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죽이기'에 있어서 첫 번째는 이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곧 습관이 이전과 같이 강압적으로 마음을 산란케 하지 못하고, 유혹하여 마음을 빗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의 고요를 깨뜨리거나 마음을 복잡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죄의 활력과 생기와 민첩함과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힘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갈5:24) 고 바울은 표현하였습니다. 102p
'죄 죽이기'는 신자들의 일입니다. (중략) 거듭나지 아닣나 사람이 그와 유사한 일을 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받을 만큼의 수준으로 그 일을 해내는 것은 자연인 (거듭나지 못한 이)에에게는 불가능합니다. 113p
그들(유대인)은 '죄 죽이기'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그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그것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114p
어떤 죄를 죽일 의도가 있다면,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참예한 바 되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고서는 '죄 죽이기'를 결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125p
모든 정욕에 대해 의무를 다 이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며 그런 일이 하나만 있다 할지라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40p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처럼 많은 죄 가운데 있는 것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 여전히 그 악이 거한다면, 그 악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쁘고 더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167p
하나님께 비하면 땅의 사람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고, '없는 것'과 같으며, '저울(천칭)의 먼지'와도 같습니다.(사40:13-15)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여 자신의 마음의 교만을 낮추고, 자신의 영혼을 속에서부터 겸비하게 하십시오. 203p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을 부추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정욕이나 부패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멸망한 사람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55:1-3, 계3:18) 257p존 오웬의 죄 죽이기에 대한 단상-조 광성
필자가 영국 노팅험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만났던 칼 트루만(Carl Trueman) 교수는 그 기간에 존 오웬에 대한 중요한 저작 한 권을 출판하였다(The Claims of Truth: John Owen's Trinitarian Theology). 비슷한 시기에 필자는 노팅험 한인교회의 주보에 오웬의 죄 죽이기에 대한 아홉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연재하며 오웬의 글을 소개한 바 있다. 필자의 시도는 교인들의 실제적 유익이라는 지극히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트루만 교수의 경우는 불행하게도 “영국 신학계의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린 오웬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본격적인 작업을 감행한 것이다. 오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오웬의 깊고 넓은 신학에 대한 보다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 이전에 그의 실제적 유익에 대한 보다 폭넓은 자각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번역 소개된 <존 오웬의 죄 죽이기>(SFC)는 같은 역자에 의해 앞서 번역된 <존 오웬의 영적 사고방식>(청교도신앙사)과 더불어 진정한 성화의 정의와 실현을 필요로 하는 한국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필독서이다.
이 두 책은 한 쌍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죄 죽이기’가 성화의 소극적 측면을 다룬다면 ‘성령의 생각’을 추구하는 ‘영적 사고방식’은 성화의 적극적 측면을 다룬다. 이 두 측면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일이다. 한 면에서는 죄의 잔재들을 적발하여 이와 투쟁하며 죽이는 일을, 또 다른 한 면에서는 우리의 사고와 정서와 의지의 전체가 성령께 온전히 부합되게 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할 때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 그 아들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존 오웬의 죄 죽이기>는 로마서 8:13에 근거해서 옥스퍼드의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오웬이 행한 연속 설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자체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한 구절을 두고 집요하게 분석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활의 세세한 측면에 적용시키면서 죄의 기만적 속성을 철저히 밝혀내어 성도들로 하여금 이에 대면하여 싸우게 하는 놀라운 통찰과 실제성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웬은 이 주제를 크게 둘로 나누어서 다루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원리적 측면을 다루며, 후반부에서는 아홉 가지의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원리적 측면에서 오웬은 먼저 성도 안에 내주하는 죄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자각시키고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공중에 붕 뜬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이 면은 제임스 패커가 쓴 자전적 성격의 서문에 잘 지적되고 있다). 죄의 주관하는 권세는 깨트려졌을 지라도 여전히 존속하는 죄의 현실은 그 기만적 전략을 통해 성도들을 공략하고자 하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섣부른 무장해제에 빠진다면 죄의 고도의 전략 앞에 속속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웬은 톤을 높여서(아마도 실제 설교에서는 그러했으리라고 본다) 강조하고 있다. “만일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죄를 항상 죽이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갈피를 잃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항 받지 않는 원수들에게 두 배로 세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복을 당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뻔합니다. 죄가 교활하여 언제나 틈을 엿보고 있으며, 강하여 항상 우리 영혼을 죽이는 작업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미련하여 죄가 가져올 파멸에 자신을 방임하고 있다면, 어디서 위로 받을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죄의 최대의 전략은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성령을 주심으로 죄를 무겁게 다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우리의 가장 큰 원수를 대적하여 이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지원군을 만홀히 여기는 일”을 저질러서는 아니 된다. 죄 죽임의 과정에 있어서 성령과 관련된 두 가지의 잘못된 인식을 오웬은 잘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고행이나 금식 등을 통해 성령 없이 자기 힘으로 하려는 어리석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일을 성령께만 돌리고 자기는 힘쓰려 하지 않는 경우이다. 많은 복음주의적 신자들이 이런 경향을 가진다. 은혜에 대한 피상적 이해 때문이다. 오웬은 지적한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지, ‘우리에게 억지를 가하시거나 우리 없이 혼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 죽임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은혜를 무력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죄 죽이기를 힘쓰게 될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활성화된다.
원리적 측면에서나 실제적 지침의 제시에 있어서 오웬이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은 죄를 죽여야 할 것으로 보고 이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온정적 자세로 임하는 태도이다. 오웬은 오늘 우리 시대에 보기 어려운 예리한 눈으로 참 신자의 표징과 외식자의 표징을 구분하고 있다. 참 신자 속에는 성화에 대한 진지한 갈망과 죄에 대한 최고조의 아픔이 있다. 그러하기에 죄에 대한 선전포고와 싸움과 죄 죽임을 위한 깨어 있는 노력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외식자는 은혜를 죄 허용의 구실로 사용한다. 오웬은 매우 재미있는 논증을 통해 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미인에게도 자세히 보면 사마귀나 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못생긴 사람이 말하기를 나도 사마귀나 티가 있으니까 따라서 나는 미인이다 하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참 신자는 그 작은 티 하나라도 없애기 위해 아파하는 데 비해, 외식자는 자신의 티나 잘못을 감싸기 위한 방안으로 은혜를 도용한다. 오웬의 지적은 참으로 예리하다. “육신은 은혜를 빌미로 삼아서 탐닉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오웬은 많은 유사한 경우들을 지적한다. 외향적 행동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죄의 유혹에 그 뜻이 쉽게 동조하는 사람, 체면이나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죄를 허용하고 이와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 파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 등은 매우 위험한 증상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상태에서 자기 마음의 평안을 위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식의 약처방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다.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그리스도의 징계 받으심이 우리의 눈을 채워야 합니다.” 그만큼 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혐오감”을 동반한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며 가장 겸비하게 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죄 죽이기’, 살벌한 표현이 아닌가? 오늘날과 같은 가벼움의 시대에 선보이는 무거운 주제의 책 하나를 우리는 앞에 놓고 있다. 과연 이 시대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모든 시대에 진리가 받은 대접을 이 책도 동일하게 받을지 모른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받겠지만, 진리 대신 죄와 세상과 자기의 정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맹렬한 비난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