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스크랩] 김 태희 원곡의 [소양강 처녀] 사연

도심안 2012. 10. 13. 15:50
김 태희 원곡의 [소양강 처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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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태희의 원곡의 소양강 처녀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 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소양강 처녀]의 실제 주인공  


    지금으로부터 38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8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보극장 앞 네거리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한 10여m 내려가다 보면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

    지금은 이 사무실이 등촌동(큼큼...^^ 헛제비 동네이지라)으로 옮겨 가버렸지만,

    당시는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 주변이 스카라 계곡

    (예전에는 중대부속병원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가는 길에 남산에서

    흘려 내리는 물로 계곡을 이루었으나 훗날 복개되어 현재에 이름)

    이라고 불리우며 영화와 쇼, 그리고 가요에 관계된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담을 피우던 그런 곳이었다.

    이 작가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장차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쳇말로 그녀는 가수의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온 강원도 촌구석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사를 돕는데 책임이 막중한 그런 소녀였다.

    이런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인정파 젊은 가요작가

    (지금은 60이 훨씬 넘었다) 김종한 선생이 개인 레슨을 해주며

    한을 풀어주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었다.

    평소에 레슨비도 제대로 못내는 윤기순은 죄송스러워 어찌지 못하다가

    한가지 묘안을 내어 스승인 김종한 선생을 비롯해서,

    회장인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작사가 고명기·류노완·월견초 선생 등을

    자기의 고향인 소양강댐 상류에 초청했고, 고향집의 아버지도 자기 딸을

    지도해 주는 서울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주로 빙어·잉어·붕어·장어 등)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어부였다.

    윤기순의 부모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을 잡는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을 때의 여가를 틈 타 윤기순은

    반야월 선생에게 [회장님~ 저기 조그마한 갈대 숲 섬이 보이시지요.

    거기 가면 아주 경치도 좋고 놀기도 좋아요.

    우리 저 섬으로 놀러가요.]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놀이문화(?)에 일가견을 가진 그들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르는 주위 경치에 일행은 시상을 가다듬었다.

    바로 이때였다.

    청천벽력으로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오면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왔다.

    소나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잔잔하던 강물결이 산천초목을 삼킬 듯이 일렁거리고

    갈대 숲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나기에 흠뻑 젖은 윤기순이

    [아이고 무서워]하면서 반야월 선생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바람은 10여분간을 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을 거두고

    다시 해맑은 여름 햇살이 내려 쪼이는 변화무쌍의 심술을 부렸다.

    일행은 다시 뭍으로 나와 젖은 옷을 말렸고, 반야월 선생은 이때의 느낀 감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듬고 다듬어 [소양강 처녀]라는 가사를 만들었다.



    1.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2.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1969년 봄,

    반야월 선생은 이 가사를 가지고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방문하여 신곡으로

    쓰라고 내어 주자 회사 문예부의

    상담역이던 작곡가 이호 선생은 자기가

    작곡하겠다고 자청했다.

    가사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악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노래에는 가수 지망생 중에서 김태희가 선택되었다.

    당시는 음반 한장(보통 12곡)에 옴니버스 스타일이어 10여 명의

    가수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12곡의 취입이 끝난 뒤 회사는 어느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오아시스 전 직원을 모아놓고 노래를 들려준 후 무기명 투표로

    타이틀곡(PR곡)을 결정하기로 했고 여기서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가

    뽑혔다.

    LP음반이 나오자 김태희(본명 박영옥)의 아버지는 답례로 반야월 선생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했다는 후일담도 있었고, 편곡은 박시춘 선생이 먼 친척

    조카뻘이 되는 김태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소양강 처녀>는 대 히트를 했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한 것 김태희는 <소양강 처녀> 이후 이렇다 할

    뚜렷한 후속곡을 내지 못하고 가요계 인기 대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92년 한서경이라는 가수에 의해 현대적 감각으로 편곡된 종전에 없던

    3절 가사를 넣은(역시 반야월 선생께서 작사)<소양강 처녀>를

    리바이벌해 인기곡으로 재탄생하면서 노래방 시대에 이르러 최고 인기곡이

    되었고 가요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김태희가 덩달아 클로즈 업

    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양강 처녀]를 부른 가수 중에 김태희라는

    남자 가수도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달뜨는 소양강에 조각배 띄워
    사랑의 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져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95년 춘천시에서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초청했다.

    춘천의 명소 소양강, 그리고 소양강 댐에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소양강 처녀>의 노래비를 세울 계획을 밝히고

    작사가로서 노래비 건립에 관한 자문을 요청해 왔다.

    그리고 노랫말 중 [열아홉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의 모델이 된 주인공이

    있다면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고 한다.

    반야월 선생은 스스럼없이 1968년 어느 여름날 소양강 상류 작은 섬에서

    소나기를 맞는 순간 느꼈던 시심(詩心)과 사무실 직원 윤기순의 일화를 피력했다.

    여기서 노래비와 배경에 소양강 소녀 동상도 만들기로 결정이 되었다.

    한데 현재 노래의 주인공이 된 윤기순의 행방이 묘연했다.



    소양강 상류에 살고 있는 윤기순네는 이사를

    가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춘천시에서는 경찰국에 협조를 의뢰 전국적인

    컴퓨터 조회 탐지로 윤기순이 광주시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끝내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또한 가정 형편상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취입곡 하나 없는 한 많고 설움 많은

    무명가수 윤미라로 광주의 야간업소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후 윤기순과 <소양강 처녀>에 얽힌 사연은 KBS-TV [이것이 인생이다]

    시간을 통하여 방송(2000년)되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2005.11.8) 춘천시민의 날 춘천시에서 소양강 처녀상을 건립한
    사진이 위에 보시는 소양강 처녀상이다.
    그리고 노랫말 2절에 [동백꽃]은 흔히 바닷가에 피고지는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꽃]을 강원도 지역에서 동백꽃,또는 동박꽃으로 부르는 사투리를
    작사가 반야월선생님이 지역 정서를 살리기 위하여 그대로 사용한것으로
    사료된다.  아래에 있는 사진이 생강나무(일명:동백나무꽃)이다.
    출처 : yalta93
    글쓴이 : yalta9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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