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어쩌면 이 '교수 초년기의 에피소드'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박형용박사가 사기당했다는 삼천만환, 그 문제를 물타기하려고 WCC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 통합 측의 주장이다. 그로 인해 합동과 통합의 교단 분리가 되고 합동은 WCC에서 탈퇴하는데, 삼천만환이라....만원권으로 하면 세 다발 정도 된다...아들 박아론 박사가 가지고 있다가 제자들에게 목격되었던 돈다발이 그돈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박아론 박사는 왜 그돈을 은행에 넣어두지 않고, 침대 밑에다 두고 보관했는지...)
●'부자동역'(父子同役)의 아름다운 전통 세워 ●개혁신학 파수 위해 생애 바쳐 ●교회 정치에 민감하다 상처 입기도
기독교 역사를 찾아보면 대를 이은 목회자들이 많이 있고, 신학자들 가운데도 대를 이어 가르친 학자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지금까지 4대 목사 가정이 3가정이 있고, 신학자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박형룡, 박아론 부자의 사역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30대의 젊은 강사
필자가 총회신학교 신과(현재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과정)에 재학중일 때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가 헬라어를 가르쳤다. 그분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들 가운데 그분 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젊은 총각교수는 열심히 헬라어와 현대신학이라는 과목을 강의했는데 그가 바로 박아론 교수였다. 그는 미혼으로 교수로 부임했으나 얼마후 김성혜 여사와 결혼하였다.
그의 전공이 교의신학인데 헬라어를 가르쳤으니 '위인설관'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독특한 캐릭터와 박형룡 박사의 아들이라는 후광이 우리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매 시간 마다 헬라어 퀴즈를 했고, 그 다음 시간을 시작할 때마다 성적 분포도를 칠판에 적어놓고 성적순으로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와서 답안지를 받아가게 하였다. 그러니 모든 학생들이 누가 제일 퀴즈시험을 잘 쳤고, 누가 몇 점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고, 누가 제일 못쳤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 학생들이 경쟁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일등을 하려고 하고 또한 꼴찌를 면하려고 하였다.
물론 필자는 항상 첫 번째로 이름이 불렸다. 그는 열심히 헬라어 강의를 하다가 필자가 칠판을 바라보고 웃고 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것인데 '정 선생, 내가 틀렸습니까? 왜 웃어요?'라고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나이가 적다보니 학생들의 태도나 말에 아주 민감하였고 더욱 무게있게 군림하려고 하였으며, 동년배인 김의환, 간하배 교수 등과 묘한 경쟁을 하는 것으로 학생들에게 비쳐졌다. 이것이 평생동안 그에게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고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신학자의 아들
박아론은 '신학자의 아들'이었으며 자신도 또한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1934년 12월 2일에 박형룡 박사와 박순도 여사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병춘이고, 박형룡 박사는 두 아들을 아론과 모세로 불렀다. 그가 태어난 곳은 평양신학교 교수 사택이었으니 이것이 그가 가야할 길의 지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세 살 되었을 때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었고, 박형룡 박사는 성경표준주석을 집필하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그래서 박아론은 일본 도꾜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그후 박형룡 박사가 일제 말기에 만주 봉천(심양)에 설립된 동북신학교의 교수로 가게 되므로 가족들은 다시 만주로 옮겨 갔다. 그래서 박아론은 만주 봉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박형룡 박사는 부산의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되어 박아론은 부산에 와서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또 부친이 서울 남산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상경하자 가족들은 다시 서울에 왔고, 박아론은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졸업했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핀 것처럼 그의 삶의 궤적은 부친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다. 평양, 일본 도꾜, 만주 봉천, 부산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는 변화의 일상들이었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체험인 동시에 뿌리의 흔들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신학자의 아들'이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고 이것은 한평생 그의 훈장이 되었는가 하면 그늘이기도 하였다.
미국 유학의 길
박아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쟁 중에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야할 때에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여기에는 부친의 후광과 미국 선교사들의 후원이 뒤따랐다.
그는 1955년 6월에 미국 미쉬간주에 있는 알마대학(Alma College)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1955-1957년에 다녔고, 뉴욕의 비블리칼신학교로 전학해서 1958년에 B.D.학위를 받았다. 다시 1959년 5월에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다.
박아론은 1960-1963년에 뉴욕에 있는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서 공부하여 Ph.D 과정을 수료하였고, 한국에 귀국하여 사역하다가 1971년에 캘리포니아신학대학원(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의 여러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족적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데는 이면에 이러한 공부 과정이 깔려 있다고 본다.
교수 초년기의 에피소드
박아론은 1966년에 귀국하여 '임시전임강사'라는 이름으로 교수 하다가 1967년에 총회신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66년에 서울 혜성교회 김신권 장로의 장녀 김성혜씨와 결혼하여 창신교회 건너편에 있던 동대문 스케이트장 아파트에 살았다.
그가 부임하던 같은 해에 입학한 필자의 동기생들이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날, 그는 우리반 학생들을 모두 그의 신혼 집에 초청하였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여서 우리 모두가 아파트라는 건물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더욱이 방 안에 있는 침대에 잠을 자 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좁은 아파트에 수십명의 학생들이 초대를 받았으니 앉을 곳이 없어서 거실에 몇 사람이 앉고, 나머지 몇 사람들은 침실의 침대에 걸터 앉아서 중국집에서 시켜온 짬봉을 먹었다. 그런데 나중 온 학생들은 앉을 곳이 없자 침대 위에 올라가서 앉게 되었는데, 여러 명의 장골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침대가 갑자기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우리 반 남학생들이 신혼 교수의 침대를 부셔놓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놀라고 당황하고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잠시후 더욱 놀라운 일이 생겼다. 얼굴이 핼쑥해진 박 교수님이 들어와서 메트레스 밑에서 2-3개의 돈 다발을 꺼내서 들고 나가셨다. 우리는 부러진 침대 다리보다도 그 돈다발에 더욱 놀랐다. 20원짜리 기숙사 밥도 못 먹어서 3년 동안 점심을 굶어왔던 우리로서는 그토록 많은 만원짜리 돈다발을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교수님댁을 나왔고, 사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돈이 어떤 내용의 돈인지 알 수 없지만, 침대도 처음 보는 당시의 신학생들이, 점심도 못먹어서 물로 배를 채워온 신학생들이, 그것도 만원짜리 돈을 구경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신학생들에게 비춰진 돈다발의 의미란 엄청난 경악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교수가 학생을 사랑하여 교수집에 학생들을 초대한 일과 중국집에서 시켜온 짬뽕 맛과 교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감사한 기억으로 남았을텐데 말이다.
밤에 찾아온 사나이
박아론 교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묘한 말을 만들어 사용하는 신조어(新造語) 능력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그가 1974년에 세종문화사에서 발간한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책이다. 책 제목에서부터 그의 묘한 특성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다른 하나는 총신 채플에서의 설교 제목이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를 본문으로 하여 설교하였는데, 그 설교 제목이 '밤에 찾아온 사나이'였다. 학생들은 이 제목으로 인하여 예배시간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후에도 장난끼가 동한 친구들은 '밤에 찾아온 사나이'는 '도둑놈'이나 '묘한 관계의 사람'이라고 하며 웃었다.
이것은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다. 그의 독특한 성격과 연결되어 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 측면이라기보다 성격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저술을 통한 연마
당시 총회신학교에는 동년배의 세 교수가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김의환, 간하배, 박아론 교수였다. 이들은 모두 1933-34년에 태어난 분들로서 여러 면에서 서로 달랐다.
김의환 교수의 경우는 이른바 대중성이 있는 현장 신학자였다. 유창한 언변, 인간관계, 정치적 역량 등이 탁월하여 한 시대를 리더하는 지도자였다.
간하배 교수는 미국 선교사로서 학문적 탁월성과 현장을 보는 분석력 그리고 선교적 열정이 가득한 학자 선교사였다.
여기에 비하면 박아론 교수는 전공의 성격도 있겠지만 대중성이 떨어졌다. 또 인간관계도 매끄럽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그는 외부 활동 보다 자기 연마에 몰두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학적 성숙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70년에 「현대신학은 어디로?」를 출간한 이후 10여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이것은 그가 저술에 우선권을 둔 결과이거나 대외적 활동에서 소외된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학자로서 전화위복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아론의 신학사상
박아론 교수는 「신학지남」 제61권 3, 4집(통권 241호, 1994년, 가을, 겨울호)의 「박아론 박사 회갑기념논총」에서 '나의 신학사상'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p.18 이하). 그는 이글에서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그는 '기독교 변증학'에서 반틸(C. Van Til)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반틸의 전제주의적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삼고, '반틸과 카넬을 조화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스스로를 '반케네라이트'(Van-Carnellite)라고 불렀다(이것도 그 다운 조어이다).
「현대신학 연구」에서는 반틸의 '원칙론적 비판'과 박형룡의 '원천 봉쇄적 비판'을 넘어 현대신학사상의 '상황적 기여'를 고려한 비판론 즉 보다 균형있는 '전시야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고 하였다.
「종말론」에서는 옛 평양신학교와 박형룡의 사상을 계승하여 '역사적 천년기 전 재림론'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반틸리안(Vantilian)이 아니라 '박형룡 학파'라고 강조하고 있다.
교회정치적 굴절 그리고 말년
박아론은 총신에 있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비주류적 성격을 나타내었다. 부친을 계승하여 자신이 총신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집념으로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이것을 행동화하였다. 1979년 이른바 비주류측이 이탈할 때 그는 신학교 교장직을 맡아 비주류측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그는 사당동의 총신을 향하여 매서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비주류 그룹이 분열의 악순환 속에서 흩어질 때 그는 총신으로 복귀하였다. 교단이나 학교에서는 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다.
그후 그는 총신의 수장이 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활동하였으나 그에게는 그 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정년 퇴임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를 명예교수로 추대하였다.
그의 행적에는 아쉬움 또는 안타까움이 있다. 총신을 은퇴한 그는 이른바 방배동신학교(백석대학교)로 갔다. 이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교단신문에 자신의 신학적 회고록을 다음과 같은 골자로 연재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주장한 논리는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평양신학교에서 이루어졌고, 이것을 박형룡 박사가 계승하였으며, 박형룡의 사상은 아들인 자신이 계승하였다. 자기가 있는 방배동이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본산이라는 것이다(이 회고록은 후에 출판되었다).
이런 그의 논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보다 실소를 자아내게 하였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를 묘하게 평가하게 되었다.
그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런 방배동을 그는 떠나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지 못하고 전철로 한 정거장 밖에 있는 개혁총회신학교(교장:정서영)와 한민족세계선교신학원(원장:조준상)에서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현재 <아버지 박형룡>을 저술중이다. 그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박형룡박사가 점점 잊혀져 가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쌓여왔던 오해를 풀어서 아버지의 위상을 바로 잡아드리고 싶다'고 밝혔다고 한다(기독신문, 제2086호, 2011. 11. 27일자, 3면). ◇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상담학 교수로 ■상담대학원장 ■교육대학원장 ■사회복지대학원장 ■도서관장 ■기독교교육연구소장등으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정교수는 또한 한국성경적상담학회장, 한국인간발달학회 이사, 미국상담학회(ACA)와 미국 심리학회(APA),그리고 미국기독교상담학회(AAPC)의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교수는 서울 역삼동에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개원하여 목회자와 사모, 평신도를 위한 상담교육과 실천에 힘써왔으며 계간학술지 「상담과선교」를 창간하여 70호까지(2011년 여름호 현재) 발행해 왔다.
저서와 논문 및 수상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전 35권)과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0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인간발달과 상담Ⅰ,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이명박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고문으로 사역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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