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입암산성| ...........나의 역사기행
강화도령 | 조회 67 |추천 0 | 2010.08.27. 14:38
정읍 입암산성

정읍 입암산성
백제시대 입암산성
사적 제 384호 정읍 입암산성(해발626)은 노령산맥의 한줄기인 입암산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삼한시대에 쌓은 성이다.
후삼국 시대 금성(지금의 나주지역)을 왕건에게 점령당한 후백제 견훤왕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의 제6차 침입 때 격전지로 유명한 성이다.
특히 이 산성은 삼국시대 때 쌓은 성을 고려고종, 조선효종시대에 수축 개축한 것으로, 입암산 정상 서쪽의 갓바위에 오르면 노령고갯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드넓은 정읍일원의 곡창지대인 정읍평야를 조망할 수 있어 이곳이 당시 천혜의 전망대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 성의 특징은 북쪽과는 달리 산성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사방이 높아 외부에서는 성안이 보이지 않지만 성 내부는 비교적 넓어 대규모의 병력과 주민이 주둔, 거주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처음 성을 쌓을 당시에는 성 길이가 무려 4km에 달했으나 이후 유실돼 지금은 약 2,7km만 남아 있다. 4곳의 포루와 2곳의 성문이 있었으며, 성내의 계곡물이 흘러드는 연못이 9군데, 샘은 14개로 물 걱정이 없는데다가 성내 사찰이 5개나 있었고 각종 무기고와 군량 7,000석 이상을 저장하고 있었다.
입암산성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송고비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쳤으며 정유재란 때는 장군 윤진이 왜장 소서행장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던 곳이다.
그 후 동학 농민전쟁 때는 녹두 장군 전봉준이 몸을 피해 순창으로 향하던 중 당시 산성별장이던 이종록과 친분이 있어 하룻밤 묵어갔던 곳이기도 하다.
과거 입암산성에 살던 주민들은 혼인 전에는 댕기를 길게 따고 혼인 후에는 쪽을 찌거나 상투를 틀고, 사서삼경을 익히며 최근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 후 그들은 용인 민속촌으로 이주되었지만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남창골 입구의 자하동과 지리산 청학동으로 각각 은거지를 옮겼다. 지금은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고 있지만 당시의 성곽과 마을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