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당의 동북점령전략 동북이 대세를 결정하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투항으로 유럽의 전쟁이 종결되고 아시아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2월말 필리핀의 루손섬을 6월에는 오끼나와를 점령한다 일본은 중국에서도 밀려 대도시와 해안선만 장악하고 7월 26일 중국 미국 영국은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독촉한다 일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미국은 수시로 일본본토를 공습하는데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8일에는 소련은 포츠담선언에 서명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한다 8월 9일 미국은 나까사키에 다시 원자탄을 투하하고 이날 소련군은 동북에 진군을 개시한다 소련은 80개의 사단을 파견하여 5500대의 탱크와 3800대의 공습기를 동북에 투입하고 150만의 병력이 동북으로 진군한다 소련은 3개방향으로 동북으로 관동군을 공격하고 사할린과 쿠릴열도로 진격하여 파죽지세로 점령한다 8월 6일 모택동은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과 합동작전을 선언하고 연안총부는 전면공격과 더불어 교통선을 장악하고 동북으로 진공을 명령한다 8월 15일 무조건투항으로 종전을 하고 9월 2일 상오 9시 일본은 미주리호 함상에서 미국의 맥아더장군에게 항복문서를 서명한다 이로서 세계제2차대전은 종결되고 7일후 1945년 9월 9일 남경에서 중국의 관동군이 투항하는데 중앙군관학교에서 강촌영차는 일군을 대표하여 항복한다 14년의 항일전쟁은 끝나고 복잡한 정세로 신중국은 내전 독재 경제곤란으로 혼란속으로 들어가고 동북지구는 전략지구로 국제적인 양세력의 대결장이 된다 동북지구는 산해관이북으로 중국북방국토로 료녕 길림 흑룡강성 내몽고동부지역인데 130만 평방공리로 당시인구는 3800만으로 자원과 비옥한 토지 공업지구로 교통이 창통하고 몽고 한국 러시아와 연접하여 전략지구이다 동북은 중국의 80%이상의 공업설비를 갖추고 양식이 남는 유일한 지방으로 동북의 점령은 국공쌍방의 초점으로 미소의 관심지역이었다 국공은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변질되어 동북의 패권으로 삼국사방의 쟁탈전이 시작된다 세계대전후 자본주의의 강국미국은 무장반공정책으로 국민당의 원만한 접수를 바라고 소련은 중국혁명의 지원자로 제2차대전으로 큰 손실을 입은 소련은 동북의 이익을 추구하여 미국의 중국간섭을 저지하려 한다 소련은 전후부흥을 위해 미국과 충돌보다는 동북이 완충지구로 역할을 바란다 국민당정부로는 일본에 대한 무저항정책으로 동북의 회수는 아주 시급한 명분으로 전략적인 요지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비밀회의에서 장개석은 동북은 중국의 명운을 좌우한다고 강조한다 동북의 광산 철도 물산의 중요성도 공산당이 차지하면 화북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동북에 공산당의 진입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항전이후 독점동북을 위한 노력으로 1945년 8월 14일 국민당정부는 외교적 경로로 소련과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소련의 진주하는 곳을 국민당정부에 넘기기로 한다 9월 1일 국민당정부는 웅식휘장군을 동북행영주임으로 임명하고 장경국을 외교부 동북특파원으로 파견한다 9월 3일 장개석은 국민정부명의로 동북을 9개성으로 나누어 료녕 료북 안동 길림 송화 합강 흑룡강 눈강 흥안성으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두 개의 특별시로 대련과 하얼빈시는 중앙에 귀속한다 공산당은 동북을 특히 중시하여 장기투쟁을 준비하고 동북항일연군을 흡수하고 산동의 항일유격구의 류소기에 1942년부터 일본철퇴후 신사군과 황하이남의 부대를 화북지구에 집결하고 동삼성으로 진격을 준비하도록 한다 1945년 5월 31일 연안의 공산당 7차대표회의에서 동북쟁취전략임무방안을 제출하여 동북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한다 동북이 고향인 만주의 여정조가 중앙위원후보로 선출하고 여정조는 1937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만의의 딸은 부친이 신문을 보고 자신이 중앙위원후보가 된 것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중공의 중앙인 연안은 1945년 8월 10일부터 매우 바빠지는데 중공중앙은 주덕사령관 명의로 7차례의 전문으로 각부는 즉각 동북진군을 명령한다 일군의 투항을 명분으로 하나 여정조부대는 산서 수원지구에서 차할이 열하로 진공토록 하고 동북군 장학사는 하북에서 열하와 요녕으로 진공토록 한다 동북군출신의 만의는 산동에서 요녕으로 진공토록 하고 이운창부는 요녕 길림으로 진공토록 한다 정찰과 작전부대를 동북으로 진공하여 소련군과 작전을 하도록 하고,동북변경에서 소련군의 훈련을 받던 의용군부대도 동북의 11개지구로 진공토록 한다 동북의 57개 대중성시를 소련군과 통제하도록 하여 주보중 풍중운 이조린 왕효명 왕명귀 팽시노 김광협등 항련간부를 배치하는데 김광협은 조선적의 간부였다 이들은 11개성시의 위수부사령으로 임명하고 기열료군구는 연안총부의 명령으로 1945년 8월 13일 풍윤현 대왕장마을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이운창을 대표로 동진위원회의 전방지휘소를 세우고 8개사단과 1개영의 만여명을 3로로 동북에 파견한다 동로군은 16군구로 증극림이 4천명을 금주 심양으로 진공하고 이운창의 15단은 북녕철도를 따라 북상하고 8월 26일 산동분국은 8로군의 산동군인 여기은 추대붕이 100여명의 무전반을 데리고 요동반도에 상륙한다 이들은 연대에서 출발하여 8월 29일 요녕성 장하현의 해안에 도달하고 산동교동의 부대를 동북으로 보낸다 항전승리후 국공양당은 상반된 정책을 세우는데,국민당은 공산당 섬멸의 기회로 여기고 항복을 받기위해 서남 서북의 군대를 화북 화동지구로 보내 대도시와 교통요도를 점령한다 중공군을 포위하고 내전을 기도하여 미국의 원조로 군함 비행기를 동원한다 8월중순 팔로군사령관 주덕은 두차례 장개석에 전보를 보내 내전을 막자고 통보하고 미 소 중 영등 국가는 이익을 위해 내전방지의 여론을 무시하여 국민당의 수백만군대가 동북으로 파견되나 장개석은 8월 14일 20일 23일 3차의 전보를 모택동에 보내 회담을 요구한다 장개석은 시간을 벌기위한 전략인데 동북에서 소련의 철수후 소련과 공산당의 연계를 단절시키려 하고 남북의 협격으로 공산당을 소멸시키려 한다 모택동은 중경에서 장개석과 담판하여 내전을 막으려하나 늘 내전을 준비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8월 23일 중공중앙 확대회의에서 류소기를 대리주석으로 진운 팽진을 후보서기로 하여 주은래와 중경담판에 참여한다 국공양당은 중경에서 43일간 담판하고 10월 10일 정부와 중공대표회담기요를 서명한다 내용은 정치민주화 국민대회 당파합작 군대국가화 해방구문제등 12개주제로 국공쌍방의 견해를 천명한다 국민당은 표면상 서명을 하고 내전을 피하고 역량을 길러 중공의 소멸을 기도하는데 10월 10일 모택동은 장치중의 배웅하에 연안으로 돌아간다 주은래와 왕약비는 중경에 남아 국민당과 계속적으로 담판하여 미합의사항을 논의한다 국공쌍방의 분기점은 군대와 해방구문제가 쟁점으로 공산당은 합리적 군대의 정편을 주장하고 삭감에 동의한다 공산당의 정규군은 100만명이고 48개사단으로 재편을 주장하는데 국민당군대는 460만으로 280개사단인데, 장개석은 중공군대 12개사단만을 인정하기로 한다 중공의 산동분국의 정찰대가 동북을 정찰후 소련군은 대도시만 점령하여 중공중앙에 보고한다 9월 11일 중공중앙은 산동의 4개사단을 즉각 출동시켜 12개단 3만명으로 소화가 지휘하여 동북으로 떠난다 1945년 8월 30일 증극림의 기열료군구의 4700명이 소련의 승인으로 산해관을 점령후 9월 6일 심양에 진입한다 9월 14일 증극림은 소군대표인 중교와 장춘 소련군 최고사령 마린프스키가 보낸 비행기로 15일연안에 도착한다 소련군은 최초에 중공에 우호적으로 연안에 장교를 파견하여 동북접관문제를 협의하는데 류소기등 영도들과 정황을 설명한다 중공은 일군의 무기와 탄약이 심양등 대도시 창고에 저장된 것을 알고 배분받는등 우호적으로 협조한다 9월 15일 소군대표와 중공은 회담하고 소련사령관은 주덕사령관에게 통지하여 규정된 시기에 팔로군과 국민군이 동북에 진주할 것,소군이 만주에서 철수전에 양측군대는 만주에 진입하지 말 것,소련은 즉각 철수하고 영측의 만주진공은 자유로운 협의로 할 것을 제시한다 소련은 중국의 내정간섭의사가 없음을 천명하고 우호를 표명하고 양측의 자유의사를 존중한다고 천명한다 소련은 소극적으로 팔로군의 동북진공을 묵인하는 처사로 최근 소련의 문서공개로 당시 스탈린의 모순적 정책으로 중공은 료서진공을 요구하고 항전시 활동하던 지역임을 강조하는데 소련대표는 묵계한다 당시 스탈린은 팔로군이 공식신분이 아닌 모습으로 동북진입을 묵계하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국민당과 소련은 맹방조약을 체결한 상태로 공개적으로 국민당의 동북진입을 허락한 상태로 암중으로 중공을 지지하여 미국을 견제하고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사이를 평온하게 유지하길 바란다 소련의 태도로 중공은 고무되고 동북의 점령의 호기로 여기고 양가령회의후 팽진을 동북중앙국을 세우고 간부들이 동북으로 침투하도록 결의한다 9월 17일 류소기는 중공의 명의로 중경의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전보로 동북진공전략을 제시하고 남으로 확대를 주장하여 모는 당장에 동의한다 9월 19일 모의 동의로 류소기는 중공정치국회의를 열고 향북발전을 결의하고 전국의 역량을 동북으로 집결하고 북으로 발전 남으로 방어전략을 시달한다 남방을 양보하고 남부전선을 축소하고 화북 화중 화중해방구를 공고히하고 열하 차할이의 양성을 통제하기로 한다 중공 7대의 방침은 향남발전인데,전략의 전이로 10분만에 방향을 수정하여 역사적인 승리의 원인이 된다 이는 탁월한 전략방향으로 판명되는데 방향을 정확히하여 향후 발전의 초석으로 역량을 보존하게 된다 전쟁후 미소는 국제적 역량으로 중국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고 지리위치의 특수성으로 동북의 정국은 복잡해진다 미국의 공중지원으로 장개석정권은 상해 북평 남경의 대도시와 동북을 점령하는데 바빴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국민당 공산당은 모두가 중국의 동북이 초점이 되고 국민당의 군대와 행정관료가 동북에 진군하나 중공보다 동작이 느렸다 파촉에 있던 국민군은 미국의 장비로 무장하고 서남의 산구와 월남점령 광주 상해등지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동북으로 군대수송을 시작한다 국민당은 소련과 우호동맹조약으로 안심하여 부유한 동북의 주인이 되려하는 군벌이 많아 강서성 주석 웅식휘가 선정되자 기이하게 생각한다 장경국이 강서시절의 우정으로 선임되어 장경국이 동시에 외교특파원으로 동시부임한다 국민당은 동북을 9성 양특별시로 나누는데 목적은 관리안배문제로 부패관료들의 희망이 많아 부득이한 조치였다 부임하기도 전에 모두 요직을 바라고 다투는데 정력을 허비하고 소련군이 3개월후 철수하기로 하여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공산당은 동북발전의 근거지를 정하고 만주로 진입시 소련군이 주재하는 지역은 통과하도록 하여 팔로군의 번호사용을 금지하고 공산당 신분을 공개하지 않도록 한다 특히 소련의 도움과 묵인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고 교동반도의 도해군인들은 미군의 해상저지를 고려하지 말도록 한다 동북난민행세로 산해관부근의 낙정에 집결하도록 하여 비밀리에 이동하도록 한다 항전후 공산당의 전선은 만장의 넓이로 장성에서 광동연해 해남도에 이르는데 분산상태로 장강이남의 소근거지가 많아 권토중래의 국민당군에 계속 격파되어 피동태세로 내전중 손실이 중대하였다 강남의 부대는 동북진군이 불가능하여 중공중앙은 강남의 각전구를 축소하기로 하고 해방구를 철수하고 동북의 발전으로 전향한다 1945년 9월 17-19일 중공은 열하 차할이 동북발전 전략을 반포하고 북상하도록 하여 산동의 주력과 간부들은 모두 동북으로 집결하도록 하고 기동과 동북으로 진출한다 화중의 신사군과 강남주력은 강북으로 전이시키고 산동분국서기 나영환을 동북으로 5개사단과 함께 전출시킨다 신사군주력과 간부들은 산동의 업무를 대신 맡도록 하고 동북점령은 산동의 역량으로 이루어진다 산동의 8개사단중 6개사단이 동북으로 진군하여 절동 소남 환남 환중부대가 모두 동북으로 산다 전략의 대전이로 중경담판기간에 조용히 움직여 위험을 감경하여 강남의 부대와 신사군부대가 산동의 해방구에 보충된다 양광부대도 모두 산동으로 가고 국민당담판의 이행으로 가장하여 국민당의 우려를 불식하고 실리를 택한다 이러한 조치는 국민당에 양보하여 여론과 동정론으로 공산당의 이미지가 대폭 제고된다 더구나 국민당군에 포위된 강남부대는 사지에서 풀려나고 고명 은폐전술로 평화분위기를 만든다 8개의 장강지역 근거지의 철수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중경정부는 원만하게 남경으로 돌아온다 국공양당의 동북파견군은 모두 명장으로 국민당은 두율명 정동국 위립황 양화성 손립인 료요상등 명성이 높은 장군들이고 공산당은 임표 나영환이 대표적인 명장이다 이후 팽진 진운 엽계장 오수권 단자준 모춘등이 추가파견되어 팽진은 동북국서기로 연안에 소군대표와 다녀온후 18일 심양에서 동북국을 개설하고 산해관 비행장으로 간부들을 계속 보낸다 팽진 진운등은 심양의 장수부에서 회의를 열고 동북국성립을 선포하고 각근거지로 영도간부를 파견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장문천 고강이 10월에 연안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11월 20일 심양에 도착한다 연이어 중앙위원인 이부춘 이립삼 나영환 임풍 채창 왕가상 황극성 왕수도 담정 정자화 만의 고대존 여정조 소경광 임표가 오고 동북인민자치군 영도로서 활동한다 1945년 중앙 7대에서 중앙위원 44명을 선거하고 후보위원 33인을 선출하여 동북의 영도역량을 강화하여 22인을 동북으로 파견한다 장개석은 국민당 제13군 52군 신편1군 6군 71군 60군 93군을 동북에 파견하고 미식장비로 공산당은 11만명의 팔로군 산동군 신사군은 6만명으로 1937년 8월 25일 중공공농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을 개편하여 국공합작에 투입한다 신사군 3만5천명은 1940년 팔로군의 남하군으로 노부대인데 동북에 정예부대를 모두 투입하고 순식간에 조병하여 국민당군은 일격을 맞는다 이로서 국공양당의 동북지전의 막이 오르고 격렬한 쟁탈전으로 내전을 맞는다 소련의 동북진군시 소련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은 소련홍군과 돌아오는데 수백명에 불과하나 소군을 57개성시에 안배하는 역할을 하여 소군의 위수부사령관을 맡는다 이들은 팔로군의 지방무장과 연락으로 중앙과 분리된 조직을 재건하고 중요작용으로 88려단인데,주보중 이조린등은 소련군의 선두부대로 관동군 배치와 정보를 제공하는데 88려단의 김일성은 소련군과 조선으로 진군하여 가목사에서 연설하고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 북에 파견될 준비를 한다 국민당군은 한 개사단이 15000명으로 현대화장비로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실력차이는 공산당은 11만명으로 총은 28197자루로 국민당의 일개사단의 장비에도 미치지 못한다 공산당군은 소련의 도움으로 일본관동군에게서 압수한 무기를 입수하여 일부 무장을 강화하고 전략의 누설이 두려워 모든 작전은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당시 산동의 팔로군은 8월 16일부터 위해 용구 연대를 점령하여 동북으로 가는 출해구를 마련한다 연대부근의 공동도와 봉래이북의 내장산도와 도서지역의 왕정위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외장산의 각도서를 점령한다 발해해협을 장악하고 각섬에 병참을 세우고 교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갈 준비를 마치고 해상운병의 안전을 마련한다 산동의 용구에서 료녕으로 발해를 건너는데 배가 필요하여 대선이 없어 어선을 이용하는데 기상 통신설비없이 경험으로 비밀리에 야간에 이동한다 옷을 갈아입고 어부로 변장하고 봉래현에서 배를 구하는데 선원교육과 물자를 준비하여 봉래어민들이 모두 동원되고 향도하여 무기를 감추고 바다를 건너는데 해상생활의 경험부족으로 고전하고 배멀미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장산도에서 휴식후 출발하는데 작은 배로 30여명이 승선하여 교동반도의 군대는 봉래로 급히 가고 9월 29일 용구 난가구에서 출발하는데 10월초 대련에 등륙한다 용구에서 9-10월사이에 만명이상의 부대가 요녕성 장하현부근에 등륙하여 10월 24일 영구에 도달한다 이후 나화생이 7500명을 이끌고 발해를 건너고 10월 30일 장하에 등륙하여 11월 상순 심양이서지구에 도착하고 라순초의 부대 만여명이 다시 등륙하여 12월 심양 안산지구에 도착한다 임일산이 교동의 간부 3천명을 이끌고 동북에 가는데 그중 2천명은 여간부로 남녀노소의 군대가 바다를 건넌다 국민군도 미국과 협의로 화북의 중요항구에 등륙하여 동북으로 향하는데 9월 29일 미국해군 7함대가 연대에 등륙하나 공산군은 이를 방관한다 나영환은 임기해방구의 4천명의 부대를 이끌고 연대용구에서 요동반도의 비자와로 등륙하고 11월 13일 심양에 도착한다 이들은 풍랑을 만나고 소련군함과 마주치는데 소련군 장교는 믿지 못하고 모택동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인정하고 장하일대에 등륙하도록 조치한다 산동부대는 9월 25일-11월 중순사이에 비밀리에 바다건너 동북에 진입하고 수만부대가 신속히 조동하여 놀라움을 준다 중경에서 동북행영의 부참모장 동언평등 선견인원이 북평을 거쳐 장춘에 도달하여 10월 12일 웅식휘 장경국과 합류하는데 소련군에게서 동북의 접관권을 인수받고 10월 26일 장개석은 두율명을 동북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장개석은 중경에서 두율명과 접견하고 소련과 신속히 행정사무를 이관하도록 하고, 10월말 미국의 도움으로 수십만 미식장비의 정예부대를 동원하여 전중국의 주요도시와 철도변을 접수한다 일본이 버린 100만점이상의 무기와 장비를 접수하고 군대는 430만에 달하여 최대규모로 팔로군은 더욱 서두르고 산동의 군대를 이전시킨다 10월 5일 발해지구 부대 3개단 5500명을 동북으로 보내고 발해독립사단으로 부른다 산동의 양국부도 7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고,양흥초부대 7500명도 이어서 북상한다 산동성 상하현에서 출발하여 냉구와 장성을 넘어 도보로 행군하는데 11월 21일 금주서부지역에 도달한다 전산동의 6만병력이 동북으로 조동되어 주력이 되는데, 총병력은 동북에 11만명이 모여 산동의 항일근거지는 공산당의 4대근거지로 산동대부분과 북으로 창주 남으로 진포선을 이어 하북 강소의 일부지역이다 1943년 산동근거지는 당의 일원화영도로 산동군구로 나영환이 사령겸 정차위원으로 여옥과 소화가 부정치위원으로 1945년 8월 왕정위군과 대전을 치루어 6만을 섬멸한다 1945년 8월 산동성정부로 개편하고 여옥이 주석을 맡는데 8년 항전중 26000회의 전투로 적을 50만이상 섬멸한 곳이다 항전 종결후 산동해방구의 인구는 2400만으로 12.5만 평방공리의 면적으로 각지방 인민정부를 세운다 일본의 투항후 중공중앙은 청도 치박 제남은 미해방상태로, 산동성전체가 해방구가 되고 최대의 근거지였다 산동성의 병력은 27만으로 8개사단과 16경비대로 50만의 민병을 보유하고 150만이 자위단으로 대규모 해방구였다 신사군 제3사는 소북에서 북상하는데 동북에서 가장 먼거리로 이동하여 고난의 장정이라한다 1945년 9월 23일 신사군 제3사장 황극성은 중앙의 명령으로 동북으로 북상하는데 무장하고 출발한다 이들은 5개성을 걸어서 2개월만에 도착하는데 행군일기를 작성하고 동북의 엄동을 만나 남방부대는 추위에 떠는데 이들은 영문을 모르고 동북에 도착한다 롱해선을 따라 행군하는데 특별히 긴장하고 북상하여 임기에 도착후 간부회의후 진의가 7대의 결의사항으로 동북으로 간다고 선언한다 매일 110리를 걸어 하북성에 이르러 지쳐서 50리밖에 걷지 못하여 피로로 두달이상의 기간이 걸렸다 출발시 35000명의 병력으로 무사히 동북에 도착하고,연안의 각종학교와 부대인원들은 섬북 진북 열하 차할이지구를 지나 11월 12일 열하성 부신(현재는 요녕성)에 도착한다 진수군 여정조부대는 32단 600명으로 10월중순에 심양에 도착하고,진찰기의 부대 만여명은 10월말에 심양에 도착한다 이어서 전국의 해방구의 간부들이 당중앙의 지시로 동북으로 집결하는데 진찰기의 25개단과 중앙간부 800명도 동북으로 간다 개인마다 15근이상의 짐을 메고 행군하는데 70리이상의 전진이 어려우나 하루에 180리길을 걷기도 한다 연안간부 2000명은 남진중 동북으로 돌아가는데 전국의 간부 20000명이 만주의 각지역에 근거지를 세우고 지방무장과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데 소련에서 돌아온 동북항련은 동북인민자위군으로 4만여부대로 확대되고 주보중이 사령원이 된다 1945년 12월중순 노북 노중 회수양안 기로예 기중 기동평원 황토고원의 팔로군부대와 신사군 간부들이 총 11만으로 동북각지에 배치되고 간부는 2만여명으로 동북항련 4만명이 국민당과 동북에서 역량을 겨루게 된다 1945년 5월 국민당군은 36개군단 73개사단을 4로로 평수 동포 평한 진포선철도를 따라 화북의 각해방구로 진공하여 미국은 공습기 군함 수송기를 지원하고 화남등지에서 천진으로 운송하여 북평 진황도로 진공한다 중공군은 동북으로 발전을 위해 화북 화중을 보위하는 전략목표로 평수 동포 평한 진포선철도연선의 해방구를 진공하는 국민군의 동북으로 통하는 주요교통간선을 엄호한다 10월 15일 중공중앙은 국민당군을 막는 철도파괴 도로파괴를 명령하여 진포선으로 북상하는 국민군을 완강히 저지한다 24일 당중앙은 진의에 전보하여 화중의 강대한 야전군을 조직하고 산동의 야전군을 동원하여 진포선을 저지한다 1945년 9월 국민군은 주요철도간선을 따라 화북지구의 홍군해방구를 향해 진격하자 중공은 다시 산동부대와 신사군부대를 화북으로 차출하고 진포서에 야전군을 신설하여 방어에 나선다 사령은 진의 여옥이 정치위원으로 산동의 역현에 지휘부가 들어서고 조장부근으로 1945년 10월 12일 화중과 산동의 양군구는 동북출병과 진포선방어의 공작을 동시에 시달하고 서주에서 제남사이에서 북진하는 국민군을 저지한다 이미 국민군은 서주-제남선을 통과하는데 등현 설현을 점령하고 중요교통선을 장악하여 10월 18일부터 대규모 전쟁에 돌입한다 연주와 대문구에서 전투로 승리후 덕주-제남사이에서 저지하고 다음해 1월사이 서주 제남전역으로 임성-조장사이의 철도를 절단하고 진포철도를 운행정지시킨다 등현을 점령하여 국민군의 북상은 저지되고 북평과 천진으로 이동하던 국민군은 이곳에서 저지된다 3개월사이 국민군의 희생은 28000명으로 투항한 일군을 앞세운 전투로 4000명의 일본군도 살해된다 당시 국민당군에 편입된 왕정위정부군 학붕거부대원 22000명이 반란을 일으켜 320공리의 철도를 점거한다 항전승리후 국민당의 12전구의 부작의부대와 연합한 왕정위부대의 수몽군부대는 귀수 풍진 도림을 점령하고 평수철도의 귀수역부근에서 집결하여 해방구인 장가구를 통제한다 평수철도연변을 장악하여 9월 11일 진찰기군구의 주요병력이 수원전역에 투입되고 부작부대의 주력과 격전을 벌인다 섭영진과 하룡부대는 귀수를 포위하나 포위하던 내몽고 포두와 귀수를 추위로 포기하고 철수한다 10월중순 진찰기예군구는 동포선으로 북상하는 국민군부대를 류백승 등소평부대가 평한로로 북상을 저지하여 석가장에서 북평선을 저지한다 정주 신향방면의 국민군의 북진을 막기위해 한단이남에서 저지하는데 6만부대와 민병을 동원하여 장하이북에서 한단이남의 부양하투지역에서 국민군을 섬멸한다 당시 한단은 하남해방구의 중심지로 양득지가 필사저지하는데, 류백승 등소평의 지휘로 한단전역을 승리로 이끈다 이러한 연이은 전역으로 해방구를 유지하고 신사군과 산동군의 북상을 돕는데 국민군의 북상과 동북진출을 막는다 이러한 홍군의 저지로 국민군의 동북진출이 어려워져 미군의 비행기 함대를 동원하는데 소련과의 얄타협정의 협약에 의해 미군의 동북진출은 불가능하였다 국민당의 행정요원들은 공로로 동북에 입성하고 소련은 이를 승인하고 웅식휘가 장춘에 동북행영을 여는데 소련은 항의하고 철수이전에는 군대의 진입을 반대한다 소련군은 행정인원의 안전을 이유로 행영의 인원들이 외부출입을 저지하고 왕정위군 잔당을 통제하고 구금한다 국민당은 이미 홍군의 동북진입으로 근거지확대와 군대설립으로 웅식휘 장경국은 소련이 중소우호조약을 위반했다고 항의하자 소련의 해석은 동북은 동북인민들의 자주적 결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러한 정권이교방법은 동북의 장춘 하얼빈 심양 사평 치치하얼등 대도시를 제외하고 주요성시를 접수하는데 소련이 철수하자 대도시외의 지역은 토비와 공산당이이 접수하고 국민당 관리들은 모두 도주한다 일부지역에서만 국민당의 행정권이 미치는데,국민당은 문직관원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하여 10월부터 웅식휘는 장춘에서 소군과 담판하여 국민당군의 대련등륙을 허가해주길 바란다 소련은 대련은 상업항으로 화물만이 가능하다고 하여 국민당군대의 상륙을 거절하고 미군함정의 접안을 거부한다 10월 17일 국민정부대표가 소련과 협상하여 공중을 통한 운송을 요구하는데 소련은 다시 거절하여 10월 28일 두율명이 장춘에 도착하여 전관동군사령부인 소군총부에 도착하는데 버마원정군의 명장 두율명은 마리노프원수와 만나 우호조약에 의해 동북접수를 요구한다 훗날 두율명의 회고록에는 마리노프원수는 동북접수는 환영하나 대련과 려순은 다른 원수의 관할로 다른지역으로 등륙을 권하여 영구등륙을 허락했다고 회술한다 더불어 호로도항을 추천하나 당시 홍군이 점령한 상태여서 영구등륙을 확정하는데,러시아 정부당안소에는 국민당군의 영구등륙을 홍군에 즉시 연락하여 섬멸하도록 권한다 소련은 영구에서 철수하고 두율명은 상해로 돌아와 미군과 협의하고 1개군단을 출발시키는데 11월 7일 미군함이 도착하고 영구의 소련군은 종적을 감춘다 소련군은 사라지고 동북인민자치군이 항만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미군함정의 등륙시 전투를 준비하고 위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미군은 당시 규정상 중국경내에서 작전이 불가능하여 부득이 진황도로 배를 돌려 철수한다 10월중순 진황도는 미군이 등륙하고 점령하여 국민군은 이곳에 상륙하여 동북으로 진공한다 홍군은 동북에 집결한후 추위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데 보급문제와 장비문제로 부신현의 일군보급창고에서 많은 옷감을 발견하고 몸에 걸치는 수준으로 해결하고 남방에서 홑옷을 걸친 병사들은 동사에 직면한다 하루밤에 수백명이 동사하고 동상으로 희생자가 속출하고 참혹한 환경에 직면하여 곤경에 빠진다 신사군 3개사단의 북상으로 산해관을 넘자 보급의 애로에 직면하여 옷과 신발 3만점을 중앙에 요청하는데 북해라 부르는 군표로 화폐를 대신하는데 동북에서는 통용이 불가능하였다 산동의 초원금광에서 금덩이를 가져와 나누어주어 고량미를 사먹는데 산동의 군대는 동북의 고량미에 거부감으로 곤란에 처하여 장가구의 부대가 급히 옷 양말 신발 양식보급을 담당한다 무기장비의 부족도 문제로 연대에 기관총 하나로 구식으로 지주들의 헌금을 유도하여 해결한다 홍군은 소련에 큰 희망을 걸고 진형 원방으로 표현하고 모든정책은 소련군에 기대하는데 소련은 국민정부와 협정으로 대도시를 국민당에 넘기고 9월 28일 중공은 소련 조선 외몽고 열하에 의탁하여 중점성시와 농촌을 근거로 지구전을 지시한다 동북의 각지역으로 분산배치하여 발전을 지시하고 대도시를 포기하고 장기전으로 탈환을 기하는데 중경에서 돌아온 모택동은 10월 19일 동북국에 장개석군의 등륙을 저지하고 요녕 안동을 먼저 장악하고 점차로 동북전역을 접수하도록 명령한다 군중을 기초로한 근거지확보를 명하여 동북의 독점을 바라고 임표가 동북으로 배치된다 모두가 이에 고무되고 나영환이 합류하고 1945년 10월 31일 동북에 진입한 홍군은 동북인민자치군으로 개칭하고 임표를 총사령으로 팽진 나영환이 정치위원으로 여정조 이운창 주보중이 부사령이 된다 동북발전의 수요에 적응하기위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은 11-12월 동북군의 편제의 정리로 10개군구로 27.5만명으로 늘어난다 동북의 위치는 구대형으로 보급에 용이한 지리로 홍군은 10여개의 근거지로 사면의 적을 상대로 하는데 모택동은 진황도의 연산의 관액에 주시한다 1381년 명의 대장 서달이 산해관을 세우는데 명장성의 기점으로 화북과 동북으로 통하는 곳으로 료서주랑을 통해서만 동북의 진입이 가능하다 요서주랑의 지리위치는 매우 특수하여 서로는 천리에 걸치는 연산산맥이 이어지는데 동으로는 발해만으로 천연교통의 요도로 산해관은 요서주랑의 입이다 모택동은 산해관을 전략지점으로 정하고 국민군을 저지하도록 하여 분산정책에서 산해관 북변의 금주로 전역량을 집중하도록 하여 심양선을 저지하도록 한다 진황도에 등륙한 국민군은 북영로를 통해 산해관에 접근하여 북진중의 홍군을 금주로 회군하도록 하여 하북성 옥전현에 도달한 산동의 양국부부대는 중앙의 급전으로 즉시 산해관으로 가는데 지방무장을 조직하도록 한다 이들은 소련이 제공한 장비로 지방유격대를 조직하고 하북 열하의 증원군과 국민군의 저지를 시작하고 만명이 곧 10만으로 늘어나는데 미군의 무기로 장착한 국민군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5일 새벽 국민군의 대거 진공으로 구문구 의원구가 붕괴되고 철수한다 산해관보위전은 홍군의 국민군의 동북진입의 지연을 노린 전투로 홍군의 안전한 동북진입을 목표로 한 것이다 홍군은 금주지역을 전략구로 국민군과 맞서는데 임표가 지휘하는 7만의 군대를 배치하고 국민군 2개부대를 저지한다 그러나 군중의 지지부족과 무기장비의 열세로 불리하여 국민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황극성의 간언으로 금주전선을 포기한다 주민들은 전쟁에 질리고 양식을 숨겨 홍군은 식사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하고 당시 동북의 주민들은 경제의 호전으로 일본을 호의적으로 대하던 곳이다 임표는 전선을 돌아보고 금주를 방치하고 심양선으로 철수하여 국민군을 기다리는데 동북독점의 희망이 멀어지고 다시 농촌근거지 전략으로 전환하고 국민군은 대거 진공한다 11월 국민당은 소련과 제4차담판으로 소련을 비난하는데 외교압력으로 웅식휘는 동북행영을 산해관으로 이동하고 장개석은 미국총통 투루먼에 호소하고 중국통일을 소련이 방해한다고 호소하고 장경국이 소련을 방문한다 17일 소련대사관은 국민정부 외교부에 중공원조를 부인하고 소련의 잠정적 철수를 발표한다 소련군은 국민군의 대도시 진공과 접수를 돕기로 하고 11월 19일 소련은 중공의 모든 병력을 3일내에 심양에서 철수하도록 한다 11월 25일 팽진 나영환은 심양에서 본계로 철수하고 심양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살해되고 장춘선의 주변성시는 혼란으로 지방무장과 토비 왕정위군등 신편제부대가 연속 반란을 일으키고 조직이 엄중히 파괴된다 특히 치치하얼의 형세는 엄중하여 중공 눈강성소재지로 홍군을 철수후 국민당은 지주와 지방무장으로 18000명의 광복군을 조직하여 현성을 점령하고 공산당원들을 대량으로 살해한다 전국의 해방구에서 집결한 10만이상의 부대와 2만명간부들은 절망에 빠지고 위기에 처한다 중앙은 전략방향을 조정하여 12월 7일 모택동은 장춘 심양부근의 농촌근거지를 기반으로 겨울철에 15만의 야전군을 정비훈련하고 20만의 지방무장으로 춘계대공세를 준비하도록 한다 국민당은 동북의 대중도시를 점령하였으나 대중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중소도시위주의 전략으로 최종승리를 준비한다 류소기의 대로를 양보하고 양변을 점령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으로 적의 예봉을 잠시 피하여 철도연선을 비롯한 농촌과 중소성시를 군중중심으로 실력을 기른다 적극준비로 장기전으로 돌입하여 최후에 대도시를 점령하는 전략으로 12월 28일 중공은 동북근거지 공고화의 지시로 동만 북만 서만의 공고한 근거지를 세우고 결정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임표 고강 진운 이부춘은 12.28지시로 군중공작을 시작하고 근거지의 설립에 착수하여 농촌과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지방무장을 조직하고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다시 적용한다 일개월동안에 수차례의 반복과 좌절은 당시 동북의 정세의 긴박함을 보여주는데 복잡 극렬한 변화가 몰아친다 실사구시의 정신과 신속한 전환은 중공의 특색으로 1946년 1월 14일 중공은 동북인민지원군을 동북민주연군으로 개칭하고 임표가 지휘하는데 편제를 조정하여 동만 남만 서만 북만의 4대군구로 정편하고 신노부대로 나누고 훈련을 하여 확군하고 북만은 고강이 지휘하고 송강 합강 북안 목단강 눈강부대와 산동의 7사 섬감녕의 359려로 편제한다 남만은 정재세 소화가 지휘하고 료녕 안동 료남부대로 나누고 동만은 주보중 임봉이 지휘하여 길흑 통화 길림 료북부대로 나눈다 서만군구의 여정조는 장학량의 구부대로 이부춘과 지휘하여 신사군 황극성부대 눈남부대 료서 길강부대로 개편한다 산동에서 동북으로 온 62978명의 부대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고 정예부대로 내전중 가장 우수한 부대로 발전한다 1945년말 국제정세가 미묘하게 변하는데,미국은 국민당의 실력에 의문으로 중국정책을 바꾸는데 친미정권을 세우려 하고 12월 15일 투루먼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의 정당대표들의 국민회의를 열도록 한다 내전을 종결하고 중국의 안정과 통일을 촉구하여 마셜원수를 파견하고 투루먼의 특사로 국공의 화해를 권한다 소련은 전후목표가 원동의 평화를 바라고 스탈린은 중국이 중립국이 되길 바라고 장개석의 집권을 바란다 중공의 제한적 지원으로 국공의 평형을 바라고 두 개의 중국으로 힘의 균형을 바라는데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길 바란다 1945년 12월 16-27일 미영소의 삼국은 모스크바에서 외상회의가 열고 중국문제에서 삼국의 중국불간섭과 장개석주도의 평화를 바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정신으로 12월 21일 미국참모장 연석회의주석 마셜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의 내전을 조정하기로 하여 장개석을 중심으로 연합정부를 바라는데 장개석에 대한 압력을 가하고 장개석은 1945년말 중공에 정치협상회의를 요청한다 미국과 국공의 3방 군사조정기구를 세우고 화평방식의 정부구성을 제안하여 1946년 1월 7일 국민당대표 장군 공산당대표 주은래는 마셜과 협상을 시작하고 1월 10일 국공대표는 내전중지협정에 서명한다 쌍방은 1월 13일부터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서명후 교통회복문제와 동북을 휴전의 대상으로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평한 진포 농해철도의 회복을 바라는 국민당은 정전과 교통회복의 조치로 인식하자 중공은 철도통차를 미루어 철도의 회복은 중공교통의 마비로 이어지는데 진찰기해방구는 철도의 개통으로 와해될 위기에 처한다 진포선의 개통은 산동의 해방구가 무너지는 것으로 1946년 1월 10일 정치협상회의는 교통회복을 합의하나 중공은 내전종식후 개통을 바란다 특히 동북문제의 명확한 결정을 못하여 장개석은 동북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고 천명하여 소련의 점령상태를 유지하여 중공은 동북도 중국의 일부라는 논리로 정전을 바란다 장개석은 모호한 협정을 기회로 동북진군을 강화하고 동북의 내전을 지속한다 장개석은 관내의 정전협정을 이용하여 동북으로 군대를 집중시켜 동북의 독점을 노리는 전략으로 중공의 저항에 부딪힌다 1946년 1월 15일 중공은 임표에게 장개석이 동북문제의 협의를 거절하여 무력해결을 좌시하지 말 것을 통지하고 국민군의 동북진입을 거부하고 격파하라고 지시하여 평화는 멀어져간다 이때에 특수한 전쟁으로 중공이 전략적 주동권을 확보하게 되는데 1946년 1월 10일 국공대표는 내전중지협정으로 전투행위를 중지하나 동북의 문제로 표류하여 중공은 전투를 준비하고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1946년 2월 북영로에서 국민군의 진공을 막는 전투로 승리한다 수수하전투로 대규모의 섬멸전으로 사기가 오르고 3월 12일 소련은 돌연 심양에서 철수하고 국민당은 심양에 입성하고 소련은 사평에서도 철군한다 홍군은 사평으로 진공하는데 국민당은 사평접수가 무산되고 3월 18일 국민당군은 동북전체로 진공하는데 홍군과 충돌한다 이어서 무순 안산을 접수하고 장춘으로 향하자 동북은 긴장하고 사평은 북만의 근거지로 홍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곤경에 처한다 중공중앙은 시간전쟁으로 생각하고 장춘 하얼빈 만주리 수분하를 목표로 3월 24일부터 사평을 보위하라고 지시한다 사평에서 국민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장춘공략을 극력 저지하길 지시하고 남만주력을 본계에 집중하여 적의 견제를 지시한다 북변에서는 소련이 장춘에서 철수하면 장춘진공을 노리는데 농촌에서 다시 대도시를 노리는데 대로작전으로 4월 14일 소련은 장춘에서 철수하는데 다음날 홍군이 진공하고 4일간의 격전으로 장춘에 입성한다 4월하순 소련은 하얼빈과 치치하얼에서 철군하여 북만의 대도시를 홍군이 모두 점령한다 사평은 북만의 문호로 동북중부의 평원으로 3조의 철도가 교차하는 곳으로 동서남북으로 진출이 가능한 곳인데 동북의 전략요지이다 국공쌍방은 수차의 쟁탈전을 벌이는데 홍군이 장춘을 점령하던 날 4월 18일 국민당의 버마원정군의 정예부대인 신1군과 71군이 사평으로 몰려오는데 생사의 결전이 벌어지고 국민당의 30만군은 부단히 증병되고 유격전에 익숙한 홍군은 진지전에 고전한다 후방의 지지와 근거지의 취약으로 고전하여 주민들은 두 개의 정권의 혼란중 방황한다 지역토비들은 국민당의 계급장 수여로 공산당을 적으로 간주하여 불리한 상황으로 협공을 받는다 4월 27일 사평전투는 대치상태로 국민당은 본계를 공점하고 신6군은 북상하여 사평으로 증원된다 료요상부대는 최신장비와 버마전에서 경험으로 공군의 도움을 받고 본계전투는 중과부적으로 진행되어 5월 3일 국민군은 본계를 점령한다 본계함락이후 홍군은 불리해지고 손립인이 영국에서 돌아와 지휘하는데 홍군은 50리의 방위선을 세우고 저항한다 5월 15일 참렬한 전투로 국민군의 동시진군으로 탱크의 위력을 막지 못하고 탑자산 전투는 제고점 탈취전으로 5월 18일 국민군의 맹공으로 포탄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임표는 이날밤 사평에서 철수명령을 내리고 모택동에 보고하고 북으로 가는데 적은 추격해오고 송화강을 넘고 유격전의 한계를 느낀다 홍군은 교하를 건너 돈화에 이르고 심산으로 숨는데 양식문제로 고전하고 열차를 약탈하기도 하여 생존한다 그러나 이열차는 동북홍군의 물자를 싣고 철수하는 차로 하얼빈과 가목사로 가 대기하는 열차인데 약탈한 것이다 31일간의 전투로 홍군은 8000명의 희생을 치루고 참렬함이 최대로 영향이 지대한 전역이다 이전투로 국민당은 동북독점의 계획을 수정하는데 국민군은 장춘 길림점령후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하고 4개월동안 휴전에 들어간다 이기간에 홍군은 근거지확보와 군중동원으로 귀중한 시간을 얻고 송화강 북안으로 철수하여 동서만주지역에 착근하는데,국민당은 사평전이후 동북의 20만 평방공리를 장악하고 동북의 80%에 달하는 공업과 광산을 확보한다 대도시와 주요철도간선을 확보하고 해방구의 면적은 축소되어 북만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민당이 점령한다 더구나 지역별로 분할되고 장개석은 사평전이후 공산당은 괴멸한 것으로 착각하여 하얼빈 공략에 나서는데 동북9성 보안사령관 두율명은 전선이 늘어가자 두려워 한다 점차로 통치에 한계를 느끼고 병력의 분산으로 동북의 우세는 어렵다고 느끼는데,송화강을 경계로 국민군과 홍군은 나누어진다 1946년 미국은 국민당의 동북점령은 대도시와 송화강 남단의 20만 평방공리로 서로의 보복전을 보고 마셜은 장개석에 압력을 가하고 15일간의 정전과 교통회복을 중공과 담판하도록 한다 1946년 6월 6일 국공은 15일간의 동북휴전협정을 하고 4개월을 연장시킨다 중공은 이기회에 다시 전략부서를 개편하고 전쟁을 준비하여 6월 3일 동북국은 유격전과 운동전으로 장기태세에 돌입하고 중소성시와 농촌근거지 투쟁에 돌입하고 6월 16일 중공은 임표를 동북국 서기로 동북연군총사령과 정치위원을 겸임하게 한다 1946년 7월 3일-11일사이에 동북국은 하얼빈에서 확대회의를 열고 77결의를 발표하는데 동북근거지 공고화를 결의하고 강령성 문건으로 향후 정책의 방향이 된다 전조직이 농촌으로 가 토지개혁과 군중성 강화로 동북의 형세를 바꾸는데 사회안정이 필수로 토비문제가 대두되어 국민당이 해방후 동북의 병력이 없어 수편정책으로 만주군출신과 토비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위임장과 계급을 주어 공산당을 견제하고 통치의 조력수로 양성한다 이들을 선견군이라 부르고 지방통치를 하나 약탈자로 정치토비인데 협조후 반란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치안유지가 어려운 동북의 기마약탈대로 우환의 대표적인 예였다 1945년말 국민당은 토비수편으로 10만명이상을 받아들이고 무기장비의 지원으로 기병 탱크로 무장하고 박격포공격까지 하여 북만의 여러성시를 장악하고 통치와 약탈을 병행한다 1946년 7월 11일 77결의로 중공은 동북의 주요임무에 관한 결의로 근거지의 공고가 핵심이다 사회안정을 위한 토비의 정리가 필수로 합강 목단강지역의 소공작전으로 토비의 소탕에 나서는데 단시간내 후방을 공고히 하는 전략으로 30%의 병력으로 소탕을 시작하여 6월 중하순부터 고강은 북만지구의 토비를 전면공격하는데 장편소설 임해설원은 저자가 곡파로 종군노군인으로 실화소설이다 양종귀는 교동출신으로 토비섬멸의 영웅으로 흑화에 능하여 정찰대장으로 현지의 허가사우 구표 이발림 마희산등 토비를 섬멸한다 1947년 2월 6일 목단강지역의 유명한 국민당 보안대장 좌산조를 생포하여 유명해진다 그러나 그해 3월 정삼포 정환장을 공격하다 살해되는데 30세로 세상을 떠났다 합강성은 토비가 가장 성행하여 40여조직인 만여명의 토비가 있어 약탈을 일삼는데,사문동 이화당 손영구 장우신등 토비의 세력이 막강하여 동북의 4대깃발이다 이후 3개월동안 의란현등에서 토비소공작전으로 11월에서 21일 사문동 잔부를 소멸하고 15집단군 총사령 중장 사문동 장우신 이화당을 모두 소탕한다 1947년 3월 손영구를 붙잡아 1945년 9월에서 1947년 4월사이 동북항련은 토비와 1300여차의 전투로 10만의 토비를 섬멸한다 이후 민중의 지지로 무한한 역량이 생겨 14년의 일본통치로 동북의 주민들은 민주연군은 생소하여 국민당을 정통으로 아는데 국면을 전환시킨다 간부들은 도시를 떠나 농민들과 생활하며 동북의 농민들은 장기적 잔혹한 통치로 민족의식이 강하여 민족을 배반한 한간들을 청산하는 투쟁이 열린다 동북의 토지중 30%이상이 일본인 개척단의 것으로 만척소유와 군용지로 무상지급하고 조세를 감소해주어 배천현의 최대지주는 400여 농민들이 소작하고 100여마을 전호로 만들어 착취하여 공산당의 3대기율 8항주의에 모두 위배되어 토지개혁으로 축출한다 공산당은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수천년 봉건의 고리를 끊기로 하고 항전이 끝나고 일본인들이 떠나자 동북주민들의 희망이 현실로 변하여 인심을 얻는다 1946년부터 원보촌에서 토지개혁을 시작하는데 작가인 주립파가 주동적으로 토지개혁에 참가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 폭풍취우를 쓰고 1961년 영화로 제작되어 사회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소설은 토지개혁만이 아닌 해방전후 동북의 신구사회의 교체를 반영하여 위대성을 보여준다 1946년 7월-11월사이에 중공의 54지시로 토지개혁을 하여 2604만묘의 토지를 500만원에 농민들에 헐값으로 분배한다 공산당은 빈곤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이들이 공산당의 지지로 전환하여 생산력이 올라 15%이상 증산하고 1947년 춘경에서 종식면적이 25%이상 증가한다 토지개혁으로 봉건사회에서 해방되고 모두가 공산당에 입당하고 참전하여 동북민주연군은 37만명으로 늘고 지방무장 자위단등 각종단체가 생겨 공산당의 역량을 강화해준다 자위대가 소비 토개등으로 신속히 늘어나 길림 목단강 열하의 3개지구에서 민병이 22만명에 달하고 서만의 자위군은 12망명으로 늘어났다 동북근거지는 노력속에 안전한 후방 보급의 기지로 장대하게 발전하여 중국의 내전중 큰 작용을 하여 원래의 의도를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비옥하고 광대한 동북의 토지는 내전중 해방군의 양식을 지원하여 승리의 원천이 된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사소한 일에도 민중의 편에서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77선언이 공포된 10개월후 인심의 획득으로 미래의 승리를 담보하고 주민들의 자발적 협력을 얻어낸다 1946년 6월 국민당정권은 전면내전으로, 남만은 공세로, 북만은 수세로 하여 동북과 화북해방구를 단절하면 승리한다고 믿고 전면적 공격을 하고 산동의 해방구와 동북의 해상로를 단절한다 특히 관내의 군대를 북만으로 수송하고 전동북에 집중공격하여 동북전장의 4개월휴전후 국민당군은 대거진공한다 동북민주연군은 남만을 저지하고 북만을 공고히 하여 남북의 밀접한 작전방침으로 신개령전역,삼하강남전역,임강전역등으로 국민당을 통격하고 4만명을 섬멸한다 1947년 7월-1948년 6월사이 진공전략으로 변환하고 동북의 총병력을 46만으로 증강하여 국민당은 수비위주로 임하고 동북홍군은 춘계 하계 동계전투로 국민당군 30만을 섬멸하여 요지인 사평을 공점하고 길림등 70여성시를 공점한다 인구는 1700만을 해방시키고 40만 평방공리를 획득하여 동북의 전경을 공점하여 승리의 기초를 마련한다 1947년 10월 10일 홍군은 성명을 발표하고 전중국통일구호를 내는데 장성내외의 혁명에 대한 신기상으로 고조되어 1948년 1월 1일 동북민주연군을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고 동북군구와 야전사령부로 하고 정치부 후근부를 세우고 동계공세후 요심전역을 시작하기전에 장춘 심양 금주등 몇 개의 대도시로 압축하고 고립시킨다 연병과 자질향상 자신감을 고취하고 간부소양을 상승시키는 정편작업으로 군대를 새로 재편한다 이선병단과 야전병단으로 나누고 총병력은 1947년의 2배이상으로 증강하고 100만대군으로 늘린다 포병 공병 장갑병 철도부대로 재편하여 합성군대로 편성하여 협동작전과 대도시의 진지전에 대비하고 제고시킨다 1948년 9월 12일 요심전역을 발동하여 52일간의 영용작전으로 동북홍군은 69000명의 희생으로 국민당의 전략 1집단을 섬멸하여 472000명의 적을 격퇴하고 동북전역을 공점한다 이후 동북을 보급기지로 중국전역을 점령해 나가는데 요심전역후 모택동은 휴전후 입관전쟁으로 돌입한다 1948년 11월 23일부터 주력군이 관외로 진출하여 73만병력이 출정하는데 희봉구 냉구 산해관으로 입관출정한다 번개처럼 진포선을 따라 화북야전군과 평진전역을 성공시키는데 주동적인 공략에 나선다 11월이 되자 국민군은 홍군의 관내진출에 놀라고 홍군은 더욱 신속히 진공하는데 요심전역에 미군의 장비를 고스란히 획득하여 화력을 갖추고 진공하는데 국민당의 부작의 집단군은 계속 후퇴를 거듭한다 평진전역은 2개월간의 전투로 국민당군 52만을 섬멸하여 화북의 고립부대를 제외하고 모두 공점한다 평진전역의 승리후 공산당의 총부와 기관이 북평으로 이전하고 전국적 진군을 시작한다 1949년 1월 인민일보는 모택동의 무산계급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공언하고 병사들을 치사한다 1949년 3월 11일 동북야전군은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개칭하고 평진에서 남하후 황하를 건너고 농해를 넘고 장강을 건너고 예악을 거쳐 상감지구와 양광지역에 도착한다 선후로 안신 선사 상감 형보 광동 광서등 전역에서 승리하고 백숭희군 여한모군등을 섬멸하고 40만의 적을 섬멸한다 이어 해남도 만산군도에 이르는데 동북의 해방군이 백산흑수에서 출발하여 신중국의 성립에 불후의 공적을 남긴다 1945년 5월 중공7대회상 동북의 전략임무를 제기한 모택동이후 9월의 중공중앙의 향북발전 향남방어이후 출관에서 입관으로 3년사이에 동북을 탈취하여 전략목표를 달성한다 모택동은 1948년 5년내에 승리가능성을 예측하나 1948년 11월부터 일년안에 국민당정부 전복의 자신감을 갖는데 결국 3년반만에 승리한다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에서 승리를 선포하는데 동북의 공헌은 너무나 큰 공헌이고 더불어 동북의 인접국인 북조선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데 국민군과 전쟁시 물자지원과 전략적 불리한 상황에는 북조선으로 퇴각과 복귀를 거듭한 것이다 공산당은 평양등 여러도시에 물자를 비축후 국제적으로 판매하여 보급품을 마련한다 중국과 북한은 단순한 우방이 아니다 김일성은 중국내전을 통해 영토를 얻고 미국이 지원하는 국민당정권이 대륙에 남는 것이 두려웠다 중국의 노인계층과 1970년 이전에 태어난 철저한 혁명교육을 받은 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을 지지한다 그들은 북한의 문제는 단지 지도자의 무능때문이라고 믿는다 갑짜기 떠오르는 단상...주제가 넘지 않을지.... 소련은 표면상으로는 국민당정부와 협조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중공을 지원했다 소련은 유럽이 중요했고 미국과 확전을 바라지 않았다 중공이나 국민당이 대세력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사촌이 논사면 배도 아팠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큰세력이 되길 원하지 않고 바라보며 이익계산에 바빴다 지금이나 그때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은 우리를 큰세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늘 과거의 속국이던 시절의 자세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고 벼락부자로 잠시 잘먹고 사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큰 관심도 없다 미국과 일본때문에 화내는 척 할뿐이다 오천년역사에서 단지 1949-1992년사이 43년간 미국하고만 친한것만 해도 밉다 이제 살만한데 옆에서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전쟁을 할 이유도 없고 내부결속만으로도 바쁘다 부자 몸조심 할때도 되었지 않겠나 사실상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고 도와줄 큰 명분도 없다 우리길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지도층과 가진자가 늘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원로를 갖는 사회가 아쉽다 모두가 잘난 한국인들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사고는 느낌만으로 하고 내이익만이 중요하고 내가족만이 중요하다 따져보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필요를 못느낀다 다른사람은 늘 나보다 나쁘고 못났다 잘나고 합리적이어도 인정하고 싶지않다 그러나 웬지 강한자의 편을 들고싶다 사적인 이익은 모두 취하고 공적인 사회적 손실에는 모두가 눈을 돌려버린다 어찌할꼬 새벽에 잠못이루고..............
--------------------------------------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매일경제 MBN 중국 경제문화 연구소장 박기수
댓글쓰기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3대 비밀정원' 성락원, 이조판서 별장인 줄 알았는데.. (0) | 2019.05.26 |
---|---|
[스크랩] 문헌상의 대륙조선 원래 위치 (0) | 2019.05.18 |
'공산성 갑옷'에 숨은 백제 멸망의 비밀은? (0) | 2019.05.07 |
조선의 왕릉 (0) | 2019.05.04 |
오백 년 조선왕조를 만날수 있는 곳, 조선왕릉 (0) | 2019.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