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쪽에는 손성태 박사, 서쪽에는 김정민 박사...그래서 운영자는 행복합니다. 마고의 역사를 전파하는 환부들...감사합니다]
마고대성의 장녀이신 황궁씨는 춥고 힘든 천산산맥으로 나가 수증복본의 맹세를 하였고 복본을 기어코 완성하였다. 그때가 11,151년전 그 후손이 수인(유인)씨고 그다음이 한인씨가 천산에서 계승하였다.
기원전 7,197년에 개국한 환(한)국은 12연방으로 다스렸고 그 땅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라 하였다. 부도지를 보면 사실상 사해가 모두 마고의 백성들이지만 환(한)단고기는 그렇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환국 12연방의 이름과 그 강역이 똑같이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사에 등장한다. 국내에서는 위서라 개거품을 무는 강단 식민사학 원흉들 때문에 연구 진전이 더디기만 한데 중앙아시아에 그 역사가 고스란히 보전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막힌 일 아닌가?
김정민 박사의 강의는 그래서 충격과 공포다.
* 김정민 박사 강의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vYizSx0XNqo&feature=youtu.be&list=PLH0cknw1Gi3Ykq1G6vXQlBsBmfnsH4V_6
아래 위구르 관련 글 생각 나시는가요! 아하 이제 알겠다.
황궁씨의 백성들 적통 카자크 족! 그들이 왜 우리를 형제국이라 하는지...
* “위구르와 한국은 둘도 없는 형제”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4857
투르크계 위구르인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이고 알타이 문화를 공유한다. 삼국 시대와 고려·조선 시대에도 영향을 크게 주고받았다. 한국전쟁 때 투르크족은 유엔군과 ‘중공군’으로 나뉘어 참전했다. 신장 위구르 지역의 유혈사태를 보면서 나는 내내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위구르 망명정부 지도자였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이었다.
1949년까지도 독립국가였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다시 건설하려는 이 백발의 투사는 내가 유학하던 터키 이스탄불의 옆동네 할아버지였다.
그는 조국 독립의 꿈을 한시도 접은 적이 없었다.
“위구르는 중국이 아니다. 결코 중국이 될 수 없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 역사적 배경과 살아온 문화가 다른데 어떻게 동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땅을 빼앗은 중국이라는 체제에 편입될 수 있겠는가?”
그는 1933년 위구르 지역에 건설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비행기 테러 폭파로 대통령을 포함한 동투르키스탄 정부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희생된 직후,
그는 중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터키에 망명해 위구르의 독립투쟁을 이끌어왔다.
1995년, 그는 끝내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94세로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의 아들 에르킨 알프테킨이 세계위구르회의(WUC)를 조직하고
독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다.
위구르인은 돌궐의 후예다. 위는 드라마 <대조영>에서 돌궐족과 동맹을 맺는 대조영.
나는 생전에 자주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을 만나 생생한 위구르의 현대사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유난히 나를 좋아했던 그가 유언처럼 남긴 두 가지 당부를 나는 잊지 못한다.
첫째로
위구르인은 지구상에서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이고 알타이 문화를 공유하는 형제로서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다. 그 후 중앙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면서 과연 위구르인들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많은 문화적 연대와 친근감을 가진 민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랄알타이 중에서도 알타이 민족으로 언어와 문화 면에서 한국인에 가장 근접한 종족이 위구르인이다.
투르크족인 위구르인은 흉노를 조상으로 한 돌궐의 후예다. 돌궐 때는 고구려와 이웃해 중국에 대항하는 군사연대를 맺기도 했다.
8세기께에는 실크로드를 거점으로 광대한 위구르 제국을 건설했다.
840년 키르기스족에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600년대까지 지금의 알타이 산맥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위구르족 일부는 계속 서진해 트란속시아나 지방에서 셀주크튀르크를 세우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출해 오스만 제국과 지금의 터키공화국을 이루었다.
‘회교’라는 말은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
고려 말 개경에도 ‘회회인(回回人)’으로 알려진 적지 않은 위구르인이 모여 집단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찍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위구르 말을 쓰고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면서 심지어 ‘예궁(禮宮)’이라는 이슬람 사원까지 짓고 살았다.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국제 교역의 전문가로서 조정의 이익을 대변해주었고, 조선 사회의 과학과 학문의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세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을 우리나라에 전수한 두뇌집단이었던 것이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도 우리말과 가장 닮은 위구르 어문이 크게 참고되었을 법하다.
한글 창제의 대표학자였던 신숙주가 위구르 문자를 빌려 쓰는 몽골어에 달통했다면 그가 위구르 어문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일부 위구르인들은 쌍화점처럼 토착 음식을 파는 가게를 열었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 우리 사회에 점차 동화되어 갔다.
덕수 장(張)씨, 위구르 설(遜)씨, 도(都)씨 같은 위구르인을 조상으로 가진 우리 성씨도 생겨났다.
나아가 다양한 중앙아시아·이슬람 문화를 우리 사회에 남겨놓았다.
지금 우리가 쓰는 ‘회교(回敎)’라는 말도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이며, 위구르 상인이 독점하던 청화백자의 청색안료는 회청(回靑)으로 불렸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의 과학적 원리도 조선 초기의 이슬람 역법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 때 신장 위구르에 살던 투르크계 위구르족은 중공군(왼쪽)에 강제 징용됐고, 위구르의 형제뻘인 터키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오른쪽)했다.
그의 두 번째 당부는 새로운 역사적 비극에 대한 회고였다.
“한국전쟁은 얼핏 보면 남북한 동족 간의 대결 양상이지만, 사실상 투르크족 간에도 서로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역사였다.
1949년 위구르 지역이 중국에 강제 편입된 후 한국전쟁 때 많은 소수민족이 중국군으로 징집되었는데, 특히 많은 위구르 동족이 총알받이로 한국의 최전선에 투입되어 희생되었다.
남한을 대표하는 유엔군의 최전선에는 또 다른 우리의 형제인 터키가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결국 여러 전투에서 투르크인 동족끼리 총질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위구르는 20세기까지도 엄연히 독립된 나라를 가졌다.
1863년에는 야쿠브 베그가 이끄는 카슈가르 독립국가가 건국되어 오스만 제국과 영국을 상대로 화려한 외교를 펼치면서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 모든 꿈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침략과 무력공격 앞에 맥없이 무너졌고
그 후 위구르인들은 숨을 죽인 채, 국제사회의 망각 속에서 중국의 인위적 인구 이주 정책과 체계적인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처절한 생존투쟁을 지속해왔다.
다른 투르크족 국가는 모두 독립했는데…
석유와 천연가스, 풍성한 지하자원을 가졌음에도 모든 경제적 이권은 중국인의 손에 들어가고, 이 지역의 정치적 권력도 한족 차지가 되었다.
차별과 소외, 가난과 실업, 종교적 박해와 민족적 모멸감은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위구르인의 저항을 폭력 테러쯤으로 몰고 가려는 중국 당국도 당당하지 못하다.
무장 테러 공격으로 반미 응징을 목표로 하는 알 카에다와
민족과 언어, 종교적 연대를 내세우며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위구르인의 자치와 독립 요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우리 처지에서는 21세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중국과의 외교 문제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것은 외교나 국제관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관의 문제이고, 자기 말과 글을 쓰면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원초적 민족 권리 문제이다.
이웃의 이슬람 투르크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은
모두 1990년을 전후해 독립했는데 왜 위구르 국가만 안 된다는 것인지!
어떤 논리와 정치적 명분으로도 그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을 가깝게 생각하는 위구르인의 처지에 대한 우리의 남다른 관심과 애착이 필요한 때이다.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경험하면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경험이 있는 우리 민족이
또 다른 소수민족의 정당하고 당연한 독립 투쟁을 외면한다면, 먼 훗날 역사는 우리를 어떻게 기록할지 두려움이 앞선다.
(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