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제가 아나운서 노트를 중요시하는 이유입니다.- mbc강재형 아나운서에

도심안 2010. 6. 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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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u b j e c t   제가 아나운서 노트를 중요시하는 이유입니다.- mbc강재형 아나운서에 대한 기사 (

그는 문화방송 아나운서실에서 ‘강철인간’이라 불린다.
밤을 꼬박 새고 난 다음날도 아침부터 멀쩡하게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고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걸어다니는 표준말이 되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다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피곤을 못 느끼는” 일벌레가 되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제가 입사 면접 볼 때 왜 영문학도가 아나운서 직을 지망했느냐는 물음에 ‘운명입니다’ 한마디를 덜컥 했습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걸어다니는 표준말이 되겠다고 한 건데 그게 정말 운명이 돼버렸어요.”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나운서 강재형 씨는 직업을 떠나서도 참 말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마따나 “말을 잘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고”, 때로 도가 지나쳐서 방송중 말을 더듬을 때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욕 한마디를 안 해 봤고, 학교에서는 말 하기 전에 미리 마음속에서 논지를 세워 한번 가다듬고 난 뒤 입을 열 정도였다.
그가 매일 밤 10시55분 <스포츠 하이라이트> 시간에 산뜻한 티셔츠 차림으로 경쾌하게 프로를 진행하는 걸 보는 시청자들은 그가 속으로 얼마나 말을 연습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할 것이다.

“말에 대한 고민으로 날이 지고 샙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잘하고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걸 하루하루 더 절감하며 사는 셈입니다.
요즈음 한 소설가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란 얘기를 꺼냈는데 전 그게 몸톰과 꼬리가 바뀐 논지라고 생각합니다. 내 새끼가 얼마나 우리말 바르게 하는지 신경쓰기보다 조기 영어교육 시켜서 영어 유창하게 하는 데만 정신을 쏟는다면 그건 나라 망하는 일이죠.
말엔 얼이 담겨 있잖아요.”

그는 주말을 뺀 매일 오후 6시25분 방송되는 <우리말 나들이>를 만드는 PD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로서 PD를 한 건 그가 처음이다. 젊은 후배들은 조금만 초과근무하면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그는 날밤을 세워야 하는 이 일을 자청해서 즐겁게 맡았다.
누가 뭐래도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일은 첫째도, 둘째도 우리말을 바로잡는 것, 그 준엄한 사명을 지켜가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나운서도 사람이니까 어떻게 하면 방송은 덜 하고 유명해지나에 관심들이 많죠.
전 후배들이 들어오면 바로 그 욕망의 지점에서부터 문제제기를 합니다.
아나운서란 뭐하는 집단인가, 아나운서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아나운서는 방송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되는가.”

그는 지난 11년을 스스로 ‘아나운서 철학’이라 부르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애써왔다.
아나운서는 말을 하는 사람, 그 시대에 가장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그가 펴낸 <애무하는 아나운서>는 우리말에 목숨을 건 강재형 아나운서의 속내를 읽게 하는 책이었다.

87년 문화방송에 입사했을 때, 그는 합격자 7명 가운데 청일점이었다. 백지연 정혜정 김은주 앵커들이 동기였다.
여자 동료들이 초고속으로 ‘잘 나갈 때’, 그는 뒤에 남아 자료실 붙박이가 되어 공부를 했다.
방송이론서, 방송언어, 방송진행 같은 책을 하루 내내 읽었다.
선배들에겐 미안한 얘기였지만 고민 안 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아나운서 일을 하는 풍토가 싫었다.

“방송언어를 깊이 파고들어가니까 저절로 ‘민족주의자’가 되더라고요. 누가 뭐래도 우리말에 대해 나름의 ‘눈이’ 트이는 걸 느꼈어요.
우리말 공부를 하지 않고 표준말도 모르면서 번지르르한 거죽만으로 승부하려드는 게 속상했어요.
연예인이나 탤런트로 변해가고 있는 아나운서의 숙명을 개탄하면서도 말 제대로 하는 데는 관심들이 없었죠.
그래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혼자만 알고 있는 건 아깝다, 일을 저지르자, 결심했죠.”

그가 저지른 일이란 93년 7월, 갓 배운 컴퓨터 작업으로 16절 갱지에 찍어낸 <우리말 나들이>란 인쇄물을 아나운서실에 붙인 것이었다.
방송에서 흔히 틀리게 쓰고 있는 우리말 등을 바로 고치고 함께 생각하자고 부추기는 내용이었다.
그 초판은 무반응으로 끝났지만 그는 뚝심으로 2호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반응이 왔다.
내친 김에 95년에는 각 지역방송 아나운서들을 모아 우리말 세미나를 열었고, 97년에는 해외 우리말 방송 교류를 중국 연변 TV방송과 텄다. 그런 일련의 작업들이 뿌리가 돼 태어난 것이 1분짜리 <우리말 나들이> 프로였다.
97년 12월8일 첫 방송이 나가던 날을 그는 잊지 못한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 눈가를 적시던 그 짭조름한 눈물을 그는 누가 보든 말든 그냥 흐르게 놔두었다.



“방송이 ‘아’하면 애들도 ‘아’합니다”


“전부 다 맨주먹으로 하나씩 배워가며 만들었어요.
그림 만들기도 힘들고, 또 우선 우리부터 반성하자는 뜻에서 자체 프로그램 필름을 가지고 잘못 쓰인 말들을 먼저 잡아냈죠.
우리말은 MBC가 확실히 지킨다는 믿음을 드리고 싶어요. 인터체인지를 나들목으로, 고수부지를 둔치로 바꾼 건 참 기분 좋은 일입니다.
가끔 다른 방송 아나운서들도 우리가 고친 말을 쓰는 걸 들을 때, 혼자 흐뭇해하면서 ‘역시 넌 우리말 환자야’하며 웃죠.
끝이 안 보이는 길이지만 제 스스로 자승자박한 것이고, 또 나라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하는 믿음으로 버텨가는 겁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80년대 노래는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다.
이 대목을 부를 때면 지금도 목이 콱 막히면서 눈물이 핑 돈다. 아나운서는 그가 택한 길이었고, 운명이었다.
목숨바쳐 일할만한 값어치를 발견했기에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나운서 강재형으로 가려 한다.

“방송에서 ‘아’하면 애들이 다 ‘아’하고 ‘어’하면 ‘어’합니다.
그만큼 당대의 언어생활에 방송이 끼치는 영향이 크지요.
내 아들, 딸이 커서 ‘아버지가 방송에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말을 배웠다’고 한마디 해주면 그걸로 이 세상 왔다간 흔적을 남겼다고 행복할 겁니다.”  
    
 날개 좋은자료 정말 너무 감사해요.
아나운서 노트랑 책에 관한 글등 많은것 스크랩해갑니다..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
 x  2004/11/12
  고맙습니다.. 님들과 같이 고마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저도 계속 힘을 내서 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4/11/20
 오해지 감사히 읽고갑니다. ^^  x  2008/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