만 삼십여만명을 동원하여 다시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이 때 동아시아의 주인공인 삼국의 정세는 날로 미묘한 관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는 오랜 전쟁 상태 끝에 화해하여 서로 통혼하는 우호관계에 이르고 있었으며, 백제 무제(2933-2974)가 등장한 이래 백제는 한계에 이른 신라의 국력을 깔보면서도, 신라와 동맹을 맺고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있는 중이었다. 신라는 진평왕(2912-2965)말년에 이르러 자기들이 삼국을 통일해 보겠다는 야망을 품고서 황룡사 구층탑을 건축 하여 그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통일의지를 드러냈다.
삼국의 평화공존 상태에서 옛 삼조선처럼 각자의 관할 구역을 나누어서 동족간의 긴밀한 협조하에 살아가는 것 만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던 바, 이러한 바른 방법을 버리고 마치 지나지방의 여러 후진국가들이 그랬듯이 야만 적인 패권주의적 야망에 불탔던 신라의 야욕을 부채질한 것은 다름 아닌 교활한 당태종이었다. 진시황이래 지나 지방의 패권자들에 의하여 강점되었다가 고구려·백제에 의하여 배달민족의 수중에 되돌아 왔던 지나지방 동부의 곡창지대를 다시 백제와 고구려의 손아귀에서 빼앗아내는 것이 그 존립목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 당나라였다. 그러한 당나라에 대하여, 같은 배달민족으로서 공통적인 경계심을 높이지는 못할망정, 야만적인 패권국가인 당 나라의 힘을 빌어서라도 삼국 중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립하려 시도하는 신라를 권모술수대가인 당태종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갖은 감언이설로써 신라를 꾀어 동족국가를 배신하도록 부추겼다.
이러한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고 있던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영류황제가 국제정세에 어두운 간신들의 책동에 놀아나서 장차 나라가 위태로와질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영류황제가 계속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나라의 술수에 놀아나자 마침내 그는 반정(反正)을 일으켰다. 그는 간신들과 영류황제를 처단한 후, 자신은 대막리지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맡아 고구려의 운명을 건 당나라 침략을 막기 위한 전략에 몰두했다. 신라의 김춘추는 화해를 빙자하여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국정을 염탐하려는 김춘추의 흉계를 간파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갇혀 있다가 간신히 신라로 도망치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오로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에 의한 침공을 경계하였을 뿐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욕은 없었으므로 황제의 자리는 보장황제가 물려받 았으며, 이 두 인물은 마음을 합쳐서 국방에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당태종은 이러한 강력한 고구려의 실정을 잘 알면서도, 자기 생전에 고구려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자신의 야욕에 못 이겨서, 드디어 침략군을 직접 지휘하여 고구려로 향했다. 당오랑캐들은 처음에는 파죽지세로 공략하여 들어갔 으나, 요하를 건널 무렵부터 곧 장애에 부닥치게 되었다. 요하(지금의 요하가 아닌 난하로 추정)부근에 축조되어 있던 요동성과 안시성은 요지부동의 수비태세로 당나라 침략군을 막아냈다. 이에 당황한 당태종왕은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으로 닥쳐올 추위까지 걱정되어, 한시라도 빨리 승세를 잡으려는 욕심에 난공불락인 안시성을 집중공격 하다가 큰 피해만 입었다. 더우기 활쏘기의 명수인 고구려 용장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서 당태종은 실명하였고, 그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마침내는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고구려의 방어군은 문명사회를 지키기 위한 정의의 일념과 구국수호 의지와 다물정신에 충만하여 침략군을 곳곳 에서 몰아 내었으며, 북방의 추운 겨울을 견뎌내지 못할 것을 걱정한 침략자들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을 명령한 연개소문은 얼었다가 녹아 내리는 하북의 습지대(요택:遼澤)에 빠져 허우적대며 도망가는 당나라의 패잔병을 무섭게 몰아쳐 대며 응징했으나, 이미 전의를 잃고 살길만 찾아 저마다 갈팡질팡 쫓겨 가는 당나라 침략군은 대항할 엄두도 못 내었다. 이러한 한심한 곤경 속에서 패주를 거듭하던 당태종은 더 나아갈 길도 없는 외길에서 습지대를 앞에 두고 자꾸만 빠지는 바람에 앞으로 도망갈 길이 막막해졌다. 수많은 수레·짐짝· 말·소를 그 진창 속에 쳐 박아 넣고 그 위로 지나가려 해도 다시 나타나는 진창 속으로 자꾸만 빠지는 곤경에 처하 게 된 오랑캐들은, 눈보라를 휘몰아치는 강추위마저 엄습해 오자 열에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여, 1,000여명만 간신 히 목숨을 챙겨서 돌아가는 파멸적인 참패를 기록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전황이 벌어지자 연개소문은 당나라 도읍인 장안을 공격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대군을 몰아서 황하를 따라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당나라도 이번에는 죽을힘을 다해서 고구려의 대군을 막고, 당태종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무모하고도 배은망덕한 망동을 아니 하겠노라고 맹세를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원정군은 막대한 전리품만 얻어 가지고 개선해 돌아 왔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다시금 천하에 그 건재함 을 알리게 되었고, 따라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야만족들은 물론 신라, 백제를 비롯한 천하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가 되어서, 약 이십년 동안 문명대국 고구려의 강력함을 천하가 안정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태종은 안시성에서 얻은 상처의 후유증(화살맞은 부위의 화농에 의한 뇌염이 발생한 듯함)으로 인하여 결국 오랜 투병 끝에 죽었는데, 고구려의 강성에 너무나 혼난 나머지 신하들에게 유언하기를,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할 생각하지 말라!" 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지나역사상에 가장 위대한 전략가였다는 그가 한 이 말은 역설 적으로 천하제일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를 인식하기에 충분한 증거로서 영원히 남아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