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스크랩] 옹동사람 유자광-산내사람 홍경주, 그리고 대장금

도심안 2018. 12. 28. 04:23
옹동사람 유자광-산내사람 홍경주, 그리고 대장금
대장금은 산내 장금리 홍경주의 딸 희빈 연생이와 함께 입궐한 노비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정읍이 사계절관광도시로 가려면 대장금의 산내면을 잡아야 한다. 7배의 관광비를 주며 대장금을 보려고 한국에 오는 중국인을 잡아야 한다.

정읍시는 부서 개편을 통해 '사계절관광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읍 주변 시군은 이미 사계절을 겨냥한 관광산업으로 나아간 뒤이다. 고추장, 복분자, 판소리, 죽공예, 지평선쌀,  임실농악 등등 그들 시군을 대표할 관광상품으로 무장, 관광지로서의 위상을 높힌주변 시군에 포위돼 있는 형국이다.

그들에게는 긴시간 노력과 노하우가 있다. 따라서 그들을   무작정 따라서 모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읍은 수십년 동안 단풍철을 독점하여 몰려드는  관광객 홍수에도 동양 최고의 정읍사 음악을 알리지 못하고  기회와 세월을 허비했다.

현재에도 정읍은 아시아인이 매혹된 대장금을 버리고  어디에나 흔한 펜션이나 휴양지로  매꾸려는 지 걱정이된다.

   
▲ 장금산 가을 풍경...장금산에서 배를타고 대장금이 만든 약주를 마시고 뱃놀이 하고 싶다.
사계절관광이라? 컨텐츠를 찾아라...대장금과 산내 장금리가 포인트

전북이 공연장수가  전국 최고인데  반하여 공연 횟수는 하위권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시설만 세우고 행사만 떠들썩하게 벌이고  시민에겐 소득이 없는 결과를  책임지지 않고 있다.

사계절 관광이라는데 봄, 여름, 겨울을 무엇으로 호감을  느끼게할 것인가? 그런 고민끝에 정읍에서 대장금의 연관성과 역사를  찾는 것이 가장 쉬운 길로 보여서 자료를 올린다.

대장금의 친구 연생이 중종의 후궁 희빈이라는 사실을 연속극에서 보았다. 산내면 장금리  옥정호 속에 대장금의 환상을 찾는 유람선 관광을 할 수도 있다.

역사속에 왜곡된 옹동사람 유자광

정읍 산내와 대장금의 연관성을 찾아보자. 유자광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유자광은 정읍사 노래를 한글로 악학괘범에 올려놓은 정읍사람이다. 그는 호남인맥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고 반호남세력인  한명회, 김종직, 조광조 세력을 막아내었고 음악 진흥의 공로자이다.

인조반정과  퇴계 율곡, 유성룡등 '유자광죽이기'에 가담한 세력이 집권하여 지금까지의 유교중심세력으로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유자광을 왜곡, 역사까지 왜곡했다.

진실은 다른 것이다. 유자광은 두 명의 고모가 있었는데 한명은 신숙주의 숙모(작은엄마)이며 남원에 살았고 또 한명은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에 살았던 권채의 부인이었다. 그래서 유자광의 부친 유두명이 전남 영광에서 남원까지  두딸을 찾아 자주 이곳에 왕래하여 둘째 부인을 만나서 서자로 유자광을 소생한 것으로 전한다

대장금 친구 연생이인 중종의 후궁 희빈은 산내 장금산의 홍씨

 어린시절 유자광과 홍경주는 옹동면에 사는 고모를  사이에 두고 사돈이 되는 셈이다. 세종시대 대사성이였던  권채(1399-1438)의 어머니 홍씨를 사이에 두고 7촌 사돈이 된다.

권채의 어머니 남양 홍씨 홍빈 (洪斌)의 딸이  유자광의  고모의 시어머니이고  그러니까 홍경주는 친정 집안 조카  손자 벌이 된다.

홍씨는   우왕 창왕 숙청시대 신주 모시고 정읍으로 피신하여 연고가 있고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시대 그리고 중종반정 주 군사 권력자 유자광과  그 군사조직이 영호남에  대기하였다  

정읍에는 홍경주는 귀족이되어 상경하고    그 형님 홍경림의 후손이 주로 정읍의 집성촌을 이룬다    

정읍의 산내면 장금산의 홍씨  홍령등은 단종 폐위시  정순왕후를  모시다가 임실  갈담에 은신하여 살았다. 그리고  장금산 성황당에서 단종복위를 기도했고  유명한 의적 홍길동 역시 가까운 친척이다.

홍길동과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는 홍상부(증조부)의 같은 자손으로 8촌간이다.

중종 반정후 토사구팽 당한 유자광

억울하게 죽은 유자광의 정적 조광조를 홍경주와 측근 세력이  피해를 입혔다. 홍씨, 권씨 두 가문인 이들은 벼슬을 하면서 서울 근교  퇴계원의 인접 마을에 주로 거주했고 낙향하거나 친척, 그리고 노비 등의 식솔들은 정읍에 산 것으로 양쪽의 족보에서 확인되었다.

중종반정 때 외부 병력동원의 중심 책임자였던 유자광이 유순, 유순정, 박원종, 성희안보다도 큰 공신이었다. 중종은 유자광부터 시작하여 이들 공신들을 치밀하고 교묘하게 의문사로 제거하였다.

유자광은 근세의 박정희 5,16 구테타에서 속아서 실패한 "장도영"장군처럼 꾸며서 역적으로 매장시켜버렸다. 중종은 유자광이 중종 반정 이후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는 등 세력이 커지자 사헌부를 시켜서 서자라는 이유로 숙청해 버렸다.

세조때부터 중용된 유자광은 호남인맥의 중심

세종 때 한글 창제에 참여한 신숙주와 동부승지 권채의 친척으로 유자광은 총명한 두뇌가 인정되어 세조의 정권에서 중용되고 이시애의 난과 남이의 사건을 평정한 권람과 한명회가 득세하는 가운데서도서 오뚜기처럼 버텨온 호남인맥이다.

유자광은 특히 신숙주의 후광이 있어 큰 인물로서 예종과 성종, 연산군 시대에 큰 세력이었다.
성종과 연산군 시대의 각종 가무연희의 행사 개최에는 유자광의 힘도 크게 가세하였다. 여기서 유순, 유순정은 같은 문화 유씨이며 성희안은 유자광과 같이 악학괘범을 지은 성현의 친족이다.

그리고 박영문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서 군자시부정(軍資寺副正) 신윤무(辛允武),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과 더불어 군대 동원의 책임을 맡아 거사를 성사시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1등에 책록된 유자광이 키운 자들이다.

 

특히 중종반정 거사시에 박영문은 유자광의 명으로 김포현에서 대군을 모집하여 합세했다.

삼포왜란을 평정한 공로자   박영문이 중종이 유자광을 숙청한 것에 앙심을 품고 홍경주를 중심 세력으로  모반을 꾀하다가 여종 정막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정막개라는 여종만 없었어도 호남과 문화예술의 역사는 다르게 바뀌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중종은 박영문에게 홍경주와 통했느냐고 갖은 고문을 하였어도  끝까지 아니라고 하였다. 중종 1년에 유자광이 단 한번  박영문을 칭찬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사헌부에서  유자광을서손이라는 이유로 계속 끈질기게 한달간 성토한 결과 유자광은 숙청 된다. 누가 봐도  토사구팽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왕으로 만든 유자광을 중종은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 자료 역시 조선왕조 중종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유자광의 숙청, 홍경주와 박영문, 신윤무, 이장곤 등이 모반했다는 기록이 이사실을 증명하여 준다.

유자광과 홍경주, 산내 장금리 살던 대장금이 입궐하게된 배경

세조부터 중종까지 득세한 유자광과 홍경주는 옹동과 산내 사람이었다. 홍경주는 중종의 후궁이자 연생이인 희빈홍씨의 부친이다. 희빈 홍씨가 후궁이 되려고 입궁할 때 산내 장금리의 홍씨집 노복 대장금이 함께 따라와 입궐하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고향의 산신을 종교처럼 믿는 시대이기에 고향은 곧 혈통같이 믿고 살았다. 유자광과 홍경주는 대장금이 산내면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고리이기에  여기에 올린다.

   
▲ 대장금이 살았던 산내면 장금산 황토리 난국정 앞이다. 고려시대부터 동류수 명당터로 홍씨, 임씨, 송씨들의 본거지이다.

출처 : 한민족소리 찾기. 아리랑은 애국가
글쓴이 : notany 원글보기
메모 :

'태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화경(숙빈최씨)  (0) 2018.12.28
숙빈최씨  (0) 2018.12.28
[스크랩] 최항 (1409년)  (0) 2018.12.25
유재길, “은평(을) 무공천 결정, 정치적-법적책임 물을 것”  (0) 2018.12.24
장달수의 한국학   (0) 201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