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너디 마을 농악 멜러디 소리를 찾아서
악학괘범을 지은 유자광과 대장금은 고향사람
백제가요 ‘정읍’ 소리는 장금산 마을 농악 농부가
악학괘범 정읍사, 대장금 마을의 농악은 이런 멜로디 소리였다
대장금은 정읍 산내 장금산 무녀로서 유자광이 연산군 10년에 고향사람 장금이를 궁중 수라간에 들이고 어린 장금이가 큰 수라상을 들고 올려가기 불편하여 유자광에게 개선을 부탁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나는 정읍군 너디 대장금 마을 학교에서 그 농악을 배워서 가르치고 살았다
대장금은 정읍시 산내면 너디 장금산 성황당 무녀, 그 이름을 따서 장금댁 같은 이름의 별병이고 중종의 희빈 홍씨의 시녀 였다
대장금 마을이 살았던 정읍시 산내면 너디는 누평현, 돌평현,이라는 고려시대 고을 이름이였다
인도의 간지스강 처럼 섬진강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명당터의 고을로 부여는 금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성역신앙 명당터 였다
이 마을 이름이 너디는 노디, 노들, 노돌, 이름으로 강물의 징검다리 바위돌을 거북 또는 자라로 종교 신앙체로 신봉하고 기도 했다
능악(能樂)은 일본 귀신탈이며 세발자라 능(能)자 일본발음 노가꾸 ‘노’라고 읽는데 그 백제시대 소리 이름이 누평, 너디, 노디, 노들, 노량, 능소, 능다리(능교) 능암 등으로 물가 성역의 이름이다
능 은 비를 나리는 세발자라로 우임금 아버지 곤의 토탬신 이름이다
그러니까 농악치는 마을 이름으로 귀족 왕족이 살고 가무잡희가 성행한 곳으로 충분한 환경이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임실 필봉농악에서도 마을 앞 냇가 징검다리 돌에가서 ‘노디굿’을 반드시 치고 농악을 진행기 원한다
그 노디가 일본에서 노가꾸 능악(能樂) 탈춤 산대놀이 즉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농악 노가꾸(能樂)이다
'노'는 세발자라로 물과 비를 관리하는 농사신앙 자라 거북을 뜻하는 기우제 신앙이름 소리다
그래서 너디마을 은 태초부터 강변에서 장금산세 서낭당을 짓고 누평군청의 종교산신을
성황신으로 신라 고려시대 귀족이 살거나 피신하는 요새지로 중국사신의 가무 향연지로서 계승했다
그래서 중국 진나라 진시황제 오두마차, 견훤, 원나라 황족세력 송인, 그리고 그 귀족의 망명지로 귀족 가무 문화가 지속되어 가무잡희의 악공이 정착한 곳이다
그래서 왕비 후궁 무비등 귀족 학식과 기예를 겸한 인물과 어의 의술 불경의 출판인쇄도 이루어 젔었다
최근의 갑오동학군 김개남장군과 전봉준이 다시 모이기로 한 장소가 너디 마을이였다
대장금이 태어난 정읍 산내 중종시대 장수촌 장금산 마을 전경
그래서 일본은 이곳 요새지 너디 마을 동학군의 본거지를 없애기 위해 가장먼저 섬진강 땜을 막기로 했고 모두 물에 잠기게 된다
칠보 발전소와 땜공사가 남한 최대의 노역 일자리로 전국의 노동자 장사군이 몰리고 농악 협율사 남사당패가 공사기간에 공연했다
그리고 사당패가 외진 산골에 거주하여 재인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곳 너디마을 땜공사장 너디장터에서 어려서 사당패 농악 무동으로 출발하여 농악으로 달인이 된 농악수 박대웅 상쇠가 있었다
이들을 옹동면 산성리 새터. 능성골. 가룻재 천을 개간 집을 짓고 마을과 농지를 만들어 이주 시켜농악을 장려했다
그 이유는 젊은이들이 도박놀이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대장금 마을 농악이 이동하여 왔다
대장금마을 바우덕이 지강내 (1880-1962) 농악 상쇠 박대웅(1904-1965)이 섬진강 땜 수몰민으로 옹동면으로 이주하여
그리고 유명한 설장구 신기남의 장인 유천식이 이마을 단골 농악치배로서 함께 농악을 치고 이름이 났다
그래서 그 유천식 집 앞 버드나무 아래 천변 모래판에서 매년 난장굿과 씨름을 하였다
유진용 김판순이 새납을 불고 서넙죽 권만청 문기수 장구 박판쇠등이 쇠를 첬다
유진용이라는 사람이 새납을 부는 소리는 모든 사람이 흥겹게 춤을 추었다
또 1974년에 산내면 소금실마을 김씨 회갑잔치에서 농악치는 장단이 빠르고 경기농악 남사당 풍물장단 즉 첫박자를 ‘응’하는 쉼박자로 사용 연주했다
전국에서 식민지 빈곤시대 몰려든 농악대가 많아서 가장 잘 치는 단체가 오래 남아서 정착했으나 6.25 전쟁에 거의 사망했거나 재인 신분을 숨겨서 도시로 나갔다
이들 신기남, 이명식, 이정범등이 1957년대에는 전주농고 정읍농고에서 최초 한국학교농악 교육이 설치되고 풍년가 농부가 양산도소리로 새납을 배워 불었다
그래서 그 대장금 마을 농악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악보를 만들어 학교에서 가르처 주었다
대장금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에 대비하여 대장금 문화를 연구하고 태어나는 곳의 전통문화 환경이 대장금을 만든 것이다
대장금 마을의 역사적 환경을 아래와 같이 기재하여 이해를 보강한다
이 너디 마을은 대장금 고향 마을인데, 조선중종시대 왕실에서 중종의 수라상과 의술을 올렸으며, 성종과 연산군 시대 음식요리 관리 사옹정이였던 이 마을 출신 무령군유자광이 장기간 통치했다
유자광은 이 마을 사람 '홍령'이 고모부이며 홍령은 홍길동의 사촌형이다
유자광과 홍길동이 같은 서얼 서자로서 서로 마음이 통했고 연산군시대 유자광이 홍길동을 복면 산적으로 위장하여 부패방지 하였고 홍길동을 오끼나와로 망명시켰으나 그 후에 일본막부 덕천가강이 진격 멸해 버렸다
유자광의 부친 유규는 뇌물 주려온자 자를 때려 사망한 후로 예종이 수차레 불러도 벼슬을 버린 최고의 청백리다
그 아들 유자광이 홍길동을 산적으로 위장 부정부패를 척결했다
중종이 중병에 살려고 태인현 대장금 마을 100세 노인들을 애타게 불렀다
진시황을 5두마차 .불로초 술로 대기하고 향약집성방저자 권채의 외갓집
성종과 연산군시대 엄청난 세력자 유자광이 자기 고향사람 대장금을 채용한 고증자료가 조선실록에서 수라간에 치중하고 8년후에 중종시대 대장금 이름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연산군 10년(1504) 17년) 1월 1일(계해) 2번째기사
거대한 음식상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연산군)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유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유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자기당파의 권력투쟁을 위하여 아첨하는 시대에 미천한 궁중하녀 들이 거대한 음식상 들기가 힘겨워 큰상을 두개로나누어 올리자는 개선을 건의했다
조선은 계급에 따라 그릇과 음식상까지 규모 종류가 다르다
연산군 왕의 품위로 규정된 수라상을 두개로 나누자는 이야기는 분명히 연산군의 품위가
낮아지는 결과가 된다
유자광이 수라간 궁중음식 발전을 위하여 대장금등 실무자의 연구환경 개선으로 어려운 고충을 건의하여 왔다
여기서 대장금이 고향사람 유자광에게 힘든 것을 이야기한 것을 마구 죽이는 연산군에게 감히 건의 한 것은 대장금이 희빈처럼 대단한 미녀로 생각되며 중종도 꼭 대장금에게 몸을 맡기고 대장금 장수촌 마을사람 송씨 ,마씨 까지 궁중에 올라 오게 하려고 했다
성종과 연산군시대 유자광은 최고 세력자인데도 낮은자리 사옹정과 정악원정 하층 벼슬자리로서 수라간 음식 의학과 음악 가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수라간은 유자광의 오랜 담당부서로 자기 고향 (정읍 너디)사람이 주로 많이 들어 오기 때문이다
대장금은 이때에 유자광 마을사람으로 이미 수라간으로 입궁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대장금이 중종 왕비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유자광 이 숙청되고 8년후에 대장금 이름이 조선 중종실록에 자주 나온다
중종 10년(1515 ) 10년) 3월 21일(무인) 1번째기사
헌부에서 선·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헌부가 또 아뢰고,
전교하였다,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醫女)인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
중종 17년(1522 ) 9월 5일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콩 각 10석씩을 주고, 하사가 있었다.】
중종 19년(1524) 3년) 12월 15일(을사) 2번째기사
“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중종이 유자광 세력을 모두 숙청하였는데 천하일색 중종후궁 희빈의 하녀 대장금의 뛰어난 의술에 중종의 임종까지 지켜준 시녀라고 했다
그 중에서 송나라 망명 송씨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7차 침입에서 몽고군관리를 생포하고 그들이 송씨와 결혼하여 몽고와 화친의 시대 즉 충열왕시대 이곳 사람들이 고려궁중 수라간 장악원 가무고취 쌍화점 노래가 대유행 고려사에 기록했다
그러나 공민왕3년 명덕태후 홍씨가 이곳을 장악하여 이 마을 현 태산현과 접지 임실까지 두 곳을 군으로 승격시켜 귀족의 고려궁중음식 조달지로 전통적 음식 가무가 발달했다
지금이야 시골이 노인만 살지만 조선 중종시대 조사하여 보니 전국에서 최고령 장수노인 100세 이상 고령자는 태인과 순창 뿐이였다
태인현과 순창현 인접 이곳 대장금 마을 송씨와 마씨 두노인을 서울로 상경시켜 중종의 불로장수 시범자료로 모실려고 왕이 애를 섰다
1533년 7월 17일 (중종33년)에
대장금이 중종의 병을 치료하면서 태인현 산내면의 송효행씨 부인 김씨와 순창 의 마유량씨 부인 조씨가 100세 이상으로 전국최고 장수노인으로 알려져 중종이 수차례 두사람을 궁중으로 올려오게 하여 중종의 병, 노인병의 표본으로 관찰하고 치료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장금이 자기의 고향에서 소문난 100세 이상 노인의 존재를 중종에 알린 때문일 것이다.
불로초 진시황이 5두마차위에 이런 진시황제 탄생을 비는 허왕보굴이 있다
그림으로 그려본 그시대 이곳 불로초 마차로 시황제모시기 상상도
진나라가 망하고 돌아갈길이 없는 동방 삼신산 불로초 케러간 '서시'가 이런 진시황의 5두마차를 정읍 대장금 마을 암벽
'허왕보굴' 앞에 만들고 진시황제 재림 탄생하기를 대기하고 있다
백제가요 정읍사 그정읍사를 한글노래가사로 유자광이 만들었다
악학괘범을 만든 유자광의 마을에서 대장금이 중종의 후궁 희빈 이 살았던 마을에서 이어온 농악 멜러디 소리를 채록하여
동영상 교육용으로 사용한다
백제가요 정읍사 수제천과 동동가요를 빠르게 연주하여 보면 우리민요의 골격 새소리 토탬이 농부가 태평가 양산도 능게(농가)가락과 유사하다
춘향전에서도 농악치며 농부가를 불렀다
우리민요 판소리 어디에도 없는 소리 미국애국가 성조가 멜러디를 '전라도 시나위'라고 가르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출처 : 오경
글쓴이 : 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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