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딤후 3:15~17).

성서 잘못 읽으면

성서는 단연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그 어떤 책도 성서만큼 많이 보급되고 널리 읽힌 책은 없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6500여 가지로 파악되는데 그중에서 성서는 '쪽 복음(단편)' 번역까지 다 포함하면 2만 5080(2009년 기준)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국내에서 한 해 동안 판매되는 성서만 해도 120만여 권에 달합니다. 한국은 성서 제작 기술이 우수하여 연간 국외로 수출하는 성서도 500만 권 이상입니다(2010년 기준). 그런데 어떤 분은 말합니다. "성서는 인류 최대 베스트셀러지만 성서만큼 잘못 읽힌 책도 없다"고. 물론 성서는 무수한 문학·예술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단테의〈신곡>,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 톨스토이의 <부활>, 번연 요한의 <천로역정> 같은 수많은 소설, 렘브란트, 미켈란젤로,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의 그림들, 바흐, 헨델, 모차르트 같은 많은 음악가의 작품들이 성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서를 모르고는 서구의 문화 예술을 도무지 이해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성서에 대한 오해가 인류 역사에 끼친 폐해도 엄청납니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이단 재판, 노예사냥, 유대인 학살, 제국주의 따위의 끔찍한 범죄 행위를 뒷받침하는 데 성서가 거듭 악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를 열심히 읽어야지만 이에 못지않게 '잘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서를 잘못 읽으면 사람 여럿 잡을 수 있습니다. 꼭 '이단'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일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성서를 잘못 읽어 몹시 편협한 신앙을 갖고 사는 사례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노아에게는 셈·함·야벳이란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홍수가 끝난 뒤 이들에게서 인류가 나와 온 땅에 퍼졌다고 전합니다(창 9:19). 그리고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덧붙였습니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발가벗고 자는데 함이 아버지의 수치(성기)를 보고는 두 형에게 이를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하여 겉옷으로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막내 함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함의 후손 "가나안은 가장 천한 종이 되어 그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셈은 백인, 야벳은 황인, 함은 흑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에 들어온 미국 출신의 백인 선교사들이 대개 그렇게 가르쳐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서는 셈·함·야벳에서 인종이 갈라져 나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성서 해석은 19세기 미국 백인들이 흑인 노예사냥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백인이 흑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수하다는 어떤 생물학적 증거도 없습니다. 한데도 많은 한국인은 백인을 마치 상전처럼 우대하고 흑인은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인종차별만도 나쁜데, 만일 기독교인들이 성서가 그것을 가르친다고 확신한다면 이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입니까? 실제로 역사상 하나님 이름을 내걸고 '인종 청소'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크리스천 확신범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를 생각해서라도 성서를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참뜻을 깨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목소리

오늘 읽은 말씀은 성서의 유익을 알려 주는 신약의 본문 중 하나입니다. 아마 어지간한 기독교인치고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례문답 때도 성서가 어떤 책인지 물을 때 이 구절이 널리 활용되곤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아무리 금과옥조 같은 말씀이라도 잘못 쓰이면 금세 "돼지 코에 금 고리 격(잠 11:22)"으로 변질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여러 보수 교단에서는 이 본문을 '축자영감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사용합니다. 즉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썼기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정확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를 일컬어 '문자주의' 혹은 '근본주의'라 합니다. 성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다 하나님 말씀이기에 빼거나 더함 없이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믿는 게 문자주의적 신앙입니다. 한데 현재 한국교회 대다수 신자는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는 문자주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29년 전 한 조사 통계로는 평신도 92.3%, 목회자 84.9%가 축자영감설적 성경관에 동의를 표했습니다(<한국교회 100년 종합조사연구>(기사연, 1982)). 지금이라고 여기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으로 보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복음서에는 "오른쪽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빼내 버려라(마 5:29)"거나 "믿는 자는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는다(막 16:18)"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을 예수님이 명한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받아들여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 드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일부 구절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글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며 복종을 요구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 내부의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많은 남성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고전 14:34)"라는 구절을 내세워 여성 안수를 극구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에서 여성 목사, 장로가 생겨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감리교(기감)가 1930년에 여자 목사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했고 장로교 중에서는 기장(기독교장로회)이 1974년에, 예장통합(예수교장로회통합)은 1994년에 여성 안수가 허락되었습니다. 장로교는 이미 1934년에 함경도의 20여 개 교회 여성들이 여성 안수 문제를 총회에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춘배 목사(성진중앙교회)가 <기독신보>에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는 2000년 전 고린도 교회라는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인데 그것을 만고불변의 법칙처럼 내세워 여성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글을 썼습니다.

이에 대해 총회는 "이렇게 성경을 경멸히 여기는 인물들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의 정확 무오한 유일 법칙으로 믿는 우리 장로교회 교역자로 용납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김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 출교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김춘배 목사의 사과로 가까스로 일단락되었고 그 뒤 60년 만에 여성 안수가 통과된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한국교회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철저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의 70% 가까이 여성인데 정작 여성들은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초기 기독 여성들에게 해방의 복음으로 다가왔던 성서가 어느덧 족쇄처럼 그들을 옥죄고 있습니다. 이런 뿌리 깊은 병폐를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한국교회는 철저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쳐 읽는 성경

디모데전후서는 사도바울이 쓴 편지로 알려졌습니다. 서두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서학자들 가운데 이 책을 사도바울의 작품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용을 꼼꼼하게 연구한 결과 사도바울이 살던 시대보다 거의 한 세기 후에 기록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대개 이 책들의 저자를 사도바울의 제자이거나 바울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후대로 갈수록 차츰 변질하곤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적어도 일곱 명 이상의 많은 여성 제자가 있었습니다.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살로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들입니다. 사도바울에게도 뵈뵈, 브리스가, 유니아, 드루배나, 버시, 율리아 같은 많은 여성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인, 노예, 자유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갈 3:28)"라는 위대한 평등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저자는 사도바울의 권위를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딤전 2:11~12)." 불행히 지금까지도 여러 보수 교단들이 이 본문을 근거로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여성들의 정당한 권리 요구를 묵살할 때마다 이 본문은 너무 자주 악용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유대교에서는 여자가 배우는 것 자체를 금했는데 '조용히 배우라'고 한 것만도 상당히 진일보한 것이라 평가합니다. 일리는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를 깨고 당시 소외된 여성들을 존엄한 인격체로 대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여성들의 가르침을 금하거나 여성을 차별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이 수천 년 억눌린 여성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복음'이 된 것입니다. 다만 이 해방의 복음이 디모데전서의 본문처럼 후대의 교회 남성 지도자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을 뿐입니다.

디모데전서 저자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로마제국 속에서 큰 충돌 없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데 깊이 관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왕들과 고관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이는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 말합니다(딤전 2:2). 이 저자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한 종교로 받아들여지게 하고자 당시의 지배 현실과 타협을 시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급진적 복음을 길들여 최대한 순화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전도자 빌립의 예언하는 처녀 딸 넷을 언급하며(행 21:8),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여예언자들이 활동했다고 알려 줍니다(고전 11:5). 디모데전서도 '과부'로 불리는 교회 직분을 소개하며(딤전 5:3이하), 심지어 디도서에는 여성 장로에 관한 규정도 나옵니다(딛 2:3). 초기 교회에서 여성들이 다양한 직분의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이처럼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로 어느 특정 본문을 침소봉대하여 교회의 여성들을 침묵시키고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는 대단히 잘못입니다. 설사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해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성서의 본뜻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지혜'를 주는 데 있지, 가부장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서가 사람을 얽매는 율법이 되지 않고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