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남편 죽자 첩의 눈 멀게하고…잔인한 악녀

도심안 2012. 12. 23. 06:02

남편 죽자 첩의 눈 멀게하고…잔인한 악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2.12.23 01:26 / 수정 2012.12.23 03:29

[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他者의 윤리학

베토벤은 전쟁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유로운 사회를 결국 만들어 나갈 것이란 기대로 ‘보나파르트’란 교향곡을 썼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 소식에 분노하며 제목을 영웅교향곡으로 바꿔 버렸다. 제국주의를 옹호해 애국시인이라 불렸던 정글북의 저자 R 키플링은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고 다녔지만, 아버지의 글에 고무되어 참전한 열여덟 살 아들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자 “우리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아버지들의 거짓말”이라고 고백하는 글을 남긴다.

아옌데와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겨루기도 한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는 반대했지만 스탈린과 카스트로에 대한 모호한 태도로 비난받기도 했다. 일제나 독재정권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정치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위대한 예술가들도 정치격변에 그리 힘들게 휘둘렸다면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일러스트 강일구
축제로 승화되건 추한 싸움으로 전락하건,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사람들 마음에 이런저런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특정인과 자신을 동일시해 정치관이 다른 사람들끼리 격한 말들을 주고받다 서로 의가 상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를 싫어하면 나쁜 사람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면 바보 아니면 우상숭배자라 매도한다.

분석심리학자 체 게 융이 말하는 마음의 네 가지 기능인 사고, 감정, 감각, 직관 중 ‘감정기능’만 활성화되어 극히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곳이 정치판이기도 하다. 상대는 얄팍한 감성에 휘둘리는 악의 세력이고, 내 쪽은 합리적인 선한 사람들이라 굳게 믿는다.

나라가 좁고 정책도 쉽게 변하다 보니,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이해득실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면도 있다. 난세에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기도 하지만, 파워콤플렉스가 우리를 사로잡는 힘도 크다. 셋 이상만 모여도 두목과 꼴찌가 생기고, 편 가르기가 시작되는 것은 무리를 이루어 사는 영장류의 특징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모진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이 모두 학살당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학에서 나와 다른 상대방을 깊은 감성으로 존중하고 만나야 개인과 사회가 모두 성숙할 수 있다고 했다. ‘나’의 바깥 존재인 타자와 진심으로 만나고, 절대자를 지향할 때만, 좁은 ‘나’ 에 갇힌 나를 초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고조인 남편 유방이 죽자 첩의 눈을 멀게 하고 손발을 잘라 그 아들에게 보인 잔인한 악녀 여치(여태후)의 악심을 지닌 사람도 아직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한다. 나랑 다른 세계관,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불편하고, 밉고, 껄끄러운 나의 그림자인데, 그들을 없애려 하는 순간, 내 영혼이 더 위태롭게 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이해해야, 내가 무의식에 억압하고 부정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더 성장할 수가 있다. 정치적 차이 때문에 얼굴 붉히고 실망했던 모든 사람이 다툼에 목숨 거는 작은 자아(ego)가 아닌 진정한 큰 가치를 지향하는 자기(Self)로 가는 개성화 과정을 체험해 보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