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쌍화점에서 송대관까지 이어진 천년가요역사

도심안 2019. 1. 6. 23:54


 

쌍화점에서 송대관까지 이어진 천년가요 역사  

 

순창 쌍치등면, 삼장에서 '고금소총'책도 송세림이 지어 

 고려 송인,  조선 송세림,  한국  송대관이 대를 이은 한민족 가요 샘터 삼장사 

   

  쌍화점은  순창군 쌍치등면 저 산신을 고려 송인이 신봉하여 삼장사를 지어 부르다가  송씨 몰락시기에 지은이 '오잠'은 전남도 함평으로 도피한  것으로  본다

 

사랑영화 쌍화점과 천추태후로 이어지는 애로 예술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미래는 행복한 인생창조의 예술창조시대를 예시하고 있다

 사랑을 죄악으로 통치한 조선500년으로 사랑의 행복은  없었다

 한국사랑 문학이 단편소설 소나기, 메밀꽃필무렵,으로 애독자가 있지만 이 고려 충열왕시대 처럼 표현이 대담한 시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조선중종말기 임금의 대변을 눈.코 혀로 맛을 보아 진찰하는 '대장금'을 중종과  애인으로 미화하고 각색한

연속극 '대장금'이 세계에 한류예술로 대 진동한다 

명나라 유교학문을 아주 싫어하는 연산군 임금 앞에서  한문문자를 아는체하는 연극대사를  '공길'이 외치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간 '공길' 을   연산군과 동성애하는 사이로 창작하여 ‘왕의남자’를 힛트하여 아시아 한류문화로도  진출하고 있다

대장금, 공길 같은 인물은 전혀 사랑도 행복도 없는 사랑과 음악을  엄금한 불행한  조선 지옥국가 사람이였다

이처럼 우리유교문화 500년에서는 아름다운 소재가 아주 희박하다

6.25 전쟁까지도 사람을 잔혹하게 목베어 죽이고 그 귀신이 나타나는게 모두  스토리 제목이 우리전설 내용이다

‘전설의 고향’ 드라마 스토리도 대부분 이런 이야기 뿐이다

쌍화점이야기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아무나 창작할수도 없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도 사형을 당하듯 표현의 예술 창작 자유가 전혀 없다

'토정비결' 글귀문을 보면 거의가 “구설(말조심)을 조심하라 형옥(刑獄 구속)이 있다” 괘가 아주 많다

한민족은 마동과 선화공주, 온달과 평강공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등등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또 신라 선덕 여왕 때에 '지귀(志鬼)'라는 천한 젊은이가 단번에 선덕여왕을  사모하게도  되었다. 실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서해 해상세력이였던  문창군(군산 선유도)군수 아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여  887년에 정읍 태인과 순창 쌍치면 김제 금산사 지역 4개현  태수 통치자  '태산태수'로 4개현을 통치하였다   

쌍분기 설화에 따르면 최치원은 17세(874년)에 빈공과(외국인 대상 과거)에 합격한 뒤 이 당나라 율수지역 현위(縣尉)로 근무하던 중 이 묘의 사연을 듣게 된다. 여인 2명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시키려 하자 고민하다가 함께 자살했다는 얘기였다.

 

중국의  최치원 박물관

당나라의 최치원 행적이 중국 가고순(高淳) 박물관에 진실하게 전시되어 최치원의 정읍생활에서 음악종교 교육을 짐작한다   

 

'쌍녀분(雙女墳)' =최치원과 여인 혼령이 나눴다는 애틋한 사랑의 설화 '쌍녀묘 이야기(雙女墳記)'의 쌍녀분이 중국에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치원은 이 무덤 속 두 여성 혼령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 뒤 '쌍녀분기'를 지었고 이는 고려시대 설화집인 '신라수이전' 등에 전해지고 있다. 난징(南京)에서 남쪽으로 약 100㎞ 떨어진 가오춘(高淳)현에 자리 잡고 있는 쌍녀분은 지표에서 약 2m 높게 원형 분봉이 올라가 있고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놓여 있다. 분봉은 동서로 약 30m, 남북으로 약 20m 크기였다. 이 무덤이 국내 언론에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치원은 그들을 위로하는 시(詩)를 지었고, 시에 감동한 혼령은 최치원이 묵었던 객사로 찾아와 술을 마셔가며 그간 쌓였던 한과 회포를 풀었다. 술로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은 서로 남녀사랑인연을  청해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었다고 '쌍녀분기'는 전하고 있다.

최치원이 두미녀와 여관에서 열정으로 꿈같은  밤을 세운다

유교성인으로 위장한 한국기록과는 정반대로 조선의 거짓역사를 알수가있다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가오춘현은 최근 이 묘를 복원해 중요 문화유물로 지정한 뒤 관리하고 있다.


비석

        최치원이 중국에선 유교가 아닌 처녀무덤에서 무속신앙 살풀이 글을 쌍분묘에  이렇게 비석에  써 올렸다

유불선 통합종교로 활동한거 같다

신라 '화랑도' 무속종교로서 가무로 귀신과 대화하며  달래어보내는 명당경(묘지 무당굿)을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하고 그노래를

'삼대목'으로 정읍군수 근무지 쌍화점 마을 삼장 에서   887년에  출판하여 궁중에 바첬다

 

'쌍녀분(雙女墳) 설화를 최치원과 여인 혼령이 나눴다는 애틋한 사랑의 설화 '쌍녀묘 이야기(雙女墳記)'의 쌍녀분이 중국에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치원은 이 무덤 속 두 여성 혼령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 뒤 '쌍녀분기'를 지었고 이는 고려시대 설화집인 '신라수이전' 등에 전해지고 있다. 난징(南京)에서 남쪽으로 약 100㎞ 떨어진 가오춘(高淳)현에 자리 잡고 있는 쌍녀분은 지표에서 약 2m 높게 원형 분봉이 올라가 있고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놓여 있다. 분봉은 동서로 약 30m, 남북으로 약 20m 크기 라고 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 879년(헌강왕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회남도의 

수도인 양주로가 토벌대장 고병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토벌대에 참여했다.

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무력난이 아닌 문장으로 황소의  난을 제압함으로 중국전역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황소를 죽인  황소의 부장 주전충이 구테타로 당나라는  망국에 들어선다

그래서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했으나 진성여왕 신라궁중에는 박씨 귀족이 세력을 잡고 있엇고 최치원을 시기했다 최치원은 정읍 태산태수로 887년에 와서  그해에 음악책 '삼대목'이 출판 된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사랑소설 작가였으나 조선사림파 선비는 명나라 식민지를 자랑하는  유교학자로 속였다 

 

'수이전' 신라소설에서  선덕여왕의 사랑, 삼대목가요책,을 정읍에서 사신맞이 자료로 악공교육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 태산태수시절  최치원의 쌍분묘 사랑 이야기가 종교로 되어 정읍지역에서 가르처서  이곳은 처녀가 죽으면  반드시 길에 뭍어서  최치원 같은 청년남자를 처녀귀신이 따라가라는  의미로 길밑에 관을 뭍었다

그래서 해방후  자동차, 마차, 등장으로 관이 깨지고 길이 파여저  웅덩이가 생기고 관속이 보여 무서웠다  

 정읍은  백제시대 부터 중국 오나라와  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사신행차 맞이 가무향연 고을 이였다

 

 

 

 중국사신이 가장 많이 통행한 곳, 정읍 음성향은   이자겸의 소유지  정읍 음성마을 태인허씨 땅

 오나라 송나라에서 항주와 당나라 낙양에서 사신이 반드시 정읍 음성향미을에서  가무공연을 하였다

 

 중국사신 마음에 만족하는 음악과 춤이 매년 시시로 이곳에서는 국비로 호화롭게 공연된다

마한 백제 신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유일한 사신맞이 터는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맞이터로 이자연, 이자의 ,이자겸 삼대가

세력을 잡고 고려를 통치했다

이곳은  고구려 신라가 없애버린 가야국의 왕족이 망명하여  살다가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  당현종을 도와준 태인허씨가 

 당현종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정권에 실패하였고 최치원도 귀국하여 신라궁중에서 왕따되어  태산 태수로밀려낫다

태인허씨는 가야망국으로 백제에 망명하여고 백제마저 망하자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 당현종을 도운 공으로 이씨성을 받아서  

이씨와 허씨로 혼용하여 사는  정읍 허씨 호족지역으로 당나라  활동 세력의 집결지로서 최치원이  태산태수로 부임한다

이곳은 당나라 안록산의 난에 참전한 태인허씨와 중국에서 대대로 고향사람으로 친교과계가 있어서 최치원은 고향땅

군산에서 가까운 태산(정읍칠보)군수로 부임하여 당나라 유불선교의 학문과 예술을  교육시켰다

최치원은 학당을 만들어 국방 예술 학문을 가르처 인재를 양성했다

고려가 통일하여 신라계통의 궁중인맥으로 이어지다가  글안의 침입으로 고려 현종임금이 나주로 피난하였다는데

삼례. 장곡.  태인 왕림마을에서 숙박하면서  후백제 호족 학문과 가무에 교육을 받은  학문과 시 가무에 능숙한 태인허씨

외손자 딸 (김은부 딸)셋이나  모두 고려 현종의 왕비로 들어가서  태인허씨 (인천이씨) 세도시가  바뀌게 되었다

이자의. 이자겸의 난 그리고  최충헌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송군비. 송송래. 송인의 친몽고 세력이  모두 수천년  국운 성사가

달린 사신맞이 시가잔치의 예술기능의 역할 활용이 있었다

 정읍 입암산에서 7차 몽고군 남침 전에서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격퇴하고  화친하여 왕권을 찾은   고려  원종과 충열왕은 

 정읍사람 송씨 송인이 세력을 장악했다

이런 냇가에서 송나라 왕희지는  시를 짓고 붓글씨 난정기를 썼다

 

송나라에서 온 성씨 후손   송인 .오잠은 이런 곳을 선택하여 여기에서 시를 짓고  엄청나게 삼장사에서 쌍화점노래를 하며

연등회를 하여 가무예술로 송나라예술 유행의 첨단지역을 이루어 이곳 노래가 궁중에서 사용되어 고려사 충열왕과 태인시씨

여자 시무비가 도라산에서 동거하였고, 이곳 태인 허씨 친족 허씨 충열왕비(양천허씨)가 몽고공주보다 먼저 결혼했다 

송인의 고향 여자 둘이 충열왕의 후궁으로 몽고공주 제국대장공주를 독살하여  한때 송씨 세력이 몰락하 였다

고려 원종은 원나라 하위 서열인 왕자 쿠빌라이를 도와서 황제에 오르게 하여서 유독 고려여자를 황후로 들이고 고려인 고급벼슬을 시켰다

측천무후를 흑치상지가,...  당현종은 왕모중이,  당현종은 태인허씨, 황소의 난에는 최치원 등등 중국의 혁명마다 한국인이 도와서 성공을 이루었던 노하우 그 기능으로 다시  원나라의 왕자 세력 다툼에 고려 원종과 친한 쿠빌라이(홀필열황제)가  고려국  송군비, 송송래 송인의 배경 세력이 있었다

송씨는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왔다  송나라 사신과 가장 친한 이자겸이 자기 소유지 산간지역으로  노령산맥 정읍지역 입암면 내장산 쌍치등면 산내면 지역에서 주로 살았다

그래서 중국어에 능통하여 원나라 와 혼인등 친교가 많앗다

이후에 출세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사람 송인의 후손 송세림이 지은   '고금소총'의 현대판 광고사진


연산군 시대 만든  음란소설 어면순. 고금소총은  삼장사   산내면 지역   송인의  후손인 송세림이 저자 이다

정읍 칠보면  무성서원의 선비명단에  '송세림' 가문에서 숨긴 고금소총 어면순이 이제는 화려한 신문광고로 미래시대 문화 산업으로  힛트를 예고한다

어면순에 등장하는 사람의 내용 중에서   정읍 옹동면 사람 '일제'와  고부사람 '모씨'는 실제 이곳에 살았던  인물이였다 

조선 세종시대부터  간통하거나 음란한 글을 써도 처형되는 한민족의 지옥시대가 되었는데

민족주의자 연산임금의 후원으로 고금소총, 어면순 책을 무성서원에 모신 송세림이 출판하였다

 그런 자료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사신맞이 향연지로 사신의 취향에 맞는 각종자료가 노령산맥속 삼장사에 숨겨저 있었다

송나라가 원나라에 밀려날 때에 태인허씨 이자겸 3대의 통치시대 이자겸의 땅으로 망명한 송씨. 척씨. 유씨 등등 송나라인이 책과 유교서적등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이곳은  송나라 첨단 문화가 앞서 배우는 곳이다

그리고 송군비장군의 입암산성 전투에서 몽고군의 관원등을 체포하여 17년을 정착하여 살았다

최초의 한글시조 ‘태산이 높다하되(이항.양사언)’  한글소설 ‘홍길동전(허균)’ 한글가곡시 상‘춘곡(정극인)’ ‘악학괘범‘한글시  정읍 동동(유자광)이 모두  호족 송인의 후손이   정읍시 산내면 순창 쌍치등면(雙置等面) 접경지역에 있다

세종때 박연과 악학괘범의 저자로 알려진 성현은 주자학 맹종 한민족음악  (동동 정읍)등을 페가망신 소리로 말살을 주장한사람이다

 

고려시대 왕권과 대등한 권력시대 최근  최규하 대통령시대 전두환 세력으로 비교가 된다

고려시대는 가문의 신앙은 고향의 산천신앙 제사이다

태인 송씨의 본산지  물길 위로 2키로 지점에 쌍화점 삼장 마을이 있다

고려시대 쌍화점은 송인이 만들었고  고려 가요왕이고,  대를 이어 그 후손 송대관이 지금의 가요왕인가

 

왕족 같은 세력 허씨 (이자겸 동족)송씨 가문에서는 연등회 팔관회 산대잡희 화산대등등 의 축제에서 촛불 몇 개가 아니라

봉화불로 거대하게 밤을 밝히는 화산대(火山臺)였다

고려 현종 또는 고려 원종시대부터는 이곳에는 연등회가 엄청난 규모였다

타 지역 사람도 여기에 와서 송씨가문을 위해 일부러 봉축하기도하여 자연히 남녀사랑이 이곳이 최고로 이루어젔다

그래서 상치등면(雙置等面) 쌍봉, 쌍치봉(雙置峰) 옥촉(玉燭) 옥대봉 (용태봉)의 지명으로 산에 불을 밝히는 산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상치등면(雙置等面)에서 置等은, 置燈으로  쌍치등(雙置燈)인 말이 조선시대 상치등면(上置等面)으로 

전혀 말뜻이 안 되는 말로 되어 있다

 

이곳 출신으로  현재  서울시의원으로 있는  허기회 시의원 역시 대대로 여기  쌍치면 '삼장사'에서 대대로 불공 드린 집안이라고 그의 부친 허병욱(작고) 씨는 나에게 전해 주었다

전쟁으로  삼장사가  소실되었어도 이곳 삼장사 국사봉이 영험하여  산입구에 새로 지은 암자 절에 명패를 걸고 매년 시주하고 제를 지낸다고 했는데  영험이 있어   그 아들이 서울 관악구에서 시의원에 당선된다는  매죽리 사람 박주석. 오삼금 등이 나에게  이야기 했다

6.25 전쟁시에 고지 봉화불을  모든 산봉우리에  성탄추리 처럼 전쟁하며 피운것을 나도 보았고 지역사람들이 산을 숭배하고  동요 새노래도 지어 부르는 것이 전통의 흔적이 아닌가 한다

수천년간 매번 중국 사신맞이 잔치구경에서 시와 가무 의복 얼굴단장 등 최고의 유행 수준으로 나타나는 가무여인은 누구나 손목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마을이름이 삼장사 앞마을이 먹산, 먹실로부른다

먹골. 먹실은 거의 먹을 만드는 공업단지 먹공장 마을이다

송나라 왕희지가 42인의 제자와  바위로 흐르는 물위에서 시를 짓는 유행의 풍속이 신라 경주 포석정과 이곳 정읍시 칠보면 유상대 최치

 

원 유적에만 있다

                  ' 학당'이란 문자 기와 고려 원종때 처음생긴 고려시대  대학교(조선시대 강등)가 정읍시 칠보면 태산군 터에 출토

 

그리고 고려 원종  송씨 집권세력시대 세운 학교 “학당(學堂)” 역시 송씨의 고향에 설치되었고   학당 무늬의 기왓장도 출토되었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

쌍화점은 충열왕시대 세력가  송인,  고금소총은 송세림, 그 후손으로  '전주국악대사습대회' 창설자 송광섭 .송영주 (1960정읍국회의원) 그리고  가수 송대관, 지금 까지도 노래 왕관을 지키고 있다

후백제 견훤이 남기고 간 백제궁중악을  고려시대부터  허사문. 이자겸. 송송례 .송인 순으로 이어받아  후손이 계승되어 조선시대 세조대왕  유자광(악학괘범 저자). 송천희. 송세림, 그리고 이시대 가수왕 송대관이 그 소리를 이아오고 있다 

 송대관과 같이 태인 이발사 친구 이현선은  이곳 옹동농악단 설장구로 옛친구 이야기를 한다

쌍화점 삼장()을 오잠이 노래를 지었다고 학계에서 말한다

오잠은 송씨가 집권하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갑자기 급제하여 문하시중 평장사, 태자태사 등을 역임하고 좌명공신으로 함풍(함평)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함평으로 하였다

오잠은 함평에서 개성(서울)에 가려면 정읍을 거처야 하고  송인 세력의 충열왕시대 같은 무리로 보인다  

송씨, 오씨 모두 송나라에서 온  중국어에 능숙한 가문으로 원나라 왕자 쿠빌라이를 황제로 세우는 고려 지원집단으로 보인다

가야국 청도(이서고국)에서 경주를 점령하여 놀란 신라가 고구려의 지원으로 가야가 망하자

백제로 망명한 허씨는 백제 부흥군 당나라 측천무후 당현종의 구테타에 참여하고  안록산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고려에서 견훤과 왕건의 전쟁에서  공을세우고 신라계 유긍달 김치향  김부식의 세력을 밀치고 이자겸 3대에서  송나라 거부로 망명한 송씨가 정읍에서 이의방 시대까지 세력을 키우고 살았다

그러다가 몽고의 7차침입에 송군비장군의 대승과  최씨정권을 숙청하고  몽고와 친교하여  예술의 전성시대를 풍운 속에서도  지금까지 이어 왔다

 한민족의 토속예술 한류문화는  예술과 사랑을 금지한  조선시대 이들의 눈물로 이어젔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아리랑은 애국가
글쓴이 : notan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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